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보니아 왕국의 어느 국경 마을.
“꼬마.”
외출 후 돌아온 메이브는 방에 혼자 있는 노엘에게 말을 걸었다.
“그 기사 놈은 어디 갔냐?”
“몰라요.”
“쳇. 호위로 써먹을까 했더니.”
메이브는 갈증이 났는지 잔에 따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노엘이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호위요?”
“점쟁이가 재수 없는 소리를 하잖아. 내가 붉은색을 볼 거라느니. 세상이 저주받은 검은색으로 물들 거라느니.”
“여기에 점술사가 있어요? 내전 피해지역인데.”
노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이들은 힐리스를 사령관으로 한 보니아의 군대와 함께 젠달로 향하는 길이었다.
잠시 머물기 위해 진을 친 이곳은, 내전 중 근방에 생긴 검은 땅 때문에 주민이 모두 떠나 사실상 빈 마을이었다.
이런 곳에 점술사가 있다고?
메이브는 의아해하는 노엘에게 말했다.
“장사가 잘되는데 어딜 가겠어? 그쪽 업종은 이런 위기 상황일 때 더 호황이거든. 앞일이 불안하니까 점쟁이 말에라도 기대보려는 거지.”
제삼자의 이야기처럼 말했지만, 사실 메이브의 심정을 그대로 내뱉은 말이었다.
‘망할.’
젠달과의 전쟁이라니. 그때까지 가짜 성녀 노릇을 하라니.
고갱이 아니라 진상이었잖아.
물려도 단단히 물렸다.
“하여튼 이번엔 헛돈 썼어. 붉은색이니, 검은색이니. 그런 끔찍한 소리를 들으려고 내 금쪽같은 돈을…….”
“검은색은 안 끔찍해요.”
노엘의 말에 메이브는 조소했다.
“그거야 신이 저주를 내릴 의도가 없을 때 이야기고.”
같은 검은색인데 세이칸의 말에 따라 좋고 싫고가 갈라진다니.
그래서 돈이 좋은 거다.
기분에 따라 제 가치를 바꾸진 않거든.
메이브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엘에게 물었다.
“꼬마, 너라도 내 호위할래? 내가 최저임금보다 1.2배 더 쳐줄게.”
“…….”
“그 쓰레기 보는 듯한 눈은 뭐야. 그럼 1.3…… 아니지, 너는 고급인력이니까 1.4배.”
“메이브 씨,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린애 등쳐먹는 건 별로 안 좋은 일이랬어요.”
“갑자기 말 잘하기 있냐? 됐다. 됐어.”
정 없는 비즈니스 동업자한테 무얼 바라냐. 심신의 안정을 위해 방에 들어가서 돈이나 세는 게 낫겠다.
메이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떴다.
“…….”
홀로 남은 노엘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루이드의 즉위식.
노엘은 제 할아버지인 랑데트 후작에 관해 물어보려 힐리스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힐리스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숨어서 목격했다.
“……님. 말씀하신 대로 진행했습니다.”
“수고했네. 힐리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제가 믿는 신은 당신뿐이니.”
저 사람이 왜 힐리스 왕자랑 친하게 지내는 거지?
노엘은 곧장 델칸에게 달려갔다.
그가 정신 조작에 걸린 건 알았지만, 노엘에겐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주위에 없었다.
“아저씨……! 성녀님, 성녀님 좀 도와주세요!”
메이브가 그러지 않았는가. “저 기사 놈은 내가 성녀 짓 할 때만 반응한다니까.”라고.
‘그러니까 성녀님이 위험하다고 하면 아저씨가 도와줄지도 몰라.’
실현 가능성이라곤 콩알만큼도 없는 그 가정이, 노엘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노엘은 델칸에게 제가 본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
자신의 소중한 것까지 건네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델칸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공허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저씨이……!”
그러고 얼마 후.
다시 델칸을 찾았을 땐, 그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까. 성녀님은…….
“성녀님…….”
노엘은 울먹이며 다리를 감싸 안았다.
***
콰과광-.
“성녀님! 황제 폐하께서 위험하십니다!”
내 뒤엔 정신없이 날뛰는 주인님.
그리고 앞엔 사색이 돼서 폐하의 위험을 알리는…….
“폐하가……. 위험하다고요?”
“네.”
“어, 어떻게 된 일인데요? 허퍼슨?”
허퍼슨이 있었다.
