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물속에서 부유하는 이 기분.
‘……설마.’
나는 몽롱함 속에서 전율을 느꼈다.
드디어 내가 폐하의 눈동자에 들어왔나! 그 호수같이 맑고 푸른 눈동자에 빠져서 떠다니는 건가!
크흡. 내가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눈앞에 펼쳐질 찬란하고 광경을 생각하며 눈을 뜨려고 했는데.
‘어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현실감이 안 느껴지기도 하고.
눈동자에 빠졌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는 게.
자각몽인가?
“데르아치라고 하면 알아보려나?”
아아. 떠올랐다.
허퍼슨의 모습을 한 데르아치가 찾아왔었지.
그리고 나는 데르아치한테 당했고.
“성녀는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이 세계의 멸망뿐이야.”
그게 정신이 끊기기 직전 들었던 데르아치의 혼잣말이었다.
세계멸망이라니.
어디 무릎에 고양이 한 마리 올려놓은 악당 대사도 아니고.
완전 위험해.
그것도 허퍼슨의 모습으로 그런 말을.
‘허퍼슨…….’
진짜 허퍼슨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됐다. 설마 나처럼 당한 건 아니겠지.
차라리 진짜 허퍼슨은 따로 있고 내가 정신 조작이 걸린 거면 좋겠는데.
‘어쨌든.’
폐하 눈동자 속도 아닌 곳에서 마냥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게 꿈속이라 가정한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데르아치한테 잡힌 건가?
‘일어나야 해.’
하지만 위기의식으로 다급한 머릿속과 달리, 내 몸은 꿈쩍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수면 아래로 점점 가라앉는 기분까지.
호흡이 안 돼 괴로운 건 없었지만, 이러다가 영영 수면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 때쯤,
“……리! 리리!”
누군가의 절박한 외침이 내 고막을 때렸다.
이어 어딘지 모를 땅바닥에서 눈을 떴을 땐, 눈앞에 델칸이 있었다.
델칸, 오랜만에 보니…….
“여전히 잘생-. 컥.”
“리리!”
상체만 반쯤 일으킨 어정쩡한 자세로, 나는 델칸의 품에 안겼다.
친구야, 오랜만이라서 반갑긴 한데 너무 세게 끌어안은 거 아니니.
힘 좀 풀어달라는 의미로 델칸의 어깨를 두드리려다가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잠시만.’
한 번 당한 게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싸한 느낌이 빠르게 들었다.
델칸이 말을 한다고?
그게 가능한가?
나는 순순히 풀리는 델칸의 팔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나 델칸과 거리를 뒀다.
“델칸.”
얘는 진짜, 조금 전에 말하려다 못했지만,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잘생겼네.
아니, 이게 아니라.
“리리, 괜찮아?”
“너……. 왜 말해?”
“……말하다니?”
“아, 질문이 좀 이상했나. 샤를 왕녀님이 네가…….”
“샤를을 만났어? 샤를은…… 어때?”
델칸의 회색 눈동자에 걱정이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델칸이 날 찔렀어. 내 업보지.”
샤를 왕녀님이 젠달까지 오게 된 경위를 폐하한테 설명할 때 그랬지.
정신 조작을 당한 델칸이 본인을 찔렀다고.
그것도 놀랍지만, 델칸이 샤를 왕녀님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보니아 왕족 유전자 미쳤다.
하여튼 샤를 왕녀님의 안부를 묻는다고 얘가 제정신인 델칸이란 보장은 없지.
데르아치가 이렇게 말하라고 시켰으면 어떻게 해.
나는 추리하는 형사처럼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샤를 왕녀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응.”
델칸은 지난 일을 회상이라도 하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본 사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미가 추가된 것만 같은 이 모습.
<소년에서 남자로> 같은 타이틀을 건 화보도 나쁘지 않을 거 같…….
다니! 제정신은 내가 차려야 되게 생겼는데!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친 뒤, 델칸에게 질문했다.
“데르아치 쪽에서 정신 조작을 걸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제정신으로 돌아왔어?”
“아.”
그 소리에 델칸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이다음에 “이래서 눈치 빠른 성녀는 싫다니까.” 같은 소리를 하면서 날 쏴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안……!”
“샤를이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나한테 정신계 신성석을 사용했어. 아마도 내가 걸린 세뇌를 흔들려는 의도였을 거야. 점차 정신이 돌아오더라. 거기에 노엘이라는 애가 성녀……님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게 세뇌가 풀리는 결정타였지.”
아니네.
하긴 여기서 총 갖고 다니는 사람은 못 봤지.
그렇지만, 델칸의 말을 순순히 믿어도 될까?
