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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13화 (113/150)

113화

몇 시간 전.

“폐하!”

헨켈은 저택 앞에서 쓰러진 알렌드에게 달려갔다.

알렌드의 어깨에서 떨어진 데르아치의 늙은 몸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지만, 헨켈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급히 황제의 손목을 짚었다.

그런 뒤 턱밑을 짚고, 가슴에 귀를 가까이 대보고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의 심장이.’

심장이 뛰지 않는다.

충성계약이 끊긴 느낌이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긴 했으나.

“아. 아아…….”

헨켈은 황제의 주검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무릎을 꿇었다.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뜨겁게 적셨다.

“제국을 바꾸길 원한다?”

“그렇습니다.”

“좋군. 내 사람이 된다면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겠네.”

‘신성력으로 사람이 차별받지 않는 제국을 만들어야 한다.’

진중하게 털어놓던 헨켈의 야망은 듣는 이들에게 이상주의자의 것이라며 비난받기 일쑤였다.

에본마저 이상일 뿐이라며 비관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 말을, 유일하게 들어주고 실현해 주겠다고 말한 이가 황제였다.

“폐하의 검이 되어 평생을 따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맹세한 충성. 하지만 그는 황제를 지키지 못했다.

헨켈은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목숨은 아깝지 않았다. 다만 주군보다 먼저 죽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

퍼런 서슬의 검날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화아아악-.

쓰러진 황제의 몸을 푸른빛이 감쌌다.

“…….”

치료계 신성력.

근원지는 황제의 옷깃, 브로치의 신성석이었다.

헨켈은 잠시 죽는 것을 보류했다.

“폐하, 오늘도 그 브로치를 착용하셨습니까.”

“성녀께서 주신 것인데, 두고 다닐 수가 있나.”

황제가 항상 하고 다니던 브로치에서 퍼져 나오는 신성력.

처음 보는 신성력이지만, 헨켈은 이렇다 할 설명 없이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찬란하고 성스러운 신성력을 갖고 계시는 이가 달리 또 있겠는가.

“신성석에 신성력을 담는 요령을 알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조그만 틈도 없이 꽉꽉 눌러 담는 방법요!”

그 당시에는 성녀에게 신성력이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지 의아했었으나.

제가 어리석었다.

이것은,

“성녀님의 신성력…….”

광휘롭게 빛나는 신성력이 황제의 몸을 감싼 그 장면은 무척이나 신성했다.

헨켈은 우러나오는 경외심에 그 찬란한 신성력을 향해 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은 황제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헨켈 경.”

“……!”

헨켈은 고개를 들었다. 신성력은 어느새 사그라지고, 눈을 뜬 황제가 상체를 일으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잠시 숨이 멈추셨었습니다. 착용하신 브로치에서 성녀님의 신성력이 나와…….”

“성녀의 신성력?”

거기에 자신의 숨이 멈췄었다니.

알렌드는 자신의 입가에 손을 가져가다 멈칫 몸을 굳혔다.

“충성계약이 풀렸군.”

“……그렇습니다.”

“……성녀와의 계약도.”

온몸의 피가 식었다.

생애 맺었던 모든 계약이 풀렸다.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은, 한 번 죽었다.

알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헨켈을 지나쳤다.

“헨켈 경. 그 노인을 데려가게. 겉가죽이더라도 데르아치니, 잡은 걸 보이면 데르아치군이 항복하겠지. 뒤를 맡기네.”

“폐하께선-.”

헨켈이 물었다.

하지만 알렌드에겐 헨켈의 물음을 들을 여유도, 이 이상의 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걸음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힘겨울 만큼 지독한 감정이 그를 옭아맸다.

심장이 멈췄다.

아무런 공격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유일하다시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리의 죽음.

[넌 왜 살아있어?]

[아리 없이 네가 살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자격으로 너만 살아있는 거야?]

알렌드의 내면을 자신에게 던지는 비난조의 물음들이 가득 채웠다.

죄책감보다 가장 큰 것은, 불안감.

세상이 무너진 듯한 절망.

미친 사람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달리는 알렌드의 앞을 말 한 마리가 막았다.

“폐하.”

헨켈이었다.

뒤에서 황제를 여러 번 불렀으나 그가 돌아보지 않은 까닭이었다.

“무례를 범한 죄의 처벌은 돌아오신 후에 받겠습니다.”

말에서 내린 헨켈은 말의 고삐를 알렌드에게 쥐여주었다.

“멀리 가셔야 한다면 이 말을.”

알렌드는 말을 타고 영주의 성 밖으로 달렸다.

도중에 황제를 발견했다며 달려드는 데르아치의 군사들이 있었지만.

하루살이가 치솟는 불길 속으로 제 몸을 던지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었다.

그의 공격 반경에 들어온 자들은 황제의 신성력에 주검도 남기지 못하고 재로 산화했다.

“황제는 상대하지 마라!”

괴물 같은 능력에 경악한 데르아치군이 물러났다.

더는 알렌드를 뒤쫓아 오는 이들이 없었다.

사막 위, 혼자 남은 알렌드는 말을 멈추고 떨리는 검지로 허공에 선을 그었다.

틈 사이는 잠잠했으나, 알렌드는 안을 향해 말했다.

“나와. 당장.”

황제의 흉흉한 기운이 루가 있는 지하층까지 흘러들어 갔다.

알렌드가 신성력으로 다른 이들과 맺은 계약은 모조리 끊겼으나.

영혼으로 맺은 루와의 계약은 풀리지 않았다.

강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계약자의 상태가 오롯이 느껴졌다.