순간 허퍼슨이 왜 이곳에 울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예상치 못한 적의 공격에……. 아니, 이렇게 설명할 때가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절 보내셨습니다. 성녀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내게 있어 허퍼슨은 명백한 우리 편이었다.
시아나 다음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허퍼슨의 입에서 폐하가 위험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가요.”
“이쪽으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이런저런 것을 따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허퍼슨을 따랐다.
허퍼슨은 본인이 나왔던 틈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허퍼슨의 한쪽 다리가 틈 밖으로 나간 그때.
“허퍼슨, 다리 다쳤어요?”
남은 다리의 바짓단이 올라가 붕대로 감싼 발목이 드러났다.
붕대는 종아리로 이어지는 듯했다.
“노엘을 데려간 세력에 보니아 왕실 호위 부대가 있더군요.”
헤이즐이 그랬지.
그중에서 자신과 맞붙은 남자의 다리에 큰 상처를 남겼다고.
“신성력을 두른 손으로 낸 상처라 치료계 신성력을 써도 쉽게 낫지는 않을 겁니다.”
왜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왜 허퍼슨을 보며 등줄기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는 건지.
나는 걸음을 멈췄다.
허퍼슨은 자기 발목을 내려다봤다.
“아, 이건……. 얼마 전에 접질려서요. 걱정하실만한 것은 아닙니다.”
“……델칸도 만났다고 하셨죠?”
프로딘타 궁에 허퍼슨이 찾아올 날, 분명히 허퍼슨은 델칸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고 했다.
하지만 샤를 왕녀님이 그랬잖아.
델칸은 정신 조작에 걸려 인형처럼 시키는 일만 한다고.
그런 델칸이 허퍼슨에게 내 친구임을 어필하는 친근함을 보였다고?
허퍼슨은 틈 밖으로 나갔던 다리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랬죠. 잘생긴 분이시더군요.”
“……허퍼슨, 기억나요? 종이꽃 마술 알려주던 날이었나. 저 전쟁터에 나간다고 오해했을 때 필사적으로 말렸잖아요.”
그런데 얼마 전, 휴가를 다녀온 허퍼슨은 내가 전쟁에 참전하기를 바라는 뉘앙스로 내게 물었다.
설마,
……그때도?
“제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허퍼슨은 언제 안절부절못했었냐는 듯한 태연한 얼굴로 시치미 뗐다.
겉모습은 분명 내가 아는 허퍼슨.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이 괴리감은 …….
나는 뒷걸음질쳤다.
“당신, 누구야?”
“글쎄.”
놈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데르아치.”
“……!”
“라고 하면 알아듣기 쉬우려나?”
“루-!”
나는 영토에서 날뛰는 주인님을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색 뱀 같은 것이 내 입을 막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전진해라!”
헨켈의 명령에 신성력을 가진 부대들이 움직였다.
그에 맞춰 데르아치의 군사들도 몰려나왔다.
폭발하는 공장, 사막에서 맞붙은 두 세력의 전투.
“헨켈! 안으로 들어갈 건가!”
슈벨첸이 대검으로 적들을 한 번에 해치우며 헨켈에게 외쳤다.
헨켈은 그런 슈벨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지휘는 이쪽에서 맡지!”
슈벨첸은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헨켈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헨켈은 물살을 가르는 화살처럼 빠르게 적진 안으로 말을 몰았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적을 물리치는 헨켈의 눈은 사방을 훑고 있었다.
‘폐하께선 어디에 계시는가.’
사역마에게 성녀와 황제가 먹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헨켈은 자신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절망에 빠지려던 그때, 그는 희망을 찾았다.
아직 충성계약이 풀리지 않았다.
폐하는 살아계신다.
‘어디에?’
헨켈의 날카로운 촉이 말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황제라면, 이 전장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적의 머리를 치러 갔을 것이라고.
깊숙이, 더 깊숙이.
헨켈은 달렸다.
어느덧 그의 주변에 쫓아오는 적 하나 남아있지 않게 되자, 헨켈의 눈앞엔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다.
내려진 도개교와 문지기도 없이 활짝 열린 성문.
전쟁 중이라 생각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
이곳이다.
헨켈은 곧장 성문을 지났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의 정문과 가까워졌을 때쯤, 찬란한 금발을 가진 이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황제.
