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다 완벽했는데.
이날마저 내 몸뚱어리가 배신을 때릴 줄은 몰랐지.
하필이면 그때 피를 흘리냐. 피까지 흘린다는 건 폐하한테 안 들키고 싶었는데.
폐하 생일파티를 망친 주범. 그게 바로 접니다. 흑흑.
“…….”
아직 눈을 뜰 정도로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 건 아니기에, 나는 몽롱함 속에서 내가 있는 장소를 추측했다.
이불의 감촉과 베개 높이를 보아하니 내 방 침대인 거 같고.
근처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갸옹.”
폐하랑 주인님?
무슨 이야기 중이었던 거 같긴 한데, 내가 대화가 딱 끊길 시간에 맞춰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폐하.”
“아리, 일어났어?”
침실과 거실이 이어진 곳에 서 있던 폐하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주인님이랑 뭐 하셨어요?”
“변절자 문제로 의논할 게 있어서.”
폐하, 거짓말할 때 지금처럼 목소리 조금 낮아지는데.
뭐. 내가 알아야 할 정도의 이야기는 아닐지도.
크게 궁금하지 않았기에 나는 어루만지는 폐하의 손길에 내 뺨을 맡겼다.
폐하 손 기분 좋아. 심장은 오늘도 마구 뛰지만.
“저 잠들고 얼마나 지났어요?”
“다섯 시간 정도.”
“아직 하루는 안 지났네요. 우리 케이크도 먹어야 하는데. 크림 말랐으면 어쩌죠…….”
“보관해 놓으라 했으니 멀쩡할 거야.”
“크. 역시 내 남친.”
나른하게 뜬 눈으로 웃음 지으며 폐하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폐하는 그런 내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으으. 예고하고 해주세요. 제 심장 놀라니까.”
훅 들어온 기습공격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폐하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케이크 먹을래?”
“당연하죠. 장담하는데 폐하 인생에서 드셔 본 것 중 제일 맛있는 케이크가 될걸요. 아, 참.”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치워진 음식을 제외하면 아까 생일파티 한다고 꾸며놓은 그대로였다.
서랍장에서 포장된 것을 꺼내 폐하에게 건넸다.
“이건?”
“생일 선물 맛보기? 제대로 된 건 진짜 생일에 드릴게요. 아직 안 왔거든요.”
폐하가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나온 건 곱게 접어놓은 손수건이었다. 귀퉁이에 폐하 이름과 금빛 독수리 자수를 놓은.
“후후. 잘 나왔죠? 제가 장인의 심정으로 한 땀 한 땀 수놓았다니깐요.”
폐하는 자수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고마워. 잘 쓸게.”
“따로 갖고 싶은 건 없으세요?”
“지금도 과분한데.”
“어허, 일 년에 한 번밖에 안 오는 기회인데요? 지금 말씀 안 하시면 올해는 끝이에요. 내년을 기다리셔야 한다니깐요.”
끝은 무슨.
폐하가 갖고 싶은 건 언제든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드릴 수 있습니다.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았더니, 폐하가 입을 열었다.
“……여행, 갈까.”
“여행이요?”
“어디 멀리 나가본 지 오래됐잖아. 답답할 것도 같고.”
폐하는 아직도 날 모른다니까. 폐하 얼굴이 있는데 답답할 일이 뭐가 있지……!
그래도 폐하가 먼저 제안한 여행, 가기 싫다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여행.”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는 그런 날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신아리.”
“네?”
“지금부터 키스할 거야.”
……윽.
예고 한 번 심장 떨리게 하신다.
나는 다가오는 폐하의 입술에 눈꺼풀을 내렸다.
***
며칠 뒤.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날이었다.
우연히 아는 사람들을 줄줄이 마주치는. 이상한 날.
“시아나, 산책하러 갈래?”
“그럴까요?”
“카디얀도 괜찮아요?”
“성녀님 뜻대로 하시죠.”
날씨가 좋아서 잠깐 산책을 할까 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노크를 준비하던 노엘과 마주쳤다.
“성녀님!”
“앗, 노엘.”
“어디 가세요?”
“응. 산책 좀 하려고.”
반가워 함박웃음을 짓는 노엘의 뒤로 익숙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성녀님! 저희도 가도 돼요?”
렉스랑 포인이었다.
셋이 아주 친해졌는지, 요즘엔 세트처럼 붙어 다니더라니까.
“그냥 걷기만 할 건데, 재미는 없을걸?”
“저희는 그게 더 좋아요.”
좋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고.
그러라 했더니 냉큼 옆자리를 꿰찼다.
그다음 만난 건 헬리.
“아, 성녀님.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동행하면서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다음에는 에드워드를 비롯한 성녀교 단원들.
“성녀님……!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산책만 하는 건데요……?”
그리고 라울 신관님과 에본 재상님.
“허허. 늙을수록 걷기 운동을 해야 한다더군요. ……재상께선 왜 뒤로 가 계시는지?”
“에드워드 부단장과 할 말이 있어서 천천히 가겠습니다.”
“전 할 말 없…….”
마지막으로 인형 모습인 초비랑 론데이만까지.
“초비도 산책을 한다고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요?”
