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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16화 (116/150)

116화

“본래 시련은 열 단계라고.”

“이렇게 내 길 안내를 받으며 곧바로 가는 게 얼마나 큰 혜택인지 네놈들은 알아야 할 거다.”

“이놈 대의 황제 선발전도 황당했지. 첫 번째 시련 때 남은 후보생이 이놈밖에 없었으니. 나 원. 그렇게 빨리 황제가 탄생한 적도 없었다니까.”

칸은 지금 상황이 꽤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괜찮아? 델칸?”

“응…….”

나는 뒤쫓아 오는 델칸을 바라봤다.

세뇌에서 깨어난 델칸은 아직 마취가 덜 풀린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부축해줄까?”

“괜찮아.”

잘 따라오긴 하는데, 쓰러질까 불안하단 말이지. 델칸한테 조금 더 붙어서 가야겠다.

나는 폐하의 옆에서 한 발자국 정도 뒤로 떨어졌다.

“원래 힘든 일이지. 세뇌에서 깨어난다는 건 말이야.”

칸은 자신이 아는 세상의 이치를 뽐내듯 말했다.

폐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그런 말을 해봤자, 어른인 척하는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지만…….

“칸이 진작 풀어줬으면 좋았잖아요.”

세뇌를 못 푼다는 칸의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그걸 알았을 땐 배신감에 손이 부들 떨렸지만, 초대 황제라는 칸의 옥체에 손을 댈 순 없으니 참았지.

그래도 다행인 건, 델칸이 세뇌가 걸린 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다.

“리리, 내가 무슨 짓을…….”

사색이 될 정도로 기억이 없는 걸 불안해하길래,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칸은 왜 검은 머리카락이에요? 칸도 저처럼 다른 세계에서 왔다거나?”

“오호. 궁금했느냐? 물어보지 않기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거야…….”

그때는 칸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고. 지금은 폐하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까.

솔직히 우리 폐하가 칸보다는 세지 않을까!

칸은 폐하 뒤로 슬쩍 숨는 날 보더니, 놀리듯 짧게 웃고는 대답했다.

“바깥 시간으로 700년 전이라 했나? 그때의 칸 레이함은 은발이었다. 미궁을 관리할 육체를 만들 때 세이칸 신께 힘을 빌렸는데, 이런 머리 색이 나오더군.”

“머리카락에 검은색이 깃들 정도로 신의 힘을 받았단 겁니까?”

그 말에 묵묵히 걷기만 하던 폐하가 칸에게 물었다.

“폐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응.”

“칸이랑 두 번째 만남이라 그래서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어요.”

“쟤가 그때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을 거 같아?”

칸은 그날이 생각난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쌓인 게 있었는지, 다섯 살의 어린애 말투와 애늙은이 말투를 섞어가며 폐하에게 따졌다.

“기억나지? 현 황제? 위엄있게 등장한 내게 다짜고짜 검으로 공격하던 일 말이야. 초대 황제라 밝혔는데도 날 공격하는 정신 나간 놈은 내가 처음 봤다. 이런 놈에게 젠달을 맡겨도 되는지.”

“……말씀 조심하시죠. 성녀께서 듣고 계시니.”

“연인 앞이라고 체면 챙기기는.”

칸은 콧방귀를 꼈다.

이크. 분위기 험악해지기 전에 주제 바꿔야지.

“그러면 칸은 세이칸 신을 만나본 적이 있는 거예요? 신의 힘을 빌릴 정도면요.”

“그럴 리가. 제사 열심히 올렸더니 ‘뜻이 이루어지리라.’라는 신탁이 나뭇잎 한 장과 함께 내려온 게 전부였지. 그리고…….”

“그리고?”

“미궁이 지어지고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건, 700년 전의 내가 뛰어난 연구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거 아니었겠느냐.”

칸의 자화자찬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젊었을 땐 남녀노소한테 인기가 많았다던가, 두 살 때 읽고 쓰기가 가능했다던가.

으. 칸 원래 이렇게 수다쟁이였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칸의 자랑은, 안개가 자욱이 깔린 커다란 다리 앞에서 멈췄다.

