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반지에 모였던 빛이 흩어졌다.
짧은 일격에 상황이 끝났다.
나는 델칸을 기절시킨 사람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꿈이라면 나는 아주 지독한 꿈을 꾸는 게 분명해.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면 살아갈 자신이 없거든.
“…….”
그래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말이라도 하면 그 꿈에서 깰까 봐.
“……신아리.”
폐하는 울지 않았지만, 울 듯한 표정을 짓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바닥에 꿇어앉은 날 일으켜 세워 품에 안았다.
힘껏. 하지만 내 허리와 머리에 닿은 손은 그 누구보다 상냥했다.
“늦어서 미안해.”
폐하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미안해.”란 말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뜨거운 숨결에 실린 감정이 괴로웠다.
내 뺨과 맞닿은 폐하의 가슴 너머로 심장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나도 폐하에게 매달려 울고 있었다.
“폐하, 정말 폐하예요?”
“맞아. 나야.”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고요! 그러니까 왜 그런 계약을 걸어서……!”
“……미안해. 내가 미안해.”
원망스러움, 안도, 기쁨, 반가움, 미안함…….
내 감정이지만 나조차도 정확히 나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중 제일 컸던 건, 나 때문에 폐하의 심장이 멈췄었다는 원망스러움이었지.
나는 내 최애를 한 번 죽게 만든 폐하의 가슴팍을 때리며-정확히는 때리는 시늉이었다- 서러움을 토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시라고요!”
“그건…….”
“’그건…….’은 또 뭐예요! 나도 그 계약하는 법 알아내서 해버릴까 보다!”
“신아리……! 그건 절대 안 돼.”
“절대가 어디에 있어요. 폐하는……! 살아오겠다고 해놓고……!”
큽. 또 감정 복받쳐서 시야 흐려진다.
훌쩍이며 눈물을 참고 있자니, 폐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왜 또 울어. ……아니야. 울고 싶은 만큼 울어.”
“……됐거든요?”
지금 우는 게 문제인가.
폐하의 고운 손이 내 뺨에 닿는 순간 눈물은 쏙 들어갔단 말이지.
‘으아아……!’
문제는 내 감정이 좀 진정된 지금부터였다.
쿵쾅거리는 심장,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후끈거리는 열기, 눈앞엔 폐하의 얼굴…….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는데, 폐하의 목소리가 달콤한 밧줄처럼 내 몸을 옭아맸다.
“얼굴, 보여줘.”
“네……?”
“……아직 실감이 안 나서.”
“뭐, 뭐가요?”
“네가 내 앞에 있는 게.”
폐하는 그 말을 끝으로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내 뺨을 쓰다듬던 폐하의 손은 어느새 움직임을 멈췄고, 주위엔 적막이 찾아들었다.
내 고막은 미묘한 기류 속에 달라지는 숨소리와 시끄러운 심장 박동 소리로 가득 찼다.
날 보는 폐하의 시선, 느리게 가까워지는 얼굴.
아직 닿지 않은 입술 사이의 공기를 통해 촉감이 전해지는 것만 같은…….
“감동의 재회는 다 끝났어?”
“……으앗!”
나는 화들짝 놀라 폐하의 품에서 벗어났다.
으아아. 맞다. 칸이 있었지……!
하마터면 애한테 몹쓸 짓 하는 거 보여줄 뻔…….
그나저나 방금 분위기 완전 자연스럽지 않았나!
‘내 심장 진정해……!’
칸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한쪽 팔 위에 턱을 괸 채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
그제야 폐하는 처음으로 칸에게 시선을 줬다. 잔뜩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지만.
폐하는 날 자신의 뒤로 숨긴 뒤, 칸을 향해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오랜만? 둘이 알던 사이인가?
하지만 나는 폐하의 말에 칸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볼 수 없었다.
태평양같이 널따란 폐하의 등에 가려 앞 상황이 안 보이기도 했는데.
그보단 나 지금 폐하랑 손깍지…….
‘여자친구 자리 미쳤다…….’
너무 좋아서 숨 쉬는 것도 잊을 뻔.
내가 의식적으로 들숨과 날숨을 챙기는 사이, 폐하는 칸에게 물었다.
