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똑똑.
시아나는 아리의 방을 노크했다.
“성녀님? 들어갈게요.”
몇 번을 두드려도 안쪽이 잠잠하자, 시아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의 예상대로 열린 창문 아래, 아리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품의 수틀을 보아하니 수를 놓다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시아나, 그거 알았어? 이름을 수놓은 손수건을 연인한테 선물하면 다치지 않는다는데?!”
하녀한테 들은 이야기에 아리는 그날부터 수를 놓기 시작했다.
완벽한 수를 놓아보겠노라고 없는 실력에도 노력하길 며칠.
이제는 꽤 그럴듯한 수를 놓는 게 사랑스러웠다.
“…….”
시아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은 후, 아리의 머리 아래에 베개를 끼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황제가 은밀히 부르는 대륙의 유능한 치료사들의 방문은 꾸준했지만.
성녀의 잠은 여전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밥을 먹다가도 졸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졸고, 길을 걷다가도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바람이 세게 불었었나 보네.’
잠든 아리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시아나의 손끝이 쓸쓸했다.
요즘 들어 적막이 익숙해졌다.
주인인 아리를 따라 궁도 잠에 빠진 것인지, 프로딘타 궁은 조용할 때가 많았다.
‘성녀님.’
이렇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은, 지난날의 자신은 알고 있었을까.
“시아나 프라단께서 입장하십니다!”
사교계의 화려한 꽃.
어떤 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어떤 이들에겐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
좋든 싫든 존재만으로 모두의 이목을 끄는 이가 시아나였다.
데뷔탕트를 치른 후부터, 사람들의 평판은 시아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그들의 입방아 속에서 오전과 오후를 달리하는 제 가치를 보며, 시아나는 살아남는 법을 빠르게 터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나는 제가 한 일을 하지 않았다 믿게 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것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이가 되었다.
그녀는 사교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러면 뭣 하는가.
‘외로워.’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공허할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시아나는 가슴을 조이는 우울을 달고 살았다.
그날은 황궁에서 보는 달이 밝아 죽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와. 언니 엄청 예쁘네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시아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한 소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에 신비롭게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검은색 눈동자.
하필이면.
“성녀님을 뵙습니다. 시아나 프라단입니다.”
시아나는 고개를 조아렸다. 제 아비 프라단 후작이 성녀와 좋은 관계를 맺으라 하지 않았던가.
조금 전까지 죽으려던 이가 이렇게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대로 첫인상을 망치면 안 됐다.
“아,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신아리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무도회장에 있던데.”
황궁 깊은 곳에 있는 후원이었다.
하룻밤 유흥을 찾는 이들도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깊은.
죽을 곳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시아나는 곤란한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성녀님께선 왜 한밤중에 홀로 나오셨는지요?”
“아-. 사람들 구경하느라고 몰래 갔다가-. 음료수인 줄 알고 몇 잔을 마셨는데 술인 거 있죠.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웃긴 꿈이라니까. 꿈에서 취하기도 하나?”
성녀는 알 수 없는 혼잣말까지 하며 웃었다.
가만 보니 성녀의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앗, 설마 술 마시면 안 된다는 그런 소리 하시려는 건 아니죠. 제가 고딩이긴 한데요,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스무 살…….”
“아닙니다. 연회의 주인공께서 술을 즐기시는 것이 흠이 되진 않죠.”
성녀가 소환된 지 일주일.
오늘 황궁에서 열린 연회는 성녀 소환 성공을 기념한 것이었다.
비록 모두의 관심을 받는 소문의 당사자는 볼 수 없는 연회였지만.
“이런 곳에서 뵐 줄은. 영광이에요.”
다른 귀족들보다 성녀와 먼저 친분을 쌓을 기회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가운 척을 해야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시아나는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밤이 위험하네요. 거처까지 모셔다드려도 괜찮을까요?”
하지만 성녀는 시아나의 손을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시아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언니는 왜 죽으려고 했어요?”
어떻게 안 걸까. 불안에 빠진 심장이 다시금 옥죄어왔다.
치부를, 그것도 성녀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시아나는 아무렇게 내뱉는 말로 발뺌을 했다.
“저는 그런 적이-.”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니면 오늘은 계기가 생겨서?”
“계기라뇨, 그런 것 없습니다.”
“왜요. 밤바람이 상쾌하잖아요. 달도 밝고.”
“……잊고 있었는데 제가 급한 일이 있군요. 잠시 계시면 이곳으로 경비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불편한 정곡을 찔렸다.
시아나는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발목을 잡은 건 헤실 거리는 표정으로 취기와 함께 내뱉은 성녀의 말이었다.
“언니, 죽을 거면 나한테 올래요?”
“……네?”
“잘해줄게요.”
시아나 프라단이 지금껏 받아본 작업 멘트 중 최하위에 들 만한 것이었다.
평소라면 콧방귀 뀔 가치도 없는, 그런 말을.
다른 세계의 처음 본 소녀가, 제 속을 다 안다는 듯한 말투로 해버린다고 해서-.
“…….”
시아나는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도망치듯 달려 그 길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성녀의 말과 그 상황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고작 그런 말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하지만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듯한 뻥 뚫린 가슴이 단숨에 메꿔진 것도 사실이었다.
며칠을 부정하고 마침내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니 시아나의 다음 행동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성녀님이 아니면 안 돼.’
황제에게 몇 번의 부탁 끝에 성녀의 전담 시녀로 들어갔다.
“시아나는 왜 제 시녀가 되고 싶다고 한 거예요?”
“성녀님께서 잘해줄 테니 오라 하셔서요.”
“엥……?”
