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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22화 (122/150)

122화

자정이 가까워지는 늦은 밤.

알렌드는 오늘도 아리의 침실을 찾았다.

침대 위에 곤히 잠든 아리가 있었다.

천천히 걸어간 그는 아리의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숨을 쉰다. 그제야 알렌드도 깊은숨을 내쉬었다.

“…….”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아리의 머리맡에 제 머리를 뉘었다.

시간이 흐르자 어둠 속에서 보이는 윤곽이 뚜렷해졌다.

둥근 이마, 기다란 속눈썹, 귀여운 콧대, 사랑스러운 입술.

알렌드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리야.”

그러다 가만히 제 연인의 이름을 입안에 담아 보았다.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절 보며 웃어줄 것만 같은데.

깊은 밤. 방 안은 야속하게도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폐하.”

“…….”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찾아보았습니다만. 방법이……없는 듯합니다.”

에본이 모두를 대신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고된 시간이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비밀리에 황궁에 모였다.

성녀를 살리겠다는 신앙 하나로 한 달하고 보름 되는 기간을 쪽잠으로 버티며 조사에 매진했지만.

그 어디에도 생명력이 꺼져가는 성녀를 살리는 방법은 없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폐하의 건강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에본은 뒷말을 삼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황제가 먼저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췄으나, 그 또한 인간이니.

알렌드도 에본이 하려던 말을 눈치챘지만,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내 목숨이 뭐라고.”

그런 하찮은 걸 아끼다가 널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알렌드는 잠든 아리의 이마에 키스했다.

입술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도 그는 불안했다.

잠든 사이에 아리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갑자기 왔던 그 날처럼 갑자기 가버리지는 않을까.

‘무섭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는 시간이 너무나 두려웠다.

‘세이칸 신이시여.’

신성 제국 젠달의 황제였지만, 알렌드가 세이칸에게 갖는 감정은 불신에 가까웠다.

언제나 신은 제 편이 아니었으니.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턴 의무감으로 올리는 기도 외에 그가 신을 찾는 일은 없었다.

“폐하…….”

그랬던 그가, 아리의 잠꼬대 한 번에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라 신의 이름을 부른다니.

알렌드는 아리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믿지 않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제발.’

이번 한 번만은, 제 편이 되어달라고.

***

“…….”

크흡. 마지막 기억이 낮인데, 벌써 밤이라니.

오늘도 착실하게 잠만 자다 하루를 날린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침대 옆에 가져다 놓은 의자. 거기에 앉은 익숙한 모양새.

자다 깨서 제일 먼저 보는 게 폐하 얼굴이라니. 내 인생, 성공했어…….

“폐하.”

으. 목소리는 왜 갈라지고 난리람.

설마 입 벌리고 잤나. 폐하 앞에서……!

번쩍 든 정신으로 물병을 찾아 협탁을 더듬거리는데, 먼저 움직인 손이 있었다.

“일어났어?”

폐하는 익숙하게 물잔을 채운 뒤, 내 상반신을 일으켜 물잔을 건넸다.

물을 들이켜는 나를 잔잔한 미소로 지켜보는 폐하.

깊어진 아이홀과 수척해진 얼굴을 보니.

‘퇴폐 미남…….’

이 아니라.

“또 안 주무셨죠.”

짐짓 엄격한 척을 하는 말투의 내 질문에 폐하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나는 물잔을 내려놓고 폐하의 양 볼을 만지작거렸다.

후후. 폐하 여친 약 3개월 차. 이쯤은 이제 내 심장 허용 범위란 말이지……!

“살가죽밖에 안 남았잖아요. 속상하게.”

“괜찮아.”

“제가 안 괜찮거든요?”

나는 이불을 들친 뒤, 폐하를 끌어당겼다.

폐하는 순순히 침대 위로 쓰러져 내 옆에 누웠다.

“신발은요?”

“벗었어.”

매번 물어보는 내 질문에 폐하는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같이 침대에 누워있자는 일종의 암호 같은 거랄까.

“좋아요. 침대에선 신발을 벗어야죠.”

나는 마주 보고 옆으로 누운 폐하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 폐하 품 탄탄하고 넓어서 좋다. 폐하는 지방만 빠지고 근육은 하나도 안 빠지나 봐.

“이렇게 말 듣는 사람이 누구 걸까요.”

폐하는 그런 날 끌어안으며 웃음 지었다.

“글쎄.”

“폐하는 안 보이시나 봐요. 여기 제 거라고 적혀 있는데요.”

“그러면 그게 맞는 거겠지.”

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고, 폐하도 그런 내 헛소리에 장단을 맞췄다.

폐하의 날 선 기운이 조금은 무뎌지는 느낌이 들자, 나는 폐하의 등을 토닥였다.

“전 괜찮으니까 좀 자요. 이러다 내 남친 몸 다 상하겠네.”

“…….”

자라는 말에 폐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폐하, 제 몸 왜 이래요……?”

처음에는 나도 같이 불안해져서 울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깨달았지.

이 험난한 세상, 둘이서 헤쳐나가려면 한 명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무시는 동안 사라지지도 않을 거고 죽지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신아리.”

“……폐하, 울어요?”

‘또’라는 말은 생략했다.

우리 폐하, 단둘이 있을 때는 울보가 따로 없다니까.