“하핫, 요즘 사람들을 하도 만나다 보니 이 정도는 만나는 것 같지도 않아요.”
“연구소장님, 방금도 인간 많다고 짜증을-.”
“조용히 해라.”
“넵.”
이건……. 피리 부는 성녀도 아니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왜 다들 가던 길 안 가고 내 뒤만 쫓아오고 있는 건데……!
날 선두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양새가, 누가 보면 어디 단체로 황궁 관광하러 온 줄 알겠다.
황궁을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이 행렬이 신기한지, 한 번씩 걸음을 멈춰서 구경하곤 했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나와 눈이 마주친 시아나가 생긋 웃었다.
“뭐 필요하세요?”
“응? 아니. 사람 많아서 좋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좋습니다. 성녀님.”
카디얀이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네?”
“이렇게……. 다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게 참 좋네요.”
“저도 좋아요!”
“저도요!”
끝에 ‘봄이었다.’ 같은 소리를 붙일 법한 감성적인 대사였다.
진지해진 카디얀을 조금 놀려볼까 했었는데, 아이들이 끼어들어 타이밍을 놓쳤다.
“저도 좋습니다!”
“성녀님!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말을 시작으로, 뒤쪽에서도 ‘저도 좋아요!’, ‘좋습니다!’ 같은 말들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게 좋기도 하고, 흔히 볼 수 없는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 웃음보가 터져 한참을 웃다가, 나는 또 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다.
“…….”
“깼어?”
나는 마차 안에서 눈을 떴다.
잠들기 전에도 마차 안이었으니, 이번에는 짧게 잔 모양이었다.
눈 뜨자마자 들리는 게 폐하의 목소리라니. 내가 기대고 있는 게 폐하의 어깨라니……!
‘으으. 너무 행복해.’
나 잠자는 것만 좀 줄었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숙이니 폐하의 손이 보였다.
여전히 예쁘긴 하지만, 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앙상한 걸 보니 속이 상한단 말이지.
폐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자니, 폐하가 깍지를 꼈다.
“윽.”
“잡고 싶어서 만지는 줄 알았는데.”
“속상해서 만진 거거든요.”
“그래서, 싫어?”
“아니요.”
너무 좋은데요.
누가 싫다고 했나.
우리는 키득거리며 손장난을 했다.
그러다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 마차가 멈춰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착했어요?”
“응.”
“헉. 설마 저 때문에 계속 서 있던 거예요? 빨리 나가요.”
“……그래.”
나는 서둘러 마차 문을 열었다.
헨켈 대장이 우직한 나무처럼 서 있었다.
“대장도 계속 이러고 계셨어요? 미안해요. 제가 늦게 알았어요.”
“아닙니다.”
대장은 특유의 진중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다녀오라는 거죠? 대장이 걱정할 정도면 위험한 곳인가 봐요. 폐하께서 목적지를 안 알려주셔서……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말을 멈췄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첨탑.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외부에 화려한 조각을 새긴 커다란 신전.
오랜만에 왔지만, 몰라볼 리가 없었다.
여기 내가 소환됐던 장소잖아.
폐하랑 처음 만났던 장소.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입니다.”
그때 이후로 일 년 조금 넘게 지났나.
크흐, 추억 돋는다.
폐하가 끝내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아 어디로 가려나 했더니.
“여행하러 오고 싶으셨던 곳이 여기였어요?”
“……응.”
폐하와 나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에 있는 소환진, 세이칸 신을 형상화한 거대한 석상, 벽에 걸린 횃불들.
신전 안에 감도는 차가운 공기마저 그날과 똑같았다.
‘설마.’
이거 추억 여행 같은 건가.
가만, 그러고 보니 우리 곧 100일이잖아!
젠달도 그런 기념일을 챙기나? 그래서 폐하가 이벤트를 준비했다든지……!
나는 폐하 생일에 정신 팔려서 준비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크흡. 동상에 이어 이것도 져버리는 건가…….
“폐하, 이건…….”
나는 소환진이 그려진 단 위에 앉아 폐하를 바라봤다.
폐하는 무슨 생각인지 모를 얼굴로 내 앞에 걸어와 섰다.
그리고는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네 몸을 고칠 방법을 찾았어.”
“정말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건강에 큰 욕심은 없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좋아지면.
‘그러면 우리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은 거 아닌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순간 실현 가능할 것만 같은 미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건강한 모습으로 서로 마주 보며 웃는 폐하와 나.
슬픔이 사라진, 행복한 모습의 폐하.
“폐하, 그러면……!”
나는 희망에 차 밝게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날 안은 폐하한테 놀라 끝까지 말하진 못했지만.
“네가 날 절망에서 꺼냈어.”
“에이, 또 그러신다.”
폐하가 또 울까 봐, 나는 화제를 돌리려 했는데-.
“그러니까, 나는 널 잃을 수 없어.”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말투로, 폐하는 날 안은 손에 힘을 풀었다.
내 등 뒤로 환한 빛이 일어났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폐하를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폐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폐하……?”
“돌아가. 신아리.”
툭.
폐하가 내 어깨를 밀어냈다.
[그동안 재밌었어. 성녀.]
주인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빛에 집어삼켜져 한없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