멀쩡한 모습으로 걷는 그의 어깨엔 축 늘어진 노인 하나가 짐짝처럼 얹혀있었다.
“폐하! 무사하셨습니까!”
폐하께서 무사하시니 성녀님께서도 무사하실 거다.
정원을 울리는 헨켈의 외침에 벅찬 감정이 묻어나왔다.
알렌드도 헨켈을 알아보고 자신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으나.
“황제 폐하……!!”
그의 몸이 앞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툭.
순간, 헨켈은 황제와 맺은 충성계약이 체내에서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
“연구소장님……. 진정하시는 게…….”
“아오!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
론데이만은 초비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초비의 목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토끼 인형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론데이만은 울고 싶었다.
연구소장이 잠수를 탄 지 일주일째.
연구소 직원들은 신무기의 진행은 어떻게 됐느냐며 물음표 살인마처럼 묻는 귀족들을 버티지 못하고 특단의 조치를 했다.
“부탁한다. 너밖에 없어…….”
“네…….”
지금까지도 연구소장에게 ‘눈에 띄지 말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 기적의 막내, 론데이만을 위층으로 올려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론데이만은 관을 짜는 심정으로 소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문을 열었는데.
오늘도 쓰레기장 같은 연구소 바닥 한가운데에 초비가 엎어져 있었다.
“소장님, 바닥에서 주무시면 입 돌아가요오…….”
“입이 돌아간 게 아니고 그냥 돌아가셨다. 임마.”
“죄, 죄송합니다! 깨어계신 줄도 모르ㄱ…… 으, 으아아아악!”
“아, 시끄럽네.”
론데이만은 놀라 뒷걸음질치다 발이 꼬여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연구소장님 몸 아래에 깔려 낑낑거리는 토끼 인형.
“햇병아리. 가만히 있지 말고 와서 내 몸 좀 치워 봐.”
본인을 초비라 주장하는 인형의 말이 믿기진 않았지만.
저 성질머리가 황궁 내에 둘이나 있을 리는 없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을 이렇게 만들어?”
초비는 없는 이를 아득 갈며 길길이 날뛰었다.
사건이 일어난 건 일주일 전.
허퍼슨이 초비의 연구실로 찾아왔다.
“야, 너 뭔데 내 사촌 몸에 들어가 있냐?”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말하는 꼴이 허퍼슨이 아닌 다른 놈이었다.
대놓고 물어봤더니, “들켰네.”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면서 초비의 숨통을 끊고 튀어버렸다.
“그런데 소장님, 어떻게 움직이시는 겁니까?”
“…….”
론데이만의 질문에 초비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딴청을 부렸다.
“원인을 모르시는 거면 친구분이신 에본 재상님께 의견을 여쭙-.”
“죽을래? 가던 길 멈춰라.”
왜 소장님은 인형이 되어도 무서운 거지.
론데이만은 방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초비 앞에 공손히 돌아왔다.
“……변절자의 영혼석 조각을 가지고 실험을 좀 했어. 내 영혼이 그 조각에 들어간 것 같고.”
“뭐라고요?!”
“아씨. 뭐! 움직이는 조수 인형 하나 만들어 볼까 했지!”
뭐한 놈이 성낸다고.
제 발이 저린 초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론데이만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변절자의 영혼석을 이용한 연구라니. 그건…….
“중범죄 아닙니까……!”
황제나 라울 신관이 당장 연구소장의 목을 치라 하면 론데이만은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연구소장님, 그런 사람인 줄 알긴 했는데…….
‘이런 걸 연구하실 시간에 호신용 무기라도 만들어 두셨으면 당하시진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걸 말로 할 수 있을 리가.
“아, 됐고. 일단 짐 챙겨서 나갈 준비 하자.”
“어, 어디를요?”
“내가 그놈한테 추적기를 달아놨거든. 잡아서 당한 대로 갚아줘야-.”
“초비!”
힉. 초비는 퐁퐁 걷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굳혔다.
소장실로 들어온 에본은 바닥에 쓰러진 초비의 몸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왔다.
“자느라 몰랐던 건가? 일어나 봐! 폐하와의 계약이 끊겼다!”
“……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초비는 미동도 없는데 어디서 초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에본은 초비를 찾아 빠르게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다 제가 왔던 길을 되돌아본 에본의 보라색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너…….”
에본에게 들켰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초비는 황망히 인형인 제 몸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왜, 왜 끊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