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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12화 (112/150)

112화

“……그랬는데도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면?”

나는 다소 얄미운 소리를 하는 델칸을 슬쩍 째려보고,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그러면 먼저 데르아치한테 복수하고, 세이칸 신한테 복수하고. 성녀 때려치우고.”

“그러고?”

마지막에 델칸 목소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올라간 건 기분 탓인가.

기대해도 대단한 건 없는데 말이지. 폐하 없는 세상…….

아니, 울적해지는 건 폐하 관 뚜껑까지 열어보고 난 뒤라 다짐했지.

나는 밀려오는 불안감을 저 아래로 꽉꽉 눌러 넣고 말했다.

“올리비아 씨랑 디저트 사업할래. 평생 혼자 살면서 돈지랄하면서 살아야지. 내가 이번에 좀 깨달았는데. 돈 쓰는 게 스트레스가 풀리더라. 금융치료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더라니까.”

“평생 혼자……?”

“아, 폐하 박물관도 만들까? 기둥 수만큼 폐하 조각상을 쫙 세워놓고! 입구에는 실물 크기로 폐하 등신대를 제작해서 놓는 거지. 그리고 안에는 헤이즐 총장님한테 받은 소장품이랑 내 소장품을 합쳐서……. 듣고 있어? 델칸?”

“응. 리리.”

델칸은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니.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가야지!

그래서 우리는 출구를 찾기 위해 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왔다.

원래는 데르아치가 날 던져 넣었다는 문, 그러니까 아까 봤던 빈틈없이 꽉꽉 닫힌 석문을 열어보려고 델칸과 내가 용을 써 봤지만…….

“꿈쩍도 안 해.”

어림도 없었지.

빠른 포기는 빠른 기회를 잡는 법.

이러다간 몇십 년이고 여기에 갇혀 있겠다 싶어 노선을 변경했지.

“우리 실력이면 그 문에 구멍 정도는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 다른 황제 후보들이 못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나 봐.”

그래도 니세포르엘 신전에 들어갈 정도면 젠달에서 손꼽히는 엘리트들이란 소리인데.

황제로 선택된 사람 말고는 왜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나 했더니.

“문이 거의 최종보스급이네.”

“최종보스급?”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란 뜻이지. 그런데 우리 이렇게 걷다 보면 갇힌 사람들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좋을 텐데. 밖에 나갈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

“전 황제 후보들이 살아있을 거란 소리야?”

델칸의 물음에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날씨 맑네.

“그렇지 않을까? 햇빛도 있고, 먹을 수 있는 식물들도 있고, 마실 것도…….”

나는 하던 말과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유심히 살폈다.

“리리? 왜 그래?”

“델칸, 돌 좀 던져 줄래?”

“어, 어디에?”

델칸은 몸은 움찔거렸다.

아까 관뚜껑 발언 이후로 델칸이 뭔가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과격한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더 오해하기 전에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 하늘에. 작은 크기 돌이어도 괜찮은데, 기왕이면 하늘을 뚫는단 각오로.”

“……알겠어.”

델칸은 바닥에서 조약돌 하나를 뜯어 천장을 향해 휙 하고 던졌다.

별로 힘들이지 않아 보였는데, 돌은 새총으로 날린 것만큼 빠르게 올라갔다.

잠시 뒤. 탁, 하는 소리가 나더니 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막혔어?”

그걸 본 델칸이 놀란 소리를 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델칸, 저건 하늘이 아니라 그림이야. 천장에 그려진.”

무슨 장치를 해놨는지, 구름까지 흘러가게 해놔서 깜박 속았다.

“어떻게 안 거야?”

“같은 구름을 세 번이나 봤어.”

폐하 옆모습을 닮은 구름이 계속 보이더란 말이지. 다른 구름 세 개라고 하기엔 디테일까지 똑같았다.

그래서 시력을 높여 유심히 봤더니 물감을 덧칠한 흔적이 있더라니까.

“하늘로 탈출하는 건 무리겠다.”

어쩐지. 여기 들어온 지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은데도 날이 어두워지지 않더라니.

정 안 되면 플라이보드처럼 신발 밑창에 신성석 달고 탈출하려고 했는데.

“왜 그림을 그려놨을까?”