“여기를 지나면 출구다. 이제 이것 좀 풀어.”

폐하가 검으로 덩굴을 자르자, 칸은 자유를 찾은 손으로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저 다리를 건너는 게 마지막 시련이지. 저것만큼은 나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이건 진짜다.”

“마지막 시련?”

“…….”

델칸과 나는 어리둥절해했고, 폐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봤다.

어쨌든.

저기를 나가면 밖이란 말이지?

“칸.”

나는 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나갈래요?”

그러자 칸의 눈이 아까 델칸에게 쫓기던 때처럼 동그래졌다.

이렇게 보면 진짜 다섯 살 같은데 말이지.

“같이 나가자고?”

“네. 여기에 칸 혼자 있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요.”

“……내가 심심하다?”

그렇게 중얼거린 칸은 내민 손이 무안할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 정도로 웃을 필요는 없지 않나……!

연기하면서까지 델칸한테 쫓기려 하고, 숨바꼭질하자고 그러고. 심심한가 보다 생각해서 물어본 건데!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하는 건 네가 처음이다.”

칸은 턱을 쓸었다.

[좋다. 마음을 바꿨어.]

아, 진짜.

두통에 칸을 째려봤지만, 미동 없는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폐하나 델칸의 표정이 평온한 걸 보니, 나한테만 들리는 소리인가?

[이사벨라의 반지를 가진 너만 내보내고 다른 놈들은 영원히 가둘 생각이었지만. 같이 나가게 해주지.]

……또 뒤통수칠 생각 하고 있었어.

무시무시한 소리를 늘어놓은 칸은, 서 있기도 힘들어 바닥에 앉은 델칸의 팔을 잡았다.

“대신 얘는 두고 가.”

“저를……?”

“상관 없-.”

“안 돼요!”

나는 단호하게 외쳤다.

내 친구한테 또 뭘 하려고! 우리 애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좋겠는데……!

“델칸은 못 두고 가요.”

“리리…….”

“……왜 이 자를 데리고 있으려는 겁니까?”

델칸은 감동한 목소리를 냈고, 폐하는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델칸을 변호했다.

“어린놈이 벌써 세뇌에 찌들어선, 뇌가 정상이 아니다. 고쳐서 내보낼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방법이 있어요?”

“내가 괜히 제국을 세운 황제였겠느냐.”

그러고 보니 아까 자랑 중에 황제가 된 후보생 중 몇 명이 칸을 보고 울었다고 했나.

‘역대 황제 중 가장 뛰어난 황제’를 실제로 영접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칸이 정말로 델칸을 도와주면 다행인데…….

“칸, 델칸을 무사히 미궁 밖으로 내보내 준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이 반지에 걸고?”

“의심은. 누가 들으면 내가 속이기만 한 줄 알겠어.”

“그랬는데요.”

순간 칸과 나 사이에 짧은 신경전이 펼쳐졌다.

먼저 두 손을 든 건 칸이었다.

“……알았다. 반지에 걸고 약속하지.”

“델칸은 어떻게 생각해?”

“나는…….”

델칸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칸은 그런 델칸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피의 저주도 해결해주지. 못 참겠지? 지금도?”

피의 저주? 델칸이 뭘 못 참지?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들려버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델칸이 화아악 볼을 붉혔다.

뭔데……?

“……어?”

휙-.

날 끌어안은 폐하가 델칸을 응시했다. 델칸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이, 이건 또 무슨 일이지……!’

폐하의 품에서 정신없는 나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는 폐하와 델칸.

우리는 어색하게 대치했다. 칸이 뜨겁다며 놀려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델칸은 결정을 내렸다.

“난 남을게.”

***

힐리스는 낯선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잔뜩 분개한 청년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렸다.

“왜! 여기까지 왔는데!”

“데르아치……님……?”

“아, 일어났는가.”

데르아치가 고개를 돌렸다.

힐리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여기는…….”

“자네는 생소하겠군. 보니아 왕궁의 지하네.”

왕궁 내에 이런 곳이……?

힐리스는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문. 그리고 움직이는…….

“으아악!”