루는 어쩔 수 없이 틈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갸옹.”

“그런 울음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제대로 설명해. 루.”

알렌드는 신성력을 모조리 사용할 기세로 루에게 퍼부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니. 이번에도 고생하겠군.

루는 넘치는 힘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놈이 변절자를 풀고 성녀를 데려갔어.]

알렌드의 이가 아득 갈렸다.

지하층에 아리를 두고 온 것은, 거기가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들어올 수 없는 장소, 그 누구보다 강한 제 사역마의 땅.

제 안일한 믿음 때문에 아리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알렌드에게 남은 건 끝없는 자기 비난뿐이었다.

‘처음부터 잘못됐다.’

보육원이 불탄 그날, 데르아치를 죽이고 저도 죽었어야 했다.

그리했다면 성녀를 잃는 일 또한 없었을 텐데.

짙어지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늪처럼 알렌드를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가라앉던 그의 귓가에 아리의 지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든 좋으니까 돌아만 오세요. 저도 안 죽을 테니까.”

순식간에 늪에 빠진 저를 환히 밝히는 빛. 그 눈부심에 알렌드는 텅 빈 눈을 감았다.

다시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을 땐, 그의 푸른 눈동자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아직 희망을 놓기엔 일렀다.

알렌드는 마른세수를 한 뒤, 옆에서 파닥거리며 나는 루에게 물었다.

“……일전에 했던 것은. 성녀에게 누군가 위협을 가하면 알 수 있다고 했던 것.”

[그게 말인데. 조금 이상해. 내가 변절자 때문에 흥분해서 늦게 알아차린 것도 있긴 한데.]

루는 조금 전 상황을 회상했다.

성녀의 위험을 느끼자마자 달려왔지만, 성녀도, 퓨퓨 거리는 하찮은 인형도 없었다.

루가 본 것은 닫히는 틈으로 나가는 인간의 뒷모습뿐이었다.

[성녀가 위험하다고 느껴야 나한테 알려지는 거거든. 성녀는 왜 바로 위험하다고 생각을 못 했을까? 지하에 인간이 등장했는데.]

성녀가 인간을 보자마자 위험을 감지했더라면, 적어도 자신이 늦게 와 범인을 놓치는 일 따윈 없었을 거였다.

“면식범이라는 건가.”

고삐를 잡은 알렌드의 손이 잘게 떨렸다.

아리가 경계하지 않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저도 알고 있을 터.

대체 누가.

[게다가 틈을 전용 통로로 사용하는 인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어. 뭐지?]

루는 꼬리까지 물음표 모양으로 만들며 궁금증을 호소했다.

이상한 날이라니까. 인간이 셋이나 지하로 들어온 데다가 그 저주받은 생명체까지.

세상이 망할 징조라도 되나.

“…….”

알렌드는 안주머니에서 길잡이의 눈을 꺼냈다.

아리의 반지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 늘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그도 루 못지않게 범인의 정체를 알고 싶었으나.

“우선은 아리를 찾아야 해.”

길잡이의 눈에 맞물린 반지로 알렌드의 신성력이 흘러들어 가자, 펜던트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

그리고 지금.

[있잖아. 계약자.]

루는 선택의 미궁 입구를 올려다보며 알렌드에게 말을 걸었다.

[성녀가 정말로 죽었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때는.”

알렌드의 시선이 닿은 석문 위로 하얀빛의 글자가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문을 건드린 겁 없는 자여

자신이 없다면 발을 들이지 말라

시련을 통과한 자만이 미궁을 나와 영광을 얻을지니

경고문이 완전히 사라지자,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알렌드는 미궁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루에게 대답했다.

“내 영혼을 네게 주지.”

***

“으아아아-!”

나는 달렸다. 전속력으로.

뭣 때문에?

쿵. 쿠웅.

쩌어어억-.

“이번에도 깨졌어!”

델칸은 성난 곰처럼 결계를 깨부수고는 날 향해 달려왔다.

크흡. 폐하 심장 걱정 없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으면 뭐 해.

이번이 세 번째.

변절자도 가두던 내 만능 결계가 델칸한테 먹히질 않는다.

먹히지 않는다기보단 내가 결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를 죽여라.]

[상대를 죽여.]

[……상대를 죽이라니까!]

아까부터 머릿속을 울리는 이 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단 말이지.

반지의 보호 결계도 조금 전에 깨져, 믿을 건 내 두 발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가 엄청나게 큰 미로 정원이라는 걸까.

달리는 속도로는 델칸을 이길 수 없으니 갈림길을 이용해 요리조리 잘 달리면……!

콰과광-.

“…….”

나 델칸이 신성력 쓰는 거 처음 보는데, 완전 무섭네.

방금 공격 한 방으로 벽 몇 겹에 구멍 뚫린 거 실화냐.

델칸과 나 사이에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이 생겼다.

델칸 눈빛을 보아하니 당장 검 들고 달려올 거 같은데.

‘어떻게 해야…….’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상대를 죽-.]

“아, 좀! 조용히 좀!”

생각할 틈도 안 준다.

목소리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주변을 돌아보며 항의하려는데.

옆으로 몸을 튼 내 눈앞으로 검 하나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 검은?’

‘저쪽 신사분께서 보내신 겁니다.’

……라는 소리할 때는 아니고.

“델칸…….”

검 던지고 그런 살기 넘치는 걸음으로 다가오지 말아 줄래……!

곧장 도망칠 생각으로 발을 구르려던 그때.

“끄악.”

“……?”

델칸과 나 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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