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폐하와 나는 보석상을 나와 마차에 올랐다.
카디얀이 할 일이 있다고 바로 안 들어오더니, 폐하 만나느라 그런 거였나.
그래서.
폐하가 왜 은발로 변장까지 하고 내 뒤를 따라오셨나 했더니.
“데이트요?”
“응.”
데이트 신청을 하러 오셨지 뭐야.
아니, 이렇게 무작정 오셔서 데이트하자고 하시면-!
좋지. 너무 좋지만, 내게도 자존심이 있으니 씰룩거리지 마라. 내 입꼬리.
“이러시려고 아침에 나가도 좋다고 하신 거예요? 갑자기 나타나시려고?”
불만 있는 척 툴툴거렸더니, 폐하가 픽 웃으며 말했다.
“안 되나?”
“되는데요.”
…….
크흡. 제발 뇌랑 상의 없이 말하지 말라고…….
“뒤에 일정이 더 남았어?”
“앙뜨완 제과점 본사에 가보려고 했는데, 약속을 잡은 건 아니라 괜찮아요.”
가서 올리비아가 있으면 잠깐 인사하고, 없으면 디저트만 보고 올 생각이었다.
내 안부는 우편으로 답장을 보내놨으니 걱정 끼칠 일은 없을 테고.
그 외의 일정은, 매일 먹던 물약의 배송이 끊겨 약초 가게에 들르려고 했는데.
“망했나……?”
간판도 없어지고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비싸도 값어치 하는 물약이라 생각했는데, 소리 소문 없이 가게가 사라졌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1년 치는 쟁여 놓을걸. 흑흑.
“그런데 동상은 뭐예요?”
“아, 벌써 알았어? 깜짝 선물이었는데.”
“……숨길 수 있는 정도의 규모는 아니던데요. 제국 전역이라뇨…….”
말할수록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생각해보니까 제국에 내 동상 깔리면 나는 창피해서 아무 데도 못 가…….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취소해 달라고 말하기에는 내게도 폐하 조각상이 있었다.
‘내 얼굴 팔리는 게 문제냐!’
나는 우리 폐하 조각상이 세상에 나오는 걸 봐야 한다고!
“예전에 아리 네가 내 조각상을 만든다고 했을 때.”
뜨끔.
폐하 요즘 독심술 터득하셨나.
“그런 걸 왜 만드나 싶었는데, 이런 기분이었군.”
“무슨 기분인데요?”
“글쎄.”
폐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다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동상을 보고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다 싶은 기분?”
“헙.”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나는 숨을 들이 삼켰다.
내가 봤을 때 폐하, 주접에 소질 있어…….
이대로 가다간 내 심장이 못 버틸 거 같으니, 나는 시선을 폐하 무릎에 두고 화제를 돌렸다.
“오늘 데이트, 뭐 하고 보낼까요?”
“아직 점심 전이니, 차를 마시러 갈까?”
차? 폐하 목마르셨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다음에는 상점가에서 쇼핑하고.”
“……? 좋아요.”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먹고, 승마장에 갔다가 디저트를 사서 호숫가 산책을…….”
뭐지.
어디서 들은 듯한 이 빡빡한 일정.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경악했다.
‘저건……!’
폐하의 손에 어디서 많이 봤던 종이가 들려있었다.
그거……. 내가 쇼웬한테 보여줬다 신랄하게 까였던 폐하와의 데이트 계획서……!
“그, 그거 어디서 나셨어요?”
“예전에 주웠는데.”
크흡. 쇼웬한테 상담받은 후에 히펜 광장에 변절자도 나오고.
궁에 돌아와서 보니까 계획서가 없어졌길래 중간에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지.
그게 폐하 손에 들어가 있었다니……!
“일출 보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었는데, 그건 어렵더군.”
“으아아……. 폐하 그거 그만 보세요.”
