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성녀님! 폐하!”
알렌드와 아리는 미궁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출구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이들이 있었다.
헨켈, 시아나, 카디얀, 에드워드, 월터.
황궁에 있어야 할 에본.
그리고 에본 옆에 토끼 인형을 들고 있는 덩치 큰 남자까지.
생각지도 못한 조합과 등장에 알렌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자네들이 어찌 여기에?”
“타고 가셨던 말이 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헨켈이 대답했다.
말을 발견했을 때, 마침 추적계 신성력을 가진 에드워드가 옆에 있었다.
손에 닿는 대상이 왔던 길을 짚을 수 있는 능력.
비록 30분 내의 행적만 추적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길의 끝이 선택의 미궁이라는 걸 알아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헨켈의 설명이 끝나자, 에본도 자신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까닭을 말했다.
“초비 연구소장이 수상한 이에게 단 추적기를 따라왔더니 선택의 미궁 입구였습니다.”
끊어진 황제와의 계약과 수상한 자의 등장.
초비가 달았다는 추적기의 위치는 데르아치 공국을 향하고 있었다.
일의 연관성을 느낀 에본과 초비는 론데이만과 함께 추적기를 따라왔고, 미궁 입구에서 떨어진 추적기를 발견했다.
그러다 비슷한 시각에 도착한 헨켈 일행과 합류해, 미궁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를 황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나.”
“데르아치 성에서 나가신 뒤로 일주일입니다.”
알렌드의 질문에 헨켈이 대답했다.
일주일이라.
미궁 속의 시간은 바깥과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그래도 예상했던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다행이군.
그렇게 생각하는 알렌드의 품속엔 의식을 잃은 아리가 있었다.
에본이 놀라 물었다.
“……성녀님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네. 지쳐 잠든 것뿐이니.”
왜 지쳤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안심한 에본이 알렌드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황실 예배당의 허퍼슨 드만의 몸에 다른 이가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알고 있네.”
“알고 계셨습니까?”
“성녀께서 알고 계시더군.”
알렌드는 미로 정원을 걷던 때를 회상했다.
“허퍼슨한테 데르아치가 들어가 있었어요.”
아리가 굳게 쥔 주먹이 분한 듯 떨렸다.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누구보다 제 사람을 생각하는 이였다.
허퍼슨이 그렇게 된 상황이 분할 만도 했겠지.
“폐하. 허퍼슨의 몸에 들어간 자는…….”
헨켈이 입을 열었다.
허퍼슨의 몸을 차지한 이는 누구인가.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 모인 자들이 삼 일 밤낮을 고민했지만,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해답은 아리에게 있었다.
알렌드는 아리를 대신해 말했다.
“허퍼슨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건 데르아치라 하시더군.”
“데, 데르아치?!”
누군가 빽 하고 지른 소리에 알렌드는 시선을 옮겼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회색 토끼 인형이 머리를 부여잡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 이 미친 자식이! 감히 내 사촌한테!”
“……초비인가.”
“그렇습니다…….”
황제 앞에서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욕을 할 만한 위인은 초비 정도였다.
저러다 제정신이 돌아오면 납작 엎드려 잘못했다 하겠지만.
“왜 인형이……. 아닐세. 나중에 물어보지.”
초비의 상태보다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헨켈, 현재 전장 상황은 어떻게 되나?”
“발견하신 데르아치의 몸으로 적군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황제 군은 슈벨첸 장군의 지휘 하에 포로들과 공장의 변절자들을 감시하는 중입니다.”
헨켈은 주저함 없이 상황을 보고했다.
출구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한 시간 간격으로 찾아오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덕이었다.
“우리에 갇힌 변절자는 몇이나 되지?”
“800 가까이 됩니다.”
“많이도 모았군. 포로 중 전쟁에 직접적인 개입이 없는 자들은 풀어주고, 변절자들은 모조리 영혼석을 파괴하라 하게.”
“네.”
“진영에 들려 다시 명하겠지만. 필요한 인원만 남기고 황도로 올라가는 것으로 하지.”
“귀환하시는군요.”
귀환.
에본의 말에 모인 이들이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알렌드는 잠결에 움찔거리는 아리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를 지어야지. 가는 길에 해결할 것도 있고.”
***
메이브는 보니아 군사 수십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성녀님! 이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메이브는 기사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말을 달리면서 욕을 삼켰다.
‘젠장.’
일주일 전. 힐리스가 사라졌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겪어보니 오히려 좋았다.
성녀의 위치는 힐리스가 사라진다고 해서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좋은데?’
군사들은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였고, 전리품은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왔다.
본래의 떠돌이 해결사로 돌아갈 충분한 기회였지만, 메이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데 내가 왜 떠돌이 시절로 돌아가?’
물론, 성녀 연기를 혼자서 하기란 불가능했다.
“전 이제 하기 싫어요……!”
“협조해. 네 할아버지 안 볼 거야?”
“…….”
그래서 노엘을 협박했다.
랑데트 후작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게 중요한가.
저 꼬마가 저한테 협조한다는 게 중요하지.
운이 좋게도 젠달은 데르아치와의 전쟁으로 병력이 꽤 비어있는 상태였다.
젠달도 영토를 침범한 보니아군에게 군대를 보내 대응했지만, 보니아군이 우세했다.
‘이러다 내가 황제가 되는 거 아니야? 젠달의 황제는 부자라던데.’
전장 속에서 메이브는 신바람이 났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는.
“젠달의 황제다!”
“옆에는……. 성녀님?”
예상치 못했던 진짜 성녀의 등장.