“날짜 감각을 마비시키려는 용도일 지도 몰라. 혹은 밤낮을 알 수 없게끔 해서 생체 시계를 무너트리려는 의도이거나. 이 공간은 황제 선발을 위한 시험장이니까.”

나는 델칸의 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델칸.”

“응?”

“너 나 피하고 있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지만.

델칸은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아까와 달리, 1m쯤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응.”

“아닌데……?”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하며 웃고 있는 델칸에게 한 발자국 걸어갔다.

델칸이 슬쩍 뒤로 움직였다.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자, 이번에는 델칸이 두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완전 피하는데 지금.

오기가 생겨 그대로 쭉 전진하니, 델칸도 쭉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정원수의 벽에 가로막혀 옴짝달싹을 못 하고 코앞까지 온 나와 마주했다.

“리리. 그, 그만…….”

“역시.”

알겠다.

그 상냥한 델칸이 에본 재상님처럼 날 피한다는 건…….

“나 냄새나?”

그렇지. 쿠카에서 떠나기 전 씻은 게 마지막이었으니 이제 냄새가 날 때가…….

“냄새난다고 말은 못 하겠으니까 그냥 나 피한 거지.”

크흡. 머리카락은 아직 보송하다고 방심했다.

미안, 친구야. 내가 눈치껏 굴었어야 했는데.

“그러면 우리 떨어져서 걷-.”

“아, 안 나. 냄새.”

델칸은 고개를 황급히 저었는데, 어딘가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양 볼과 귀가 빨개지고, 열기 섞인 무거운 숨을 내쉬는 게.

“델칸, 너 어디 아파?”

“성……리리. 나 잠깐 혼자 있고 싶…….”

델칸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내 정수리 냄새가 신경 쓰여서 순순히 길을 내주긴 했는데.

“델칸, 같이 가.”

방심하면 길을 잃는 미궁 속에서, 그것도 저렇게 아픈 애를 혼자 둘 수가 있나.

나는 반대편으로 걸어가 모퉁이를 도는 델칸을 뒤쫓았다.

그리고.

“어, 엇.”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델칸의 등에 발이 꼬여 잠시 몸을 휘청였다.

“왜 여기 멈춰 있…….”

“리리.”

“응?”

“돌아가자.”

델칸은 호흡이 불안정한 몸을 돌렸다.

나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으나, 이미 내 눈은 안쪽에 있는 걸 본 뒤였다.

“……저게 뭐야?”

과학실에서 봤던 모형과 꼭 닮은 저건,

“사람 머리뼈……?”

“리리,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야.”

델칸의 만류에도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원형의 작은 광장.

지금 우리가 걸어온 길을 포함한 네 개의 길이 만나는 광장이었다.

전투가 일어났었던 장소였는지, 군데군데가 파손돼있었다.

그리고 광장 곳곳에 보이는 오랜 시간 방치된 듯한 몇 구의 백골.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언제 일어난 지도 모를 참상 때문이 아니라.

백골들이 입은 낡은 케이프 때문이었다.

“……델칸, 너도 알았어?”

“응.”

델칸은 내 뒤쪽에서 더운 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델칸이 못 보게 한 거야.

내가 만나기를 기대했었으니까.

“니세포르엘 신전의 아이들이 입는 옷과 똑같아.”

“……황제 후보생들의 제복이니까.”

“그러면…….”

이 유골들이 폐하와 같은 대의 후보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도 살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델칸?”

나는 델칸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 몸을 굳혔다.

델칸이 이상했다.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으려 하는 오른손과, 그 손을 막는 왼손.

맞붙은 두 손의 악력이 얼마나 센지, 고개를 숙인 델칸의 몸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와 싸우는 듯한 영문 모를 그 모습에,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왜, 왜 그래?”

“리리……. 도망가.”

“어?”

도망가라니……?

“목소리가 들려……. 널 공격하라고……. 으윽. 내가 널…….”

델칸은 점점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기 힘겨워지는 듯했다.

델칸의 오른손이 왼손을 끌고 조금씩 검 손잡이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망가. 리리. 제발…….”

스릉.

기어코 검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검집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델칸이 들었다던 목소리가 내게도 들려왔다.

[시련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우매한 자여.]

왜 델칸이 고개를 숙였는지 알 듯했다.

머릿속에 직접 말하는 듯한 목소리에 머리가 마구 울렸다.

[소중한 존재를 죽이고 살아남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

“으아아!”