나는 폐하의 손에서 계획서를 조심히 빼 반으로 찢어 가방 안에 구겨 넣었다.
마음 같아선 마차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는데, 환경 보호해야지.
“저대로 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아, 아닌데요. 폐하는 하고 싶으셨어요?”
“마지막에 노을 구경은 좋았다고 생각해.”
“으……. 그러면 밥 먹고 이따가 노을 구경이나 가요.”
“성녀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렇게 말하는 폐하의 미소는 지금의 은발과 썩 잘 어울렸다.
나는 그런 폐하를 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리?”
누가 보면 첫 데이트에 졸음이 밀려온 사람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거든.
이게 다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긴 한데, 그 이유를 차마 말할 수 없었지.
“무슨 일 있어?”
“…….”
“걱정돼. 말해 주면 안 돼?”
고막이 녹을 듯한 그 목소리에 내 주둥이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있잖아요. 폐하.”
“응. 듣고 있어.”
“은발 오늘 하시고 나면 언제 다시 하실 거예요?”
“잘 모르겠는데. 예정에 없어서.”
“그럼……. 저……랑……. 키…….”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이것보단 크겠다.
하지만 다행인가. 이렇게 작게 말했으니 폐하가 들었을 리가 없지.
“키스하고 싶다고?”
들으셨잖아.
“으앗, 아뇨! 잊어주세요!”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냥 은발이실 때가 잘 없기도 하고. 아, 아니. 아무런 말도 안 했습니다.”
“신아리.”
폐하는 한숨을 살짝 쉬곤 눈썹 위 부근을 손바닥 끝으로 눌렀다.
내가 말했나. 우리 폐하 오늘 꾸미고 오셨다고……!
깐 머리에 정장에 구두에-.
평소에도 장난 아니셨지만, 지금은 금욕퇴폐섹시다.
멍하니 그 미모를 감상하고 있자니, 폐하는 양손으로 내 턱을 붙잡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는 내가 나한테까지 질투를 하게 만드는군.”
폐하의 입술이 내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떨어졌다.
으아, 으아아.
내 주둥이. 멋대로 움직인 거 이제 상 받는 건가!
“지금은 이 정도만 해.”
“충분한데요……!”
입술 닿는 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데이트 다 했다.
폐하는 당황해 하는 날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입맞춤했다.
“……?!”
“생각해보니 나도 갈색 머리인 연인과는 처음이라서.”
……무, 무, 무슨!
잠깐 사이에 금욕 어디로 갔지.
지금 퇴폐섹시밖에 없는데요.
얇은 실 한 가닥처럼 가느다래져 끊어지기 직전인 정신을 열심히 붙잡고 있는데,
어느새 뒤로 밀린 내 뒤통수는 좌석 등받이에 닿아있었다.
폐하는 내 정수리 위에 팔을 짚어 날 가둔 채 귓속말했다.
“다음번엔 마차 데이트도 나쁘지 않겠어.”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내 의식은 희미해졌다.
‘마차, 사야겠다…….’
***
“성녀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처음 그 일이 일어난 건, 개선식이 있고 삼 주가 흐른 뒤였다.
성녀가 식사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달려갔다.
“잠이 드신 겁니다.”
알렌드보다 한발 늦게 온 치료 신관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처럼 아리는 두 시간 정도 후에 깨어났다.
“봄이라 잠이 쏟아지나 봐요. 으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밥 먹다 쓰러지냐.”
아리는 일이 커진 것에 민망해하며 웃었다.
하지만 단순히 춘곤증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그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열흘 뒤. 또 그다음은 일주일 뒤.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잠을 자는 시간도 늘었다.
안일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알렌드는 아리가 잠든 사이 루를 소환했다.
[성녀의 생명력이 약해졌어.]
“미궁을 나온 뒤로는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원인은 나도 몰라. 그동안 신성력을 썼던 영향이 뒤늦게 온 걸지도.]
마음 한구석에 꾸준하게 남아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일.
