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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14화 (114/150)

114화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고?’

나는 뒤를 돌아봤다.

길의 막다른 곳. 대리석 기둥같이 생긴 받침대 세 개.

그 위에는 흉상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는데, 가운데 받침대만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돌 조각들과 델칸의 검이 어수선하게 있는 것을 보아하니, 흉상 하나가 델칸이 날린 검에 맞고 산산이 조각난 모양이었다.

‘저 받침대 뒤에서 소리가 난 거 같은데…….’

저벅.

이크. 이렇게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델칸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델칸! 휴전! 휴전!”

나는 결계를 델칸에게 씌운 뒤, 델칸이 다시 결계를 깨기 전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보인 건, 대리석 받침대 뒤에 숨어 쪼그려 앉은…….

“아야…….”

어린애?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애가 흉상 파편에 맞았는지, 정수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내가 옆으로 온 걸 모를 정도로 아픔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이씨. 저 여자는 왜 세뇌가 안 걸리는 거야.”

“나도 모르는데?”

“네가 모르면 누가……으아, 어어?!”

어린애는 갑작스럽게 끼어든 내 목소리에 대답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가 보면 내가 얘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알겠다.

붉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아이.

흑발이란 게 걸리긴 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네가 세뇌를 걸었어?”

얘가 델칸한테 세뇌를 건 용의자라는 게 중요하지!

조금 전 왜 세뇌가 안 걸리느냐는 혼잣말도 그렇고, 이런 미궁과 안 어울리는 어린애란 점도 그렇고.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크흡. 왜 다들 내 친구 가만히 못 둬서 안달인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애 또 제정신 아니게 됐잖아……!

“있잖아.”

나는 놀라 굳어버린 어린애한테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마음 같아선 빨리 델칸 원래대로 돌려놓는 방법을 내놓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그쳤다간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우선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란 걸 어필하고 어르고 달래야-.

“자, 잘못했어요…….”

“어?”

아이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윽. 귀여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이 와중에도 델칸은 갇힌 결계를 깨려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애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한테는 너를 해칠 의도가 전혀 없다.’라는 의사를 밝히려고 했는데.

“이런 연기에 속냐? 멍청하긴.”

어린애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그대로 내 턱을 자기 정수리로 올려치고 튀었다.

***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정신없이 미로 속을 달렸다.

“갈림길! 왼쪽? 오른쪽?”

“아마도 왼쪽.”

“왼! ……아마도라고?”

나는 급제동을 건 것처럼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섰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내 어깨 위로 빼꼼 내민 얼굴이 있었다.

아까 내 턱을 치고 간, 발칙한 어린애였다.

동글동글한 붉은 눈이 날 빤히 바라봤다.

“왜 멈춰?”

“칸.”

아이의 이름은 칸.

어쩌다 보니 통성명도 하게 됐는데, 친해진 건 아니고 일시적인 협력관계라고나 할까.

계기는 결계를 부수고 나온 델칸이 칸도 적으로 인식해버린 탓이었다.

칸이 세뇌범이라고는 해도 외향은 어린애였다.

짧은 다리로 델칸에게 도망칠 수 있을 리 만무.

결국 바닥에 넘어진 칸은 나한테 도움의 요청을 청했다.

“누나! 저 좀 도와주세요!”

“…….”

다리 다친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듯한 저 모습.

내 양심을 콕콕 찌르는 저 모습……!

하지만 조금 전 사건을 잊기엔 내 턱은 아직 얼얼했다.

‘그래도 이대로 두고 가면 델칸, 어린애 살인범 되는 건 아니야?’

어차피 도와준다는 선택지밖에 없었지만, 찜찜한 기분이 들어 제자리 뛰기를 하며 잠시 고민했는데.

칸은 그런 내 모습과, 가까워지는 델칸의 모습에 애가 탔는지 내게 외쳤다.

“제가 나가는 길 알려줄게요!”

“어? 좋아.”

그렇게 2인 파티를 맺게 됐다 이 말이지.

마침 델칸도 우리 쫓아오고 있겠다, 이대로 출구까지 가면 델칸이랑 나갈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야, 성녀님. 왼쪽이라니까?”

“아마도라고 했잖아.”

내비게이션이 영 시원찮았다.

아마도란 말을 믿고 갔다가 조금 전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막다른 길에서 델칸이랑 딱 마주쳤을 땐 심장 터지는 줄.

주머니 속 신성석으로 벽 뚫고 탈출 안 했으면 벌써 찔렸다.

속이 쓰린 건 그때 도망치면서 신성석 주머니를 바닥에 떨궜다는 거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겠지. 내 소중한 신성석들……. 흑흑.

어쨌든.

나는 업혀있는 칸에게 물었다.

“왼쪽, 확실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크흡. 어린애의 말을 진지하게 믿은 내 잘못인가.

“칸……. 미궁 관리자라며…….”

“으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기억날 것도 같은데. 그럼 떠오를 때까지 숨어 있자.”

“숨어?”

“여기 숨을 만한 곳이 있어.”

칸은 낑낑거리며 내 등에서 내려가 옆의 정원수 벽을 밀었다.