거대한 석상 두 개가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힐리스는 석상의 반대쪽으로 달리다 급히 주저앉았다.

낭떠러지. 한 걸음만 더 나아갔으면 매서운 바람이 부는 이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

‘부유도……?’

공중에 뜬 땅덩어리라니. 힐리스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 보니아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힐리스의 뒤쪽에서 데르아치의 혼잣말 소리가 가까워졌다.

“자네 피를 묻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단 말이지?”

“그, 그게 무슨…….”

욱씬.

뒤를 돌아보던 힐리스는 그제야 손바닥에 길게 난 자상을 발견했다.

“피가 부족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르아치의 모습이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두려움에 힐리스는 더 갈 곳 없는 몸을 뒤로 뺐다.

데르아치는 그런 힐리스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 석문 앞으로 끌고 갔다.

석상들의 검이 데르아치의 머리 위를 공격했다.

지붕처럼 만들어진 검은 막이 밀도 높은 방패가 되어 공격을 막아냈다.

“신이시여……! 무슨 짓을!”

힐리스는 공포에 질렸다.

데르아치는 검으로 힐리스의 팔을 그었다.

팔이 잘려 나간 고통 속에 힐리스가 비명을 질렀으나, 데르아치에게 아무런 연민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데르아치는 주인을 잃은 팔에서 떨어지는 피로 석문을 적셨다.

하지만 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데르아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쓰레기처럼 던져진 힐리스의 팔이 바닥을 구르다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자네가 아니군.”

“데르아치 님……?”

힐리스는 데르아치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데르아치의 얼굴 위에 덧씌워진 검은 기운.

데르아치와 융합한 어둠의 일부였다.

인간의 영혼과 어둠의 융합.

힐리스가 동경하는 힘이자, 그가 믿는 신의 정체.

검은 기운 뒤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의 소리가 들렸다.

[너는 이제 쓸모가 없어.]

[내 일부를 다시 돌려받아야겠는데.]

그 말에 힐리스는 납작 엎드려 데르아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것만큼은……!”

힐리스의 처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발목을 잡은 손에서 검은 것이 빠져나와 데르아치의 몸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건강하던 힐리스의 볼이 움푹 패고 눈그늘이 짙어졌다.

근육이 빠지고 호흡이 가빠왔다.

잊고 있었던 익숙함에 힐리스는 깨달았다.

이전의 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 된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삶을 원했을 뿐이었다.

제 동생들처럼,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지내는 삶을……!

기억의 시작부터, 힐리스의 삶 대부분은 침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조차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 됐을 때, 유혹이 찾아왔다.

“건강한 몸으로 누구나 우러러보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나?”

그렇게 힘을 얻었다.

힐리스는 감격했다. 제 혈육과 백성의 피는 그가 얻고, 또 얻을 것에 비해 하찮은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데르아치 님 다음으로 높은 곳에 설 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

제가 믿는 그 신이, 온전히 제 편이 아니었음을.

“잘 가게.”

데르아치는 힘이 빠진 힐리스의 손을 가차 없이 제 발목에서 떼어낸 후, 틈 사이로 사라졌다.

절망이 깃든 힐리스의 눈에 그를 노리는 거대한 석상 두 개가 비쳤다.

***

그래서.

델칸은 남겠다고 해서 폐하와 나만 안개 속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맞춤형으로 해줄게.]

[성녀가 정답을 찾으면 이기는 거야.]

칸……. 왜 배웅하면서 히죽 웃나 했지.

이런 꿍꿍이가 있을 줄이야.

“아리. 걱정 있나?”

폐하가 하나.

“성녀는 내 거야.”

……폐하가 둘.

“내 연인한테 무슨 짓이지.”

“…….”

폐하가 셋, 넷.

“다들 꺼져. 네놈들 때문에 아리가 혼란스러워하잖아.”

……다섯.

“으…….”

으아아.

으아아아.

‘으아아. 카아안!’

소리 없는 내 발버둥에 폐하 다섯이 반응했다.

“아리?”

“성녀.”

“괜찮아?”

“…….”

“신아리.”

…….

항복.

나 그냥 이대로 눈 감을래.

여기가 천국인 거 같고 막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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