대꾸 없이 델칸을 보고 있자, 델칸은 품속에서 무기 대신 하얀색 리본을 꺼냈다.
“노엘이 이걸 보여주면 성녀님이 날 믿어줄 거라던데. 친구의 부탁을 받고 온 거라고.”
“그건…….”
니세포르엘 신전에 처음 간 날.
내가 눈가리개로 썼던 그런 흑역사가 있는 리본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가 노엘에게 네 편이라는 증거 어쩌고 하면서 줬던 리본이란 건 알겠다.
“……그런데 델칸. 여긴 어디야?”
저런 물건까지 보여줬는데 계속 의심하기도 뭣하고.
델칸을 향한 의심은 잠시 접기로 하고,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분명 정신을 잃은 건 주인님이 있는 지하층이었는데.
당장 델칸의 뒤로 보이는 맑은 하늘만 봐도 지하층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선택의 미궁이야. 젠달의 황제 후보생들이 황제가 되기 위해 들어가는 최종 관문이지.”
나는 사방을 둘러봤다.
우리가 있는 곳은 로비만 한 크기의 돌 바닥.
바닥 끝에는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아치형의 뻥 뚫린 입구가 있었다.
그 입구 사이로는 조약돌로 포장한 길이 보였는데, 길의 양옆엔 정원수로 만든 높은 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럼 내 뒤에 있는 건…….”
그리고 어딘가의 성 외벽인가 생각했던 내 등 뒤의 건축물.
자세히 보니 고대 유적지같이 생긴 거대한 석문이었는데, 아주 문 두 개가 빈틈도 없이 꽉 붙어서 닫혀있어 쉽게 열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미궁이라고?
“나갈 방법은 있을까?”
“글쎄……. 미궁 안의 정보는 알려진 게 없어서 방법을 찾기가 쉬울 것 같진 않아.”
“그럼 저 문을 부숴버릴까? 나 신성석 많…….”
나는 가방을 뒤적이던 손을 멈췄다.
“어?”
“왜 그래?”
“아니, 인형이 없어져서.”
퓨가 만져지지 않았다.
분명 데르아치를 만날 때 퓨를 가방 안에 뒀었는데.
‘……알아서 탈출했나?’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가방 밖으로 나갔나? 아니면 지하층에 주인님하고 같이 있을 수도.
어쨌든 미궁에 같이 안 들어와서 다행이긴 한데…….
“그런데 델칸은 어쩌다가 여기 들어왔어?”
“그 사람이 너를 여기 안에 두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 들어왔어. 그랬는데 네가 쓰러져 있고 숨을 안 쉬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뭐……?!”
나는 고개를 들어 델칸을 바라봤다.
델칸은 놀란 날 안심시켜주려는지,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전에 숨이 멎은 사람의 응급조치를 배운 적이 있었거든. 그걸 시행했는데 다시 심장이 뛰더라. 살아나서 다행이야. 리리.”
“아, 아니. 델칸. 다시 말해줘 봐. 내가 숨을 안 쉬고 있었다고?”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델칸을 붙잡고 물었다.
델칸은 달려드는 내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심장이……. 멈춰있었다는 뜻이야……?”
“미안, 내가 더 빨리 왔었어야…….”
“어, 어…….”
나는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올렸다.
오팔처럼 빛나는 내 신성력이 손바닥 위에서 일렁였다.
[계약자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계약이 끊기긴 하지.]
“으. 뭐야. 그건 계약 파기하려는 의미가 없잖아.”
[너희 둘 사이면 계약도 나름대로 좋지 않아? 그 조건이면 성녀가 신성력을 사용할 때마다 몸에서 제약이 느껴질 텐데.]
“그렇긴 한데……. 그게 왜 좋아?”
[연인들이 끼는 반지 같잖아. 인간들은 그렇게 서로 구속하는 걸 좋아하더라.]
아니.
안 느껴져.
신성력을 사용할 때 작게 느껴지던 제약을 느낄 수 없었다.
“더…….”
더, 더 신성력을 사용하면 느껴질지도 몰라.
나는 신성력을 더 끌어올렸다.
쓰일 용도 없이 부풀어 오른 신성력은 풍선처럼 터져 손목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팔을 델칸의 손이 낚아챘다.
“리리! 무슨 짓이야! 신성력을 사용하면 넌……!”
“델칸…….”
델칸의 회색 눈동자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원망스러웠다.
나 때문이야.
“리리……! 왜, 왜 울어?!”
눈물에 안절부절못하는 델칸의 모습이 뿌옇게 번졌다. 그 위로 폐하의 모습이 겹쳤다.
밝게 빛나던 별 하나가 유성이 될 틈도 없이 운석으로 변해 내 눈물샘에 떨어진 게 분명했다.