그러자 빈틈없어 보이던 정원수가 문처럼 열리면서 그 안에 정사각형 모양의 공간이 드러났다.

안에 들어가 다시 문을 닫자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델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네.

델칸의 발소리를 찾으며 거리를 가늠하던 중, 부드럽고 말랑한 무언가가 내 손을 건드렸다.

옆을 바라보니 칸이 내 오른손 위에서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뭐, 뭐해?”

“맞네.”

칸이 열심히 푼 것은 반지 장신구 부분을 감싸던 초비의 투명 천이었다.

오랜만에 드러난 화려한 반지의 자태.

칸은 붉은 눈동자로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이사벨라의 반지잖아? 이걸 끼고 있었으니 내 세뇌가 안 먹히지.”

“칸이 이 반지를 알아?”

내가 낀 수호의 반지.

칸이 흘러가듯 말한 것처럼, 반지의 원래 주인은 먼 과거에 실존한 이사벨라 황후님이었다.

하지만 반지의 외형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걸 단번에 보고 안다고?

“알지.”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니, 그보단. 반지 때문에 세뇌가 안 먹혔다고?”

“물리적 보호뿐만 아니라 정신계통의 것도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까. 괜한 걸 만들었잖아.”

“누가?”

“내가.”

…….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그럼 이 꼬마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누나!”

아까 들었던 누나 소리에 갑자기 오한이 드는데.

나는 끽해봐야 다섯 살로 보이는 칸에게 조심히 물었다.

“칸. 아니, 칸 님.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그런데 성녀라면서. 쟤 하나도 못 가둬?”

지금 대놓고 말 돌렸지.

칸의 검은 머리도 그렇고, 어린애치고 또박또박 말하는 것도 그렇고.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여서 더 캐고 싶진 않았다.

비밀을 안 인간을 내보낼 수 없다며 영원히 못 나가게 하면 어떻게 해.

지금 중요한 건 내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델칸을 데리고 미궁을 탈출하는 거니까……!

나는 칸의 화제 전환에 대충 맞장구쳤다.

“가둘 수는 있는데, 누구 덕분에 두통이 심하게 와서 결계 유지를 못 해.”

“아.”

[이거?]

칸은 알겠다는 듯 장난스러운 얼굴로 목소리를 바꿨다.

윽. 골 울려.

살짝 째려보자 칸은 “내가 뭘?”이라고 말하는 듯한 순진무구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이제 안 할 테니까 쟤 가두면 되겠네.”

“……못 해.”

칸의 말에 나는 시선을 떨구며 고백했다.

아까 델칸한테 휴전 선언하면서 결계 사용할 때 느꼈단 말이지.

다음부터는 쿨타임 없이 곧바로 신성력을 사용한다면, 내 몸은 그 자리에서 끝이라고……!

언제 쿨타임이 차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성녀인데 그 정도도 안 돼?”

크흡. 어린애의 모습으로 하는 얘기라 그런지 더 뼈 맞는 기분.

“그러면 칸이 델칸 세뇌 풀어주면 되잖아. 미궁 관리자면 가능하지 않아?”

“……나도 못 해.”

“왜?”

“한 번 시련이 진행되면 아무도 못 막아.”

좀 전에 날 놀리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칸은 웅얼거리며 털어놓았다.

무능력한 2인 파티지만, 내가 어른이니까 뭐라도 해야 했다.

“이제 우리한테 방법은 두 가지야. 칸이 출구까지의 길을 기억해주든, 내가 신성력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좀 더 벌어보ㄷ…….”

콰과과광.

칸에게 남은 방법을 설명하던 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리가 숨은 공간의 반이 날아갔다.

나는 옆을 돌아봤다.

눈앞에 델칸이 서 있었다.

믿을 구석이 없는 칸과 나는 바닥에 앉은 채 서로 부둥켜안았다.

“악.”

“으아아악!!”

……칸 목소리 크네.

어쨌든, 이렇게 죽어버리나……! 그럴 수는 없는데……!

살 궁리를 찾는 내 눈에 반지의 신성석이 들어왔다.

‘……반지도 신성력을 꽤 썼는데.’

사역마에게 먹히기 직전에서 시작해 지하층, 그리고 델칸한테 세뇌가 걸리고 나서부터 아까까지.

보호 결계를 사용한 시간이 꽤 길었다.

보니아 왕국까지 흘러갔던 추억도 있었지만, 그때는 내 신성력으로 버틴 것도 있었던 것 같고.

‘괜찮을까.’

반지에 신성력이 부족해 내 신성력을 끌어와 사용하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델칸한테 죽는 것보단…….’

도망칠 타이밍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칸. 내가 셋까지 세면 뛸 준비해.”

“뭐, 뭘 하려고?”

“도망칠 거야.”

나는 반지를 델칸을 향해 내밀었다.

잘못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나.”

델칸은 인형처럼 검을 움직였다.

“둘.”

반지의 신성석에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칸을 일으키고 후들거리는 무릎을 세웠다.

……폐하 보고 싶어.

“셋.”

귓가에 ‘지잉-.’ 하는 시동음이 들렸다.

“신성력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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