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지, 질투라니!
“그냥 제 친구 본 건데요……!”
얼굴에 열이 홧홧 올랐다.
진짜. 요즘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냐고…….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고.
‘너무 좋아서 큰일이지.’
방금은 주변에 사람들 없었으면 위험했다니까.
오늘도 내 흑심 포인트는 착실히 쌓인다.
우리는 열심히 미소 짓고 손을 흔들며 사람들 몰래 속닥거렸다.
“오늘은 노력 안 하나?”
“무, 무슨 노력이요.”
“내 외모에 익숙해져 본다며.”
“으-. 당분간 보류예요.”
나는 안개 속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고개를 폐하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직도 그날의 폐하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귓가에 아른거린단 말이지.
“더 해줘.”
미쳤어. 진짜.
으으. 운동장 백 바퀴라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불끈거리지만.
‘참아야 한다……!’
그날 기절했던 걸 생각하면 조심해야 했다.
진짜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도. 흑흑.
“그래?”
폐하는 슬쩍 내게 귓속말했다.
“내 몸은 네 것이니 내킬 때 언제든 만져도 돼.”
……지금 이 말이 정녕 우리 폐하 입에서 나온 건가!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누구야. 누가 우리 폐하 몸에 들어가서! 이런, 이런……!
‘기특한 발언을……!’
‘공기처럼 항상 내 귓가에 둥둥 떠다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내 인내심에는 결코 좋지 못한 발언이었다.
왜 자꾸 꼬시고 그러시는 건데요!
나는 손이 부들거릴 정도로 마차 난간을 힘껏 쥐었다.
“……폐하.”
“응.”
“진짜 큰일 나기 싫으면 그만 하세요.”
내 진심 어린 충고를 들은 폐하는 배를 잡고 웃었다.
***(12.28_gd3_토끼)
오랜만에 돌아온 황궁은 여전했다.
프로딘타 궁도 여전하고.
“집에 돌아온 것 같아.”
나는 거실 소파의 팔걸이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역시 익숙한 공간에서 쉬는 게 최고라니까.
“저도요.”
“시아나도?”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시아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시아나가 퇴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
황궁에 도착한 건 어제인데.
“시아나는 집에 안 돌아가 봐도 돼? 프라단 후작님이 걱정하셨을 거 같은데.”
“아버님은 어제 궁에서 뵀으니 괜찮답니다. 그보단 성녀님께서 제가 아는 곳에 계시는 게 더 중요하죠.”
윽. 시아나는 웃는 얼굴로 내 양심을 콕콕 찔렀다.
카디얀이 말하길, 내가 사역마한테 먹히고 선택의 미궁에 들어갔다는 소리에 시아나가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은 채 내 안위만 걱정했다고…….
크흡. 내가 뭐라고.
여기에 내 심장이 멈췄었단 것까지 알게 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폐하와 말을 맞췄다.
“나한테는 시아나 건강도 중요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네. 그래도 당분간은 궁에서 생활하려고요. 손님들도 계시고요.”
나는 시아나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쪽에 깔아놓은 카펫 위에서 아이들이 체스를 두며 놀고 있었다.
노엘, 렉스, 포인이었다.
“야, 그 허접한 인형은 뭐야?”
“성녀님께서 선물해주신 거야.”
“……조금 멋진 거 같다.”
“좋겠다…….”
인형 하니까 또 생각난 건데.
퓨가 어디로 갔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지하에 있을 줄 알았는데 주인님도 모른다고 하고.
‘미궁에 두고 온 건 아닐 텐데.’
다른 생명체가 미궁 내로 들어왔으면 칸이 모를 리가 없다고 했지.
물론 칸의 말이니 거짓말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시아나, 초대 황제는 순 거짓말쟁이야.”
“네?”
“거기까지만 말할게.”
미궁을 나간 자들은 시련과 칸에 대해 발설할 수 없는 제약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선택의 미궁이 지금껏 신비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가?
어쨌든 퓨는 계속 찾아봐야지. 보호자는 나니까.
나는 퓨를 닮은 인형에서 노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성녀님. 제가 잘못했어요…….”
가짜 성녀한테 잡혀있던 노엘은 폐하의 계획대로 무사히 구출됐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었는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노엘이 울 일은 그 뒤로 한 번 더 있었다.
“할아버지를 찾으셨다고요……?”
“응.”
허퍼슨의 몸을 뺏은 데르아치를 찾으려고 저택을 수색하던 중, 지하 감옥에서 랑데트 후작을 발견했다.
다만, 세뇌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신전에 들어가 천천히 신성력을 빼내는 치료를 한다고 들었다.
“헤이즐 로이컨 님께서는 먼저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돌아가신 건가요?”
“응. 결계 때문에 돌아갔다가 노엘 데리러 다시 오신대.”
그때까지 노엘은 황궁에서 머물기로 했다.
거기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렉스와 포인도 황궁에 당분간 머물게 되었다.
“성녀님, 뵙고 싶었어요.”
건강해진 포인의 모습을 보니까 괜히 가슴이 찡해지더라니까.
하여튼.
