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보니아 왕궁.
현왕 이슈팔드 애팅거의 사망으로 새로운 왕의 즉위식이 한창이었다.
“샤를 왕녀께선 전사하셨고, 힐리스 왕자께선 후계권을 포기하셨으니, 여기 계신 루이드 왕자께서 왕위를 계승하시게 되었습니다.”
루이드의 머리에 왕관이 올려졌다.
새로운 국왕 탄생에 “국왕 폐하 만세” 같은 함성이 튀어나올 만도 하건만.
대신들보다는 군사들로 가득 찬 회장은, 형식적인 박수 소리만이 딱딱하게 울려 퍼졌다.
힐리스는 왕좌에 앉은 제 동생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경축 드립니다. 전하.”
“혀, 형님. 저는…….”
루이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힐리스의 군대가 왕궁을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힐리스는 국왕을 살해했고, 루이드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이건 아니다.’
루이드는 좌절했다.
그토록 원했던 왕좌였지만, 이건 그가 꿈꾸던 미래와 거리가 멀었다.
왕좌마저 제 것이 아닌, 꼭두각시 왕의 삶.
힐리스는 겁에 질린 루이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평생을 기억하거라. 네가 앉은 그 자리는 내가 내어준 것이라는걸.”
그런 뒤 단을 내려가 가면을 쓴 성녀의 옆에 자리 잡았다.
빙긋 웃는 그 얼굴에 루이드는 떨리는 턱을 애써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힐리스에게 들은 그 말을, 국왕이 된 제가 앵무새처럼 내뱉을 때가 온 것이다.
“들으라. 현 시간부로 보니아 왕국은 신성 제국 젠달에 전쟁을 선포한다. 이는 보니아와 함께 하시는 성녀님께서 허하신 일이며, 그분의 뜻이다.”
***
“진짜? 어렸을 땐 폐하가 주인님한테 존댓말을 했었어?”
[그랬었다니까. 그땐 내 눈치도 보고. 귀여운 맛이 있었지.]
“으. 나도 보고 싶다. 어린 시절 폐하.”
생각만 해도 귀여워.
나는 왜 그 시절에 소환되지 못했나. 헤이즐도 주인님도 다 본 어린 폐하를 왜 나만 못 봤지, 나만……!
“다시 태어나고 싶어……!”
[……성녀가 다시 태어나도 못 보는 거 아니야?]
나는 주인님의 딴지와 상관없이 좌절했다.
“그만큼 어린 폐하를 못 본 게 안타깝다는 거지…….”
몇 시간 전, 주인님이 만든 출구가 완성됐다.
폐하는 전쟁을 끝내고 오겠다고 출구로 나갔고.
나는 주인님과 퓨와 지하층에 남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이래 봬도 때를 기다리는 거였다.
내 역할은 전쟁이 끝난 뒤, 나가서 폐하의 편을 들어주는 거거든.
성녀의 모습으로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중화제도 사용한 상태고.
폐하가 날 필요로 한다고 주인님한테 말하면 나는 바로 출구로 나가는 거지.
크. 이 정도면 폐하 명예 소방관 시켜주나!
주인님은 내가 준 신성석을 장난감처럼 굴리며 물었다.
[가방 안에 있는 물약은 뭐야?]
“가방 안? 내가 메고 있는 거?”
나는 가방을 열어 안을 살폈다.
신성석 주머니, 금화 주머니, 각종 폐하 굿즈…….
그리고 개당 1골드짜리 내 영양제 물약.
“이거?”
물약을 꺼내 보이자, 주인님은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응. 어디서 구했어?]
“상점가에서 돈 주고 평범하게 샀는데……?”
건강관리를 해볼까 싶어 우연히 들어간 황도 상점가에 있는 약초 가게.
할머니가 하는 가게였는데, “건강에는 이만한 약이 없지.”라며 추천해준 게 이 물약이었다.
“뭐가 이상해?”
내 코로는 못 맡는 냄새를 주인님은 맡을 수 있다던가.
그래도 이거 꽤 비싸게 주고 정기배송 받아서 먹는 건데.
[그래서 성녀가 아직 안 죽었나?]
“…….”
주인님의 혼잣말에 나는 슬쩍 상체를 뒤로 뺐다.
물약이고 뭐고, 방금 입맛 다신 거 난 다 봤다……!
“……설마 주인님, 내 영혼을 노리는 거야? 나는 죽으면 안 되거든. 폐하랑 백년해로하는 게 요새 생긴 내 목표라서.”
[백년해로?]
“폐하랑 내가 천년만년 행복하게 산다는 말이야.”
원래 뜻은 부부가 한평생을 사이좋게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지만.
그, 부……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간 내 심장이 못 버틸 게 분명했지. 그러면 나 기절할지도 몰라.
그러는 사이에 주인님은 내가 한 말을 가지고 열심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년은 좀 긴데……. 그럼 만년 뒤엔 성녀 영혼 내가 먹어도 돼?]
저 귀여운 얼굴로 무슨 그런 위험한 소리를.