“제 연인을 데리고 하신 장난은 재밌으셨습니까?”
“무료하니 어쩔 수 없지. 몇 년 만에 온 손님인데.”
……내가 잘못 들었나?
폐하와 대화하는 상대는 분명 칸일 텐데, 다섯 살 꼬마애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밀려오는 궁금증에 폐하의 팔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 날카로운 붉은 눈을 마주하고 몸을 굳혔다.
외관상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에 몸 좋은 검은색 장발 미남.
아까 칸처럼 양반다리를 한 채 바닥에 앉은 그 사람은, 날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누구……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으니 폐하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이 자는.”
“오호. 내 소개를 해주나.”
“칸 레이함. 젠달의 초대 황제야.”
“초대 황제……?”
“아, 달리기는 즐거웠어. 성녀.”
나는 칸의 말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초대 황제라는 칸의 정체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젠달이 신성 제국이라 선포한 게 대략 700년 전이니까.
“그러면 칸은 700년 넘게 살아있는 거예요?”
내 질문에 폐하가 대답했다.
“살아있다기보단, 그 영혼의 일부가 미궁에 남겨졌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군.”
“맞아.”
폐하의 말에 동의한 칸의 모습이 지지직거리는 화면처럼 움직였다.
그러다 모습이 안정을 찾자, 칸은 다시 다섯 살의 외형으로 돌아왔다.
“내가 바로 칸 레이함의 일부이자 현존하는 칸이지. 그리고 아까 내가 성녀한테 했던 말 중에 설명이 하나 빠졌어.”
“설명?”
“내가 이 미궁의 관리자이자-.”
칸은 씨익 웃으며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설계자라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칸과 우리 사이에 벽이 솟구쳤다.
이어 땅이 요동치고 정원수들이 마르고 자라나길 반복하며 벽을 허물고 새로운 벽을 생성했다.
미로의 구조가 바뀌는 듯했다.
“아리!”
“폐하! 이쪽으로요!”
우리는 정신을 잃은 델칸의 옆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벽이 다 만들어졌을 때쯤, 우리 셋은 한 공간에 있을 수 있었다.
“칸은요?”
“다른 곳으로 사라진 모양이야.”
주변을 경계하는 와중, 다시 또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시련이다.]
으. 두통.
폐하도 같은 소리가 들리는지,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이젠 정체도 다 아는데 그냥 말로 하면 안 되나……!
[이번 시련은 꽤 어려울걸.]
이 상황이 재밌는지, 칸의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미로 속에 숨어 있는 날 찾아봐.]
“칸! 나가는 길 알려준다면서!”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시치미 떼는 게 제법 얄미웠다.
폐하는 검을 꺼내 들고 내게 말했다.
“아리, 내 뒤에 있어. 미로 전체를 날려버리는 편이 낫겠군.”
[아, 말을 안 했네. 이번 시련은 기물파손금지야.]
“…….”
폐하의 눈썹이 들썩였다.
칸이 우리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는 것 같으니, 나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듯 칸에게 말을 걸었다.
“시련을 깨면 혜택이 있어?”
[혜택?]
“여기 시련을 깨고 나가면 황제가 될 수 있다며. 그런데 폐하는 이미 황제고, 나는 황제가 되기 싫고. 델칸은 정신을 잃었는데. 그러면 우리가 시련 받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내 말에 칸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그걸 어떻게 믿어? 지금도 시치미를 떼는데. 그거 말고 소원 3개 들어줘.”
[……수 쓰지 마라. 시련을 받는 게 좋을 텐데?]
칸의 목소리가 머리를 압박했다.
아까보다 세진 통증에 걱정되는 마음으로 폐하를 바라봤는데.
폐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싫은데? 내가 왜?”
[시련을 받아.]
“그럼 소원 다섯 개.”
[시련을 받으라고.]
“대가가 있어야 뭘 하지. 인건비 만만히 보면 안 된다니까. 소원 열 개로 할까?”
[너…….]
폐하가 옆에서 쿡쿡 웃었다.
진짜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하지! 가슴께가 막 간질거리는 게……!
“저게 진짜…….”
아. 들렸다.
다섯 살짜리 어린애 목소리.
“폐하.”
