125화
“갸옹.”
루는 빛이 꺼진 소환진 위에 올라왔다.
그러고는 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인 제 계약자를 향해 다가갔다.
[울어?]
“아니.”
그럴 자격이 없었다.
알렌드는 루에게 물었다.
“……제대로 돌려보낸 거겠지?”
[응.]
루는 날개를 파닥거렸다.
다른 때 같으면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계약자의 말에 기분이 상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초대 성녀에게 신탁이 내려왔었다더군.”
몇 주 전, 알렌드는 보니아 왕국의 왕녀가 갖고 왔다는 역사서의 내용을 루에게 말해줬다.
초대 성녀의 몸이 약해지면서, 간절하게 기도한 보니아의 왕이 받은 신탁.
시작에서 지하로 돌아가라.
샤를이 가져온 역사서의 숨겨진 페이지에서 그 구절을 발견한 순간, 알렌드의 머릿속에서는 가설이 세워졌다.
‘지하’에서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온 적 없던 루가 소환진의 술식 오류를 알고 있었다.
세이칸 신이 내린 성녀의 소환진, 그게 만약 지하의 지식이라면.
[‘시작’은?]
“……소환진일 가능성이 크다.”
[소환진? 그러면 몸을 낫게 해주는 신탁이 아니잖아?]
“그래. 지하에. 아리를 원래 세계로…… 되돌려 보낼 방법이 있어.”
성녀의 몸은 신성력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니, 신성력이 없는 세계로 간다면 살 수 있을 터.
알렌드와 루는 신탁이 말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하에서 소환진을 하나 찾았어. 성녀의 세계를 연결한.]
그리고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보니아 왕국은 왜 초대 성녀를 돌려보내지 않았지?]
“지하로 갈 방법을 몰랐겠지. 혹은 성녀가 원치 않았다거나, ……보니아의 왕이 원하지 않았다거나.”
[마지막은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
루의 질문에 알렌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알렌드는 결심을 굳히지 못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아리가 사라지는 상상을 했다.
그게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돌려보내는 것 외에도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더 찾아보면 아리의 몸을 고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는 건 그의 최후의 보루였다.
마지막의 마지막.
또 그 마지막의 마지막.
하지만.
“어……. 폐하.”
“신아리!”
아리가 피를 쏟으며 쓰러진 그날.
알렌드는 깨달았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건, 아리가 제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리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원래 세계로 보내야 한다.’
아리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기 싫다고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매달린다면, 알렌드는 그것을 떨칠 자신이 없었다.
“폐하……?”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봤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 네가 날 원망해도 좋다. 날 욕하고 저주해도 좋다.
뭐든 상관없었다.
네가 살아있어 주기만 한다면.
“돌아가. 신아리.”
아리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제 가슴에 박혔다.
그가 평생 속죄해야 할 죄였다.
“…….”
아리를 돌려보낸 뒤.
한참을 미동 없이 앉아있던 알렌드는 몸을 일으켰다.
제 세계는 끝났지만, 아직 이 세계는 끝나지 않았으니.
아직은 멈춰있을 수 없었다.
[변절자 군대라니. 성녀가 없는 게 아쉽네.]
비록 멸망이 예견되는 세계일지라도.
“……멸망은 우리끼리 봐도 족해.”
***
한국대학 병원 당직실.
신경외과 전공의 이태성은 충혈된 눈으로 핸드폰을 응시했다.
밀려오는 콜에 밤을 새웠다. 이러다간 아침 회진 때 교수님 옆에서 병든 닭처럼 졸지도.
‘새벽 4시 29분……. 30분까지 콜 안 오면 10분만 자자.’
하지만 오늘 당직의 신은 이태성의 편이 아니었다.
핸드폰 앞자리가 3으로 바뀌자, 귀신같이 벨소리가 울렸다.
이태성은 눈물을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네.”
[서, 선생님!]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
상황을 들은 이태성은 곧바로 당직실을 나와 병실로 달려갔다.
구석의 커튼을 걷자, <신아리>라 적힌 이름표가 달린 침대가 나왔다.
“환자분.”
이태성은 떨리는 마음으로 환자에게 다가갔다.
“이번에 여고생 환자 맡았다며?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에 치인.”
“말도 마라. 이제 졸업하고 대학 들어갈 일만 남았었다는데, 내가 다 안쓰럽더라니까.”
“깨어날 가능성은 있대?”
“글쎄. 교수님들 말씀으로는 ‘가망 없음’이라더라.”
1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고 식물인간이 된 환자.
신아리가 눈을 뜨고 있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여기는 한국대 병원이고, 저는 환자분 주치의입니다. 본인 성함 말씀해보세요.”
“…….”
이태성은 몇 번 더 신아리를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선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깨어난 게 아닌가?
하지만…….
“선생님, 보호자에게 연락할까요?”
간호사의 질문에 이태성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죠. 일시적인 반응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눈물을 저렇게 흘릴까요. 누가 보면 세상이라도 무너진 줄 알겠어요.”
간호사의 목소리에 안쓰러움이 절로 묻어나왔다.
눈만 뜬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환자의 모습이 어딘가 부서진 사람처럼 보였다.
***
빛에 빠졌다.
한없이 추락하는 와중, 어딘가에 크게 부딪힌 느낌이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익숙한 문명 속에 있었다.