무너질 자격조차 없어, 알렌드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손톱에 패인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날부터 그의 일과는 혹독하게 흘러갔다.
황제로서의 업무를 보면서도 아리를 구할 방법을 밤낮으로 찾아다녔다.
밥 먹을 시간, 잠잘 시간을 줄일 필요는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 식탁에 앉지 않았고,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눕지 않았으니.
어쩌다 아리와 시간이 맞아 함께 식사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끼니였다.
‘몰골이 왜 저래?’
황제의 서재에 들어온 샤를은 인상을 썼다.
공국에서 작별을 고한 후로 두 달 만이었다.
성녀의 생명력이 약해졌다는 말에 한달음에 젠달까지 왔더니. 곧 죽을 사람은 황제인 모양이었다.
연인과 같은 공간에 있어서인지 차림새는 멀끔했지만, 짙은 눈그늘과 쓰러질 듯한 낯빛은 숨길 수가 없었다.
샤를은 가져온 책을 황제에게 건넸다.
“여기. 초대 성녀의 역사서. 원본인데 빌려주는 거야.”
“……이 빚은 꼭 갚지.”
“됐어. 지난번에 군대 빌려준 값으로 쳐.”
샤를은 손을 내저었다.
저런 상태인 인간한테 빚을 지워봤자, 꿈자리만 뒤숭숭해지지.
“정 갚고 싶으면 성녀를 내 쪽으로 보내는 것도 좋고.”
“…….”
알렌드의 핏발 선 눈이 샤를을 응시했다.
‘집착은 여전하네. 죽어서도 성녀를 놓지 않을 지겨운 인간.’
“보니아의 고대어로 적혔는데, 읽을 수는 있겠어?”
샤를은 소파에 앉으며 약간의 조소를 섞어 말했다.
배우기 어렵기로 악명높은 보니아의 고대어였다.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교수 수준의 전문인이 필요했다.
가령 자신 같은.
“그쪽이 잘 부탁하면 내가 해석을 도와줄 수도-.”
“특이한 복장을 하고 신성한 검은색을 두른 여인이 소환진에 나타났다. ……초대 성녀의 소환부터 시작하는 건가?”
잘 읽네. 재미없게.
김이 샜다. 샤를은 소파 앞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을 뒤적였다.
책상에 앉은 알렌드는 역사서를 넘기며 내용을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두꺼운 역사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책의 중반부로 돌아가 멈췄다.
“두 장이 붙은 부분이 있군.”
“아, 그거. 안 떨어지더라고.”
샤를도 발견했지만 어떤 수를 써도 열리지 않던 장이었다.
찢기지도 않으니 포기하라고 말하려던 그때.
팔랑.
황제의 손끝에서 신성력이 잠시 빛나더니, 붙은 종이가 떨어지며 숨겨졌던 페이지가 드러났다.
“……어떻게 한 거야?”
“…….”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샤를이 물었지만, 알렌드는 말없이 펼쳐진 페이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흥.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는 거지.’
샤를은 개의치 않고 몸을 일으켰다.
펼쳐진 내용이 궁금하니 직접 가서 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직성이 풀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샤를이 가까이 다가가자 알렌드는 탁. 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그쪽만 보라고 가져온 건 아닌데?”
샤를은 입가를 실룩였다.
알렌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게 원본이랬나?”
“맞아.”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이지.
샤를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호이슈에서 불꽃축제를 한대.”
이 시점에서 델칸의 말이 떠오른 건, 저 남자의 손에서 활활 타오르는 역사서 때문인가.
샤를은 신성력에 타 재로 변해버린 국보‘였던 것’을 보고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내용은 다 외웠으니 왕녀가 알고 있던 것과 똑같이 만들어서 보내지.”
저 미친 황제.
방금 본 내용을 알려주기 싫어서 책을 태워?
“그쪽이 나보다 훨씬 더 또라이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