아이들은 어제오늘, 벌써 세 번째 프로딘타 궁으로 찾아왔는데.
황궁 내에서 내가 제일 한가하다는 소문이 퍼진 게 분명했지…….
나는 다시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
“…….”
테이블 위에 몇 개의 우편물이 보였다.
쇼웬의 편지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우편물의 발신인은 올리비아.
수신인은 리리.
앙뜨완 제과점의 디저트 관련 문의 우편이었다.
헬리도, 나도 전쟁 참여로 연락 두절이 되어서인지, 마지막엔 걱정하는 내용의 우편밖에 없어서.
“한 번 가야 할 거 같긴 한데…….”
나는 집무실에 있을 페하를 떠올렸다.
황궁 밖에 나갔다가 와도…….
“질투 나니까.”
……되겠지?
***
보니아 왕국.
루이드는 숨 막히는 공기에 조용히 침을 삼켰다.
아담한 크기의 방 안에 있는 직사각형의 기다란 나무 테이블.
한 면에는 일곱 명, 그 맞은편에도 일곱 명이 앉았다.
상석은 비어 있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현왕의 왕위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로회의 의장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이미 즉위식을 올린 뒤였다.
이제 와 원로회가 소집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의의를 제시한 이가 현왕보다 짙은 보니아의 피를 가졌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가령,
“…….”
지금 루이드의 맞은편에 앉은, 전사했다 알려졌던 샤를 왕녀라던가.
바로 어제, 왕녀가 돌아왔다.
젠달의 제국군과 보니아의 해군이라는 특이한 조합의 병력을 이끌고.
샤를은 왕궁에 남은 힐리스의 병사들을 제압한 후, 루이드에게 왕위 쟁탈전을 신청했다.
“샤를 왕녀님.”
의장이 샤를을 불렀다.
“네.”
“루이드 국왕께서 왕녀님의 도전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왕녀님께선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좋습니다. 두 분의 뜻이 같으므로 왕위 쟁탈전을 진행하겠습니다.”
의장은 나무함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평평한 돌을 꺼냈다.
샤를과 루이드의 피가 돌에 새겨진 두 개의 홈에 각각 담겼다.
마치 작은 전투장에서 상대를 마주 보고 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시작하겠습니다.”
의장은 작은 나무망치로 돌의 옆면을 살짝 때렸다.
그러자 돌이 진동하며 피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피는 완전한 구의 형상을 띄었다.
“…….”
돌의 진동에 맞춰 피가 진동했다.
짧은 대치 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진 건 루이드의 것이었다.
샤를의 피가 더 짙었다.
‘예상대로군.’
원로들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루이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터진 제 피를 보며 오히려 안심했다.
샤를이 왕궁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오기 하루 전.
루이드는 끔찍한 공간에서 눈을 떴다.
“자네도 아니군.”
낯선 남자, 거대하고 문, 무시무시한 두 개의 석상,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
분명 침대에서 잠들었는데, 왜 제가 이런 곳에서 이런 꼴로.
“형제가 나란히 쓸모가 없어.”
남자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투덜거리더니 저를 두고 사라졌다.
남은 것은 딱딱하고 서늘한 바닥에 주저앉은 자신과, 검을 들고 움직이는 석상.
“아, 아아……!”
루이드는 패닉에 빠졌다.
힐리스의 배신과 아버지의 죽음, 검은 땅으로 물든 보니아 왕국, 무력한 꼭두각시인 자신.
정신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루이드에게 당시의 상황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로 다가왔다.
그런 루이드를 구한 이는 샤를이었다.
샤를은 석상을 피해 분수대까지 나온 후, 망연자실하게 떠는 루이드의 멱살을 잡았다.
“멍청이.”
“샤를……?”
“내놔. 왕좌.”
루이드는 그 말에 안도를 느꼈다.
그래, 자신보다는 샤를이 왕이 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샤를의 모친은 왕비고 제 모친은 후궁이니.
돌아가신 선왕께서도 샤를을 후계자로 지목하시지 않았는가.
“결정이 났군요. 그러면 준비가 되는 대로 샤를 왕녀님의 즉위식을-.”
“잠시.”
샤를이 의장의 말을 막았다.
“쟁탈전을 다시 거행하죠.”
그 말에 원로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피의 싸움은 샤를 왕녀의 승리로 끝났는데, 어째서 다시?
샤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을 가린 휘장을 걷었다.
그러자 그 뒤에 숨어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면 쓴 불청객의 등장에 원로들이 술렁였다.
“……!”
“샤를 왕녀, 지금 사람을 심어둔 겁니까!”
허락받지 않은 이가 참여할 수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
샤를은 열을 내는 원로들에게 말했다.
“저는 이 자와 쟁탈전을 진행할 겁니다.”
딸깍. 하고 가면이 벗겨졌다.
얼굴을 확인한 루이드가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음물을 얼굴에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난도 정도껏 해라. 샤를.”
“어머, 제게 지셨으니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으실 텐데요.”
샤를의 말이 맞긴 했다.
이제 자신은 왕좌에 개입할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자는…….
“델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