자신이 쓴 가발과 가면이 초라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검은색.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성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성녀의 품에서 엉엉 울고 있는 노엘.
‘뭐야.’
X됐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죄를 고할 수는 없었다.
메이브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 성녀는 가짜입니다! 젠달의 황제가 대역을 세운 거예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유도 없이, 보니아군은 혼란 속에서 전투를 맞이했다.
황제가 지휘하는 제국군과 성녀의 이름에 빌어 메이브가 지휘하는 보니아군의 전투.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성녀님을 지켜라!”
다시 지금.
메이브는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둘러봤다.
‘이것들을 어떻게 따돌리지.’
가발하고 가면을 벗어버리면 가짜 성녀라고 쫓길 일도 없는데.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놈들의 검이 나한테 향할 게 분명하니 그럴 수도 없고.
“가짜 성녀가 여기 있다!”
얼마 가지 않아, 젠달의 기사들이 메이브 일행을 발견했다.
맞붙은 두 세력의 실력이 비등해 승패가 쉽게 나지 않았다.
틈이다.
“성녀님, 이쪽으로……!”
기사 하나가 메이브를 호위하며 그녀를 전장 밖으로 빼냈다.
“누가 성녀님이야?”
푹.
메이브는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던 최면제를 기사에게 찔러 넣었다.
그런 뒤 쓰러진 기사를 뒤로하고 인적 없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가발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숨을 곳을 찾아다녔다.
누군가 메이브를 불렀다.
“성녀.”
“…….”
망할. 어떻게 안 거지.
메이브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렸다.
“뭐야, 힐리스 왕-.”
‘……자님이셨군요.’라는 뒷말은 나오지 못했다.
힐리스의 검을 맞은 메이브가 즉사했다.
눈도 감지 못한 메이브의 보라색 머리칼이 붉은 피로 물들어갔다.
힐리스는 퀭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비틀거리며 골목을 걸었다.
“성녀가 살아있잖아…….”
성녀가 살아있다.
제가 살아남은 데에도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허억, 헉.”
데르아치에게 버림받은 그날.
힐리스를 필사적으로 움직이게 한 건 생존하겠다는 본능이었다.
벌레처럼 석상들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던 중, 우연히 발견한 계단.
힐리스는 세발 짐승처럼 정신없이 계단을 올랐다.
한참을 오르다 막힌 천장을 만나 미친 듯이 두드렸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멎었을 땐, 그는 바닥이 닫히고 차가운 물줄기가 나오기 시작한 분수대 안이었다.
비록 팔 한 짝은 지하의 절벽 아래에 두고 왔지만, 그게 중요한가.
땅이 정화될 수 있다. 자신은 영웅이 될 수 있다. 모두의 선망을 받는 젠달의 황제가…….
힐리스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걸음을 멈췄다.
“황제…….”
“내 자리를 노린다고 들었는데.”
건장한 몸, 수려한 외모.
누구나 우러러보고 고개를 숙일 듯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황제의 위엄.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모습에, 힐리스는 황제의 얼굴을 향해 하나 남은 손을 뻗었다.
하나, 황제의 호위 기사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슴팍에 길고 깊은 자상을 얻은 힐리스가 뒤로 물러났다.
“황좌는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유감이군. 힐리스 왕자.”
전혀 유감이 아니라는 얼굴로 말해봤자.
힐리스는 울컥 입으로 피를 흘렸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몸뚱이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게 내 마지막이군.
“데르아치는…….”
힐리스는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피가 흐르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어둠이다.”
***
“성녀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신성 제국 젠달 만세!”
황도로 돌아온 우리를 맞이한 건 꽃길이었다.
말 그대로 개선식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꽃을 던져 만든 꽃길.
“와. 사람 많네요.”
폐하와 나는 개선행렬 중앙에서 지붕이 없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중이었다.
전쟁의 여파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내가 떠났을 당시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사람도 많고…….
“응?”
나는 성녀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쇼웬이 왜 저기에서 울고 있어?’
선장님 배를 타고 황도를 떠난 게 아니었나?
내 친구가 왜 여기서 저러고 있는지 추리하던 중, 쇼웬과 눈이 마주쳤다.
쇼웬은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주위를 보다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란 걸 자각했는지,
“서, 성녀님이 날 봐주셨어…….”
라고 말한 듯한 입 모양을 했다.
그런 뒤, 활짝 웃으며 옆 사람과 함께 ‘성녀님이 있어 어쩌구’ 같은 슬로건이 적힌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크흡. 쇼웬 아직도 내 덕질하나.
차라리 내가 리리 라는 걸 평생 잘 숨겨서 쇼웬의 꿈과 희망을 지켜주는 게…….
“낫지 않을……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머리에 씌어진 무언가에 내 시야가 가로막혔다.
“폐하? 이게 뭐예요?”
손으로 더듬거리며 만져보니 화관이었다.
“이런. 성녀께 컸던 모양이군요. 제 쪽을 보시면 크기를 고쳐 드리죠.”
폐하의 말에 나는 몸을 돌려 폐하와 마주 봤다.
화관이 슬쩍 올라가고, 다정 버전 미소를 짓고 있는 폐하의 얼굴이 보였다.
윽. 눈부셔. 방심하다가 심장 공격당했다.
아쉽다. 이 세계에 전광판이 있었으면 이 미모를 확대해서 동네방네 자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폐하 눈 안 웃고 있네.’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으신가, 하고 걱정하던 중.
“다른 놈들은 그만 봐.”
폐하는 달콤하고 허스키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질투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