다시 만난 성녀는 술 때문에 지난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모양이었지만.
시아나에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제 새로운 삶은, 성녀를 위해 살아가리라 마음먹었으니.
“……어? 시아나?”
“일어나셨어요.”
시아나는 눈을 뜬 아리의 검은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오늘도 이 눈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배고프세요? 식사부터 하실래요?”
그러니 앞으로도 이 눈을 계속해서 볼 수 있길. 시아나는 간절히 바랐다.
***
알렌드가 참석한 정상회의는 하루의 반을 꽉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알렌드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회의장 밖으로 나왔다.
급한 마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걸음을, 타국의 왕 몇 명이 황제와 친분을 다져보겠노라며 허둥지둥 쫓아왔다.
“요새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폐하.”
“곧 탄신이신데, 하필이면 이번 건과 겹치게 되었군요.”
“그래도 연회는 여셔야 하지 않습니까. 나중에라도 자리를 마련하신다면-.”
왕들의 숨이 점점 차올랐다.
‘이건 거의 뛰는 거나 마찬가지…….’
젠달의 황제는 다 죽어가는 안색으로도 호흡 한 번 흐트러짐 없는데.
자신들의 체력이 쓰레기인가.
“미안하군. 바빠서.”
알렌드는 회의감에 빠진 왕들을 두고 마차에 올랐다.
한계였다. 황궁에 두고 온 아리가 걱정이 되어 버틸 수가 없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성녀가 걱정되는 건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알렌드가 탄 마차의 문이 닫혔다.
오십 정도 되는 황제 일행이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젠달을 향해 말을 몰았다.
순식간에 먼지만 남은 그들의 빈자리를, 남은 이들이 턱이 빠지라 입을 벌리며 멍하니 바라봤다.
“떠나기엔 늦은 시간이라 하루는 묵고 가실 줄 알았더니.”
“젠달이 이렇게까지 성격이 급한 나라였나……?”
“부럽구먼. 신하들이 일은 잘하겠어.”
황제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국경을 넘어 젠달로 들어왔다.
알렌드는 혼자인 마차 안에서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뒤, 그의 검지가 허공을 그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어본 거 알아봤어. 가능해.]
“수고했어.”
[정말 할 거야?]
“…….”
루의 질문에 알렌드는 한참을 침묵했다.
[결정하면 알려줘.]
시간이 흘러도 대답이 나오지 않자, 루는 더 기다리지 않고 틈을 닫았다.
이 자리에서 대답을 재촉하지 않은 것은 계약자에 대한 배려였다.
다시 조용해진 마차 안은, 알렌드가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
알렌드는 마차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굳은 입매와 날 선 눈초리.
손으로 주변 근육을 풀고 웃는 연습을 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낮 10시경. 어제저녁에 출발해 밤새 달린 마차가 멈춘 곳은 본궁이 아닌 프로딘타 궁이었다.
시아나가 알렌드를 맞이했다. 그녀도 황제처럼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낸 듯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깨어있으세요.”
“다행이군. 방에 계시는가?”
“네.”
그 말에 알렌드는 곧장 계단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던 시아나가 2층에서 3층 사이의 계단참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분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다고 하셔서요.”
알렌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마저 계단을 올랐다.
닫힌 문의 문고리가 그를 맞이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문고리를 잡기가 두려워진 건.
알렌드는 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아리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들어오세요!”
뭐가 저렇게 씩씩한지.
듣기에 꽤 좋았다. 알렌드는 피식 웃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이게 다 뭐지?”
알렌드는 하루 사이 달라진 방 풍경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본과 각종 장식으로 꾸민 벽, 테이블 위에 즐비한 음식들, 자신을 닮은 정체 모를 물건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아리는 화려한 3단 케이크 옆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폐하, 생일 축하해요!”
“……생일?”
“이 주 정도 남았지만요.”
아리는 씩 웃었다.
“어제 헬리랑 케이크를 만들어봤는데, 한 번에 바로 성공했지 뭐예요? 초심자의 행운일 수도 있으니까 오늘 저랑 파티해요! 이 주 뒤에도 하고!”
케이크 성공과 함께 마침 주문 제작한 등신대도 도착한 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며 아리는 어제부터 알렌드의 생일파티를 준비했다.
덕질의 일환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웬일로 잠도 안 왔다.
“셰엘이라고 폐하 초상화 카드 만들어준 화가한테 부탁한 거예요.”
아리는 알렌드에게 등신대까지 소개하고 난 후,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폐하, 불 끄신 다음에 눈 감고 소원 비세요!”
“소원? 달리 뭐가 있나. 그냥-.”
“앗, 입 밖으로 말하면 안 돼요. 속으로 빌어야 이루어진다고요.”
알렌드는 애가 타 서둘러 말하는 연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들은 것처럼 촛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내 소원은…….’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알렌드의 동공에 비친 건.
툭.
“어……. 폐하, 잠시 바람 좀 쐬고 오실래요? 아, 아니다. 저 심부름 좀 해주세요. 헬리한테 가서…….”
투둑.
“……아리.”
“이거 금방 멎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눈빛 하지 마시고……콜록.”
적지 않은 양의 피가 코와 입을 가린 아리의 두 손 사이로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알렌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급히 주머니에서 치료계 신성석을 꺼내 아리에게 다가갔으나.
“아. 타이밍 진짜……. 폐하, 저 지금 쓰러지는 거, 피 때문이 아니라 졸려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뒷말도 채 맺지 못하고 아리는 정신을 잃었다.
“신아리! 정신, 정신 차려 봐. 아리야. 아리야……?”
쓰러진 아리를 품에 안은 알렌드의 처절한 목소리가 방안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