나는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두 번째 시련인지 뭔지. 우리랑 숨바꼭질하자는 거잖아?
“여기 밑에 있어요.”
과거 폐하한테 도망 다니던 시절과 니세포르엘 신전에서의 경험.
숨바꼭질은 내 특기란 말이지!
***
“오셨습니까.”
힐리스는 자신의 막사로 들어오는 이를 반색하며 맞이했다.
평범한 인상의 귀족 청년.
이전에 늙었던 육신은 버리고, 새로운 몸을 차지한 데르아치 대공이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바퀴 의자에 앉아 생활하던 그였는데.
이렇듯 건강한 청년의 몸을 갖고 나타나다니.
몇 번을 봐도 믿기 힘든 기적에 힐리스는 감동했다.
데르아치는 용건을 꺼냈다.
“내가 자네에게 맡긴 것을 찾으러 왔네만.”
“아…….”
힐리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흘렀다.
“델칸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힐리스의 수중에 델칸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델칸이 며칠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서…….”
“…….”
데르아치는 힐리스를 응시했다.
그의 알 수 없는 침묵에 힐리스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델칸이 세뇌에 걸렸다고 해서 방심했다.
제 말만 듣는 인형이었어도 발은 달려있으니 목줄을 채웠어야 했는데.
“면목없습니다. 대신 꼭두각시로 만들 만한 실력 좋은 기사들을 원하시는 만큼 준비해 놓을 테니…….”
“아닐세.”
데르아치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보험으로 두려던 아이였어. 내가 자네를 비난할 이유는 없지.”
“아아.”
감격한 힐리스는 “나의 신이시여.”라 중얼거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데르아치가 그런 힐리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난 자네를 이용해 젠달과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었어.”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켜 자신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그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힐리스의 머릿속에 광활한 세계가 펼쳐졌다.
오디트리아 대륙과 바다 건너 다른 대륙들 위에 군림한 데르아치.
그리고 그 옆에 당당히 선 자신의 모습.
데르아치는 황홀감에 빠져있는 힐리스에게 말을 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 성녀를 빼 올 계획이었거든.”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힐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를 데려와 그녀의 목숨을 제물로 저주받은 땅을 정화하려는 계획.
그리고 죽어버린 성녀의 영광을 이어받아 젠달의 황제가 되어…….
“계획대로 성녀는 죽었네.”
“네……?”
잘못 들은 것인가.
힐리스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가 검은 땅을 늘리면서도, 터전을 잃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굳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땅과, 그 땅으로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은 제가 영웅이 되는 날 모조리 치유될 것이다. 라는 확신.
“성녀가…….”
“죽었네. 아니, 내가 직접 죽였지.”
데르아치는 더듬거리는 힐리스에게 쐐기를 박았다.
성녀를 죽였다니, 그러면 이 땅은……. 무엇으로…….
‘되돌릴 수 없…….’
머릿속이 희게 질린 힐리스는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두 발을 지탱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
데르아치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힐리스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성녀가 죽었으니 전쟁은 내게 의미가 없어졌네. 다음 계획을 진행해야지.”
“다음 계획이라면…….”
“피가 필요해.”
피라니. 누구의 피를.
왜인지 모르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힐리스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나이프에 닿았다 돌아왔다.
“그런데 자네가 델칸을 잃어버린 데다가, 샤를을 죽이지 않았나?”
“데르아치 님……?”
“이제 자네와 루이드가 남았는데, 루이드는 국왕이 되었고. 자네는…….”
데르아치는 뱀처럼 웃었다.
“이제 하는 일이 없군.”
“무슨…….”
그 순간, 데르아치의 몸에서 나온 검은 장막이 힐리스를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막사 안을 둘러보며, 데르아치는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
“조상 대접이 너무 박한 거 아니냐.”
칸은 덩굴로 칭칭 묶여 폐하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조금 전, 나와 폐하의 합동 공격으로 바닥 비밀 공간에 숨어 있던 칸을 잡는 데 성공했지.
“나 때는 말이다, 어른 공경을 이런 식으로 하는 법이 없었-.”
칸은 어린애의 모습으로 훈계를 늘어놓다 말을 멈췄다.
갈림길이었다.
“다음은?”
“……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