울보라곤 해도 눈가에 눈물 맺히는 정도지만.

이 와중에 폐하 우는 얼굴 진짜 예쁘다.

예뻐서 내 마음이 찢어질 거 같이 아파.

“그런 말…….”

“아휴, 제가 잘못했어요. 누가 바보같이 폐하 속상하게 죽는다느니 뭐니 그런 소리를 했지?”

나는 폐하를 달랬다.

안 죽는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데, 그 말 때문에 폐하의 머릿속에서 내가 죽는 모습이 상상이 된 모양이었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입이 썼다.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같이 괴롭기도 했다.

나는 폐하의 입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뗐다.

“앞으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이번만 봐줘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폐하의 뺨을 감싼 내 손에 폐하의 손이 포개졌다.

“아니. 내가 미안해. 의연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 와서요?”

두 달 동안 나한테만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줬던 폐하는 다른 폐하였던 모양이었다.

놀리듯 묻자, 폐하의 뺨에 후끈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요.”

“…….”

“아주 많이.”

그 말에 폐하가 고개를 숙여 내 눈을 응시했다.

폐하의 입이 진중하게 움직였다.

“나도. 사랑해.”

“어…….”

사, 사랑은 아직 듣기에 좀 이르지 않나!

낯부끄러운 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그런 날 꼬시려고 작정이라도 하셨는지.

폐하는 내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댄 채 말했다.

“사랑해. 신아리.”

손바닥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입술의 움직임과 숨결.

조용한 방에서 속삭이듯 들리는 폐하의 꿀 떨어지는 목소리.

“……제가 지금 졸린 걸 다행으로 아세요. 안 그랬으면 폐하 오늘 잠 못 잤어…….”

폐하는 그 말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 진짜. 나 이렇게 예쁜 폐하 두고 못 죽어…….

아깝게 어떻게 죽냐.

내 몸을 고칠 방법이 없다는 건 지난번 에본 재상님이 폐하한테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다고 해서 그게 꼭 죽으라는 건 아니지.

‘정신력으로 살아남는다!’

폐하 죽는 다음날까지는 살 거라니까.

나는 밀려오는 졸음 속에서 폐하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봄을 지나 여름을 앞둔 어느 날.

오디트리아 대륙의 중심에 자리한 헤리븐 신전.

비무장지대인 그곳에서 오디트리아 대륙 동맹국 간의 긴급 정상 회의가 열렸다.

“보니아 왕국은 원로가 대표로 참여하나?”

“내전이 심했잖나. 아직 국왕이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닌가 보지.”

“젠달도 비슷한 상황 아닌가? 쯔쯧, 저 잘난 얼굴이 반의반 쪽이 됐네 그려.”

대표로 참석한 16개국의 왕 혹은 고위 귀족이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았다.

젠달의 황제가 시작을 알리자, 회의가 진행됐다.

“변절자들의 땅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옛 바버논 왕국의 땅과 인접한 나라, 바롬 왕국의 왕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알렸다.

이번 긴급회의가 성사된 이유기도 했다.

“수상한 움직임이 무엇입니까?”

“결계 너머로 보이는 변절자들의 모습이 이상합니다. 이전에는 그저 한 개체씩 어슬렁거릴 뿐이었다면……. 군대를 봤습니다.”

“군대가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겁니까? 다른 나라의?”

“아닙니다.”

바롬의 왕은 제가 아는 끔찍한 일을 말하기 버겁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변절자의 군대였습니다.”

그 소리에 장내가 술렁였다.

“변절자는 지성이 없지 않은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네.”

“군대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결계 때문에 신기루를 본 것 아니야?”

“옳소! 왕께서 잘못 아신 게 분명합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순식간에 헛것을 진실로 믿고 정상 회의를 소집한 아둔한 이가 된 바롬의 왕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진실입니다! 한 달을 넘게 보았고, 또 젠달의 황제께서도 같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젠달의 황제가?

14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상석에 앉은 알렌드에게로 쏠렸다.

회의 시작 후, 지금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통솔하는 자가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통솔이라니. 이 세계의 어떤 생명체가 변절자를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알렌드가 손을 까딱하자, 기둥 뒤에서 회의장 안을 지켜보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나 이제 나가?”

“황제, 저자는 누구입니까……!”

“나는 알겠네. 벤 볼프만 아닌가. 보니아 왕국의 골칫덩어리 해적.”

초대받지 않는 손님의 등장에, 몇몇이 당혹스러움을 표하는 중.

‘하아, 저게 왜…….’

보니아 왕국의 원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탈옥했다더니 젠달의 황제와 함께 나타날 줄이야.

볼프만이 입은 상의의 팔 부분이 휑했다.

원로는 젠달의 황제가 왜 볼프만을 데리고 나타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볼프만의 양팔을 잘라버리라 명령하던 당시, 볼프만은 몇 번이고 그에게 헛소리를 늘어놓았으니.

“안 자르면 안 돼~? 어둠을 더 모으면 나는 변절자들의 선장이 될 수 있다니까?”

변절자를 부하로 삼다니.

미친 사상이라 생각했던 그것을, 젠달의 황제가 지지하려는 것인가?

황제는 볼프만 같은 팔푼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변절자를 통솔할 수 있는 누군가가…….

원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세상이 멸망할 징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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