허망한 빛을 띤 내 눈은 그저 넘치는 눈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폐하.”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델칸에게 중얼거렸다.
“폐하가 죽은 거 같아.”
***
미궁에 갇힌 지 몇 시간 째.
두 사람은 계단과 이어진 미로에 들어와 입구가 보이는 범위 내에서 주변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델칸이 탐색하고 있었다.
“리리. 이쪽으로 가볼까?”
“…….”
델칸은 제가 가자는 대로 가만히 따라오는 아리를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 자신이 이랬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의지도 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성녀를 지켜.”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 샤를은 그렇게 속삭이며 델칸에게 약한 세뇌를 걸었다.
이미 정신 조작이 걸려있는 상대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지만.
성녀를 생각하는 보니아의 피가 짙었던 탓인지, 다행히도 델칸의 정신은 망가지지 않았다.
[성녀를 지켜.]
[내 말을 들어라.]
델칸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세뇌가 대립했다.
대립한 의견은 틈을 만들어냈고, 이따금 그 사이로 델칸의 제정신이 나오곤 했다.
델칸은 혼돈 속에 있었다.
그러던 델칸의의 세뇌를 깨뜨린 결정적 계기는, 노엘이 그에게 한 말이었다.
“성녀님께서 위험하세요!”
노엘은 델칸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죄다 늘어놓았다.
니세포르엘 신전에 성녀와 함께 왔던 허퍼슨이라는 측근이, 힐리스 왕자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분명 같은 편으로 보였다.
그 두 사람이 성녀님께 함정을 파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델칸은 그 길로 보니아군을 떠나 허퍼슨이란 남자를 찾아 미행했다.
‘……선택의 미궁? 왜 이런 곳을 찾아온 거지.’
거대한 미궁 입구.
허퍼슨이란 자는 돌연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옆엔 검은 기운에 축 늘어진 몸을 휘감겨 둥둥 떠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리리!’
남자의 손이 닿은 문이 열리고, 남자가 아리를 미궁 속으로 던졌을 때. 그리고 다시 허공 속으로 사라졌을 때.
델칸은 뒤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선택의 미궁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리리, 식수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줄기를 찾았어. 마실래?”
“…….”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델칸은 줄기를 잘랐다.
아까 눈물을 많이 흘렸으니 이대로 뒀다간 탈수 증상이 일어날 터였다.
델칸은 멍한 얼굴의 아리를 근처 바위에 앉히고 즙을 입에 흘려 넣어줬다.
“…….”
그러다 아리의 입술을 매만지려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델칸은 거리를 두고 인형처럼 앉은 아리를 바라봤다.
‘안 돼. 피가…….’
정체를 아는데도 굳이 ‘리리’ 라 부른 건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녀의 원래 모습이라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성녀와 자신만 존재하는 이 공간.
피가 점점 더 짙어지는 듯했다. 자신의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며 성녀를 원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대로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성녀를 독점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성녀는 네 것이야.]
델칸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리…….”
그러다 조심히 불러 본 그 이름에 심장이 뛰었다.
오로지 저에게만 허락된 시간인 것 같아 델칸은 몇 번이고 아리의 이름을 되뇌었다.
천천히. 소중하고 애틋한 그 부름이 서른 번을 넘겼을 때, 아리가 몸을 일으켰다.
“나갈래.”
공허한 어둠 같던 눈동자에 어느새 반짝이는 생기가 돌아왔다.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델칸은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아리는 이제껏 일어났던 일을 인지하지 못한 듯, 막 정신이 든 사람처럼 제가 결심한 것을 말했다.
“나가서 확인할 거야.”
“뭘?”
“폐하가 정말로 죽었는지.”
“리리, 하지만…….”
“로미오가 제일 잘못한 짓이 뭔지 알아?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독약을 먹은 거야.”
“로미……?”
결연한 얼굴로 말하기는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델칸을 두고 아리는 분개한 얼굴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적어도 의사 진단서 확인하고 줄리엣 삼일장까지는 살아서 버텨봐야지. 그러면 줄리엣이 “나 살아 있었어요.” 했을 텐데.”
“……?”
“그러니까 델칸. 만에 하나 폐하가 죽었다고 해도 나는 나가서 폐하 무덤까지 갈래.”
델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황제의 추모를 위-.
“그리고 관 뚜껑을 뜯어 버릴 거야.”
“뭐, 뭐라고 했…….”
델칸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황제의 무덤을 파내고 관을 뜯는다니.
아무리 아리지만 이건 자신이 피의 방패를 쳐도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델칸이 당황하든 말든, 아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을 굳혔다.
“해피엔딩은 개같이 물고 늘어져야 얻을 수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