7년 전.

알렌드는 황제 후보생 아홉 명과 함께 선택의 미궁에 들어갔다.

“갸옹.”

루는 나무 위에 숨은 알렌드의 어깨에 앉아 울음소리를 내었다.

시끄러우니 빨리 끝내버리자는 의미였다.

나무 아래에는 다른 후보생 두 명이 신성력으로 상대를 죽일 듯 공격하고 있었다.

‘저 둘도 제정신이 아니군.’

숀과 에핀.

10년 동안 말다툼 한 번 하지 않고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었다.

그런 둘이 지금은 시련에 빠져 저러고들 있으니.

‘한 명이 죽어야 남은 한 명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

알렌드는 벽안이 차가운 빛을 띠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신성력의 공격이 난무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시 뒤, 요란함이 멎었다.

서 있는 이는 알렌드뿐이었다.

“…….”

알렌드는 바닥에 쓰러진 숀과 에핀을 지나쳐 자리를 뜨려다 인기척에 걸음을 멈춰 고개를 돌렸다.

“알렌드.”

니세포르엘 신전에서 알렌드와 같은 숙소를 사용했던 케일라였다.

황제 후보생 중 실력은 알렌드 다음인 2위.

그가 든 장검에서 아직 굳지 않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케일라. 검에 피가 묻었군. 시련을 통과했나?”

“했어.”

“상대는?”

“……리디아…….”

리디아. 케일라의 연인.

시련에 빠진 케일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동공에 비친 것은 제 검에 찔려 죽은 연인의 모습이었다.

가혹한 현실에 케일라는 오열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렌드를 찾아왔다.

케일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알렌드에게 검을 겨눴다.

“알렌드, 날 죽일 거야?”

“아니.”

알렌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미리 소환해둔 루 덕분에 알렌드는 시련에서 깨어났고, 자신의 상대를 기절시켰다.

지금 바닥에 쓰러져있는 숀과 에핀도 마찬가지.

알렌드에게 목덜미를 가격당하고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되는 건 살아남는 한 명뿐이야.”

케일라는 제 발치에 쓰러진 숀과 에핀의 급소를 검으로 찔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알렌드는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케일라에게 소리쳤다.

“케일라! 무슨 짓이야!”

“……살다 보니 네가 당황하는 모습도 다 보네.”

케일라는 알렌드의 앞으로 걸어갔다.

“다른 애들도 내가 다 죽였어. 알렌드.”

“……뭐?”

“리디아가 죽었으니까……. 마지막은 역시 네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케일라는 제 검을 허공에 들어 올리더니, 알렌드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알렌드는 뒤로 물러나 검을 피했으나.

푸욱.

“……컥.”

“케일라……!”

검의 궤적은 케일라의 심장에서 멈췄다.

왜 자결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알렌드의 동공이 약하게 흔들렸다.

케일라는 울컥 피를 쏟는 입을 움직였다.

“알렌드. 나는 황제가 되어선 안 돼. 나는……. 리디아를 앗아간 이 제국을 사랑할 수 없어.”

“제국을 사랑하지 않아서. 내게 황좌를 넘기려고. 그것 때문에 자결을 택했다고? 멍청한 짓이다. 케일라. 나는 애초에 이 제국을 사랑하지 않았어.”

“복수할 거잖아. 그 데르아치라는 영주와 신성력을 우선하는 이 제국에.”

“…….”

“난 그거면 충분해. 그래서 마지막 살아남는 사람이 네가 되길 바랐어.”

“고작 그딴 걸로.”

함께 10년을 지낸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인가.

또다시 자신 때문에 죽는 이들이 생긴 것인가.

알렌드는 아득 이를 갈았다.

황제 후보생들의 피를 머금은 바닥에서 죄책감이 올라와 제 몸을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케일라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알렌드의 손을 붙잡았다.

“황제가……. 돼. 알렌드.”

케일라는 그렇게 말한 뒤 숨을 거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갸옹.”

루는 굳게 닫힌 거대한 석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루의 옆에 선 찬란한 금발의 남자.

“설마 했는데.”

이 안에 아리가.

길잡이의 눈에서 나온 붉은빛이 미궁의 문을 가리켰다.

굳은 얼굴로 미궁을 바라보는 알렌드의 옷깃에서 브로치의 신성석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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