“환자분, 제 말 들리세요? 들리시면 본인 성함 말씀해보실래요?”
“……신아리요.”
병원.
트럭에 치인 후, 나는 식물인간 상태로 이 병원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무려 1년 동안이나.
“아리야, 깨어났구나!”
“걱정했단다.”
“……일어났냐?”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아빠네가 찾아왔다.
큰엄마, 큰아빠, 친척 오빠.
꼴도 보기 싫은 얼굴들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혼란 때문에.
‘꿈이었던 거야? 그동안?’
병실을 옮기는 날, 간호사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잠들어 있었을 때 서러운 꿈이라도 꿨어요?”
“네?”
“환자분, 의식 돌아오기 전에 이틀 동안 눈물만 흘렸거든요. 뭐가 그렇게 슬펐나 해서.”
“……그냥 꿈이 엄청 슬펐나 봐요.”
나는 기운 없이 웃어 보였다.
그렇게 내가 알던 현실 속에서 며칠이 흘렀다.
“아리야.”
목발을 짚은 채 병원 복도를 걷던 중, 날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이태성 선생님.”
맞은편에서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사람은 이태성 선생님이었다.
내 주치의이자, 본인 피셜 한국대 병원 최고 미남이라는.
“재활 다녀온 거야?”
“넵. 저 곧 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재활 선생님들이 저 타고났대요.”
나는 양 겨드랑이에 낀 목발 중 하나를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태성 선생님은 웃음으로 받아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자 다녀왔어?”
“선생님, 이런 것도 다 훈련이에요.”
“훈련 좋지. 그래도 깨어난 지 열흘밖에 안 됐잖아. 갑자기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되도록 보호자랑 같이-.”
“어머, 아리야!”
누군가 뒤에서 내 등을 쳤다.
매운 손길에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금세 들어갔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큰엄마. 오셨어요.”
“넌 왜 병실에 안 있고 혼자 돌아다니니?”
“아리 보호자님. 안녕하세요.”
“어머나. 이태성 선생님. 안녕하세요.”
큰엄마는 사람 좋은 얼굴로 이태성 선생님과 인사한 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 넌 재활 다녀온 거니? 큰엄마랑 같이 가자고 했잖아. 얘도 참. 속상하게.”
“아……. 죄송해요.”
“글쎄, 선생님. 얘가 이렇다니깐요. 큰엄마가 이렇게나 자기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큰엄마의 호들갑에 표정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이태성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리가 좋은 보호자 분을 뒀네요. 챙겨주시는 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보호자는 저희밖에 없으니 잘 챙겨야죠. 죽은 얘 엄마가 고아라서 얘 핏줄이 큰아빠밖에-.”
“하하. 보호자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리도 다음에 보자.”
“네.”
이태성 선생님이 자리를 뜬 후, 나는 큰엄마와 병실로 돌아왔다.
큰엄마는 내가 침대에 눕는 걸 도와준 뒤 물었다.
“사과 좀 먹을래?”
“……아뇨.”
“그래도 깎아놨는데 큰엄마 성의를 봐서라도 좀 먹으렴. 이번 사과가 달다니까.”
나는 큰엄마가 건넨 포크를 받아들었다.
입안에서 씹힌 사과가 아삭거렸다.
“맛있니?”
“네…….”
“그럼 먹고 있으렴. 나 전화 좀 하고 올 테니까.”
“네.”
큰엄마가 나가고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깨어난 이후로 쭉.
‘폐하…….’
아까 이태성 선생님의 부름이 폐하의 부름이었다는 기대를 했던 거라면.
내가 미친 걸까.
‘꿈이라잖아. 신아리.’
젠달에서 지낸 그 시간이 현실이라 믿고 싶었지만,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신성력도, 반지도 없고. 청력과 시력도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내 몸은 1년 동안 이 병원에 있었다는데.
“믿고 싶어도 증거가 없잖아…….”
금세 차오른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이불을 적셨다.
폐하를 만나서 왜 날 돌려보냈느냐고 따지며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한테 상의하지 않았는지.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처럼 보였는지.
‘내가…….’
폐하한테 짐이었는지.
‘보고 싶어.’
묻고 싶은 건 한가득한데 나는 폐하가 존재하는 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병실로 돌아올 큰엄마한테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목발을 짚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언제까지 저년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큰엄마?’
익숙한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나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큰엄마밖에 없는 휴게실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기다려보라고? 허이고. 신석재 씨. 저년 수발들다가 네 마누라 화병 생길 거 같거든?”
…….
“뭘 그렇게 눈치를 봐. 그냥 말하자니까. 막말로, 지가 간 안 주고 배겨? 하나뿐인 큰아빠 간 이식 안 받으면 죽겠다는데.”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왜 나한테 잘해주나 했다.
‘……역시 폐하를 만난 건 꿈이었나 보다.’
내 현실이 그렇게 달콤할 리 없었는데.
이런 게 내 현실이라 걸 잠시 잊었다.
“아무리 당신 동생 자식이라도 그렇지. 저 기분 나쁜 애를 꼭 우리 집에 둬야겠어?”
“미해야. 8억이다. 쟤 부모 사망보험금이.”
“파, 팔억?”
“그래. 우리는 후견인 신청만 하면 돼. 성인 될 때까지 딱 4년만 데리고 살자. 집안일 힘들다며? 입주 가정부 들여놓은 셈 치자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