“주인님……. 그동안 먹고 싶은 거 어떻게 숨겼어?”
[지하층이라 그래. 여기선 본능이 절제가 잘 안 되거든. 성녀한테 맛있는 냄새가 너무 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주인님은 내 영혼을 잡아먹을 생각만 해도 좋아 죽겠는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아, 맞다.”
나는 할 말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 영혼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차라리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자.
“나 폐하랑 계약한 거 있는데. 그거 파기하는 법 알아?”
[무슨 계약인데?]
나는 폐하와 심장을 공유하고 있는 내 상황을 설명했다.
주인님은 재밌다는 얼굴로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렇게 계약했다면 파기하는 방법은 없어. 굳이 방법을 찾자면…….]
“찾자면?”
[계약자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계약이 끊기긴 하지.]
***
“…….”
알렌드는 앞서 가는 대변인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인기척 하나 없는 삭막한 분위기의 저택.
그 분위기는 알렌드가 대공의 서재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도 여전했다.
“저택엔 대공과 자네 외엔 아무도 없나?”
“대공님께서 요즘 들어 소란스러운 것을 질색하시는 터라. 저 혼자 성의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대변인의 안색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서재에 알렌드를 두고 자리를 비운 뒤, 티 트롤리를 끌고 다시 돌아왔다.
“오는 길이 고단하셨을 텐데,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우연인지, 아니면 미리 알고 있던 것인지.
대변인이 내온 차는 평소 알렌드가 즐겨 마시는 차 종류였다.
온기에 섞여 올라오는 익숙하고 편안한 향이 알렌드의 코를 간질였다.
“대공님께선 안쪽 방에 계십니다. 저는 대공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대변인은 알렌드를 두고 서재 안쪽에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손이 문 손잡이에 닿기 직전, 알렌드가 대변인을 불렀다.
“잠시.”
대변인은 뒤를 돌아봤다.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인데, 황제의 모습은 천재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명화와도 같았다.
황제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 그 속에 든 것을 삼키곤 말했다.
“자네도 같이 한잔하지. 알다시피 대공과 내가 인연이 오래된 터라,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알고 싶군. 자네가 이야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네만.”
“그러겠습니다.”
대변인은 순순히 응했다.
그는 새로이 차를 따라 마셨고, 황제와 대화를 나눴다.
황제가 테이블 위에 빈 찻잔을 내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
황제는 정신을 잃은 듯 소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약이 든 차인 줄도 모르고 받아 드시다니.”
대변인은 히죽거리며 황제에게 걸어갔다.
이날을 위해 오디트리아 대륙에 없는 강한 수면제를 구했다.
귀한 독을 섞어 만든, 색도 없고 향도 없는 수면제를 황제의 차에 탔다.
이 조심성 없는 황제는 그저 차를 마신 것뿐이라 생각했겠지.
“콜록. 콜록.”
대변인의 입에서 한동안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 지긋지긋한 병든 몸도 이젠 보내줄 때가 왔군.
“…….”
젊은 황제의 건강한 몸.
그가 평생을 소원했어도 가질 수 없었던 그 몸이, 제 눈앞에 있었다.
[먹어.]
[먹을 수 있는 거야?]
[먹으면 안 돼.]
[형태를 남겨야지.]
황제와 대변인밖에 없는 공간에 키득거리는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대변인은 그 목소리에 답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먹으면 안 되지. 이제 이 몸은……. 내 것이니.”
대변인은 황제의 얼굴에 대고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 올라온 검은 기운이 황제의 코를 향해 넘실거렸다.
“쿨럭.”
대변인은 기침하며 뒷걸음질했다.
평상시의 기침이 아니었다. 쿨럭이는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대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체를 숙여 몸을 움츠렸다.
그의 시선 끝엔, 저를 또렷이 보고 있는 황제의 벽안이 있었다.
이어 보인 건 제 상체를 꿰뚫은 신성력이 둘려진 황제의 손과,
그 손에 들린 붉은 보석이 박힌 작은 바늘.
“적진에서 받은 걸 함부로 마시진 않지.”
바늘 끝이 붉게 빛나는 것을 본 대변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황제의 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소파 밑 카펫이 젖어있었다.
설마, 지금껏 빈 찻잔을 들고 자신과 차를 마시는 연기를 했던 건가.
“내 신이……. 너를…….”
대변인의 입에서 뭐라 말이 튀어나왔지만 거기까지.
상체에 난 커다란 구멍을 버티지 못한 대변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더는 움직임이 없는 몸에서 작은 물체가 휙 하고 탈출하듯 튀어나왔다.
너무 빨라 눈에도 담을 수 없는 속도였지만, 알렌드는 신성력을 두른 손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끼익!”
“어둠?”
주먹 반만 한 크기의 검은 덩어리.
붙잡힌 어둠은 알렌드의 손을 꽉꽉 깨물었으나, 작은 이빨 구멍 하나 낼 수 없었다.
“같잖군.”
알렌드는 허공을 검지로 갈랐다.
[소환하지 말라니까.]
안쪽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렌드는 아무런 말 없이 틈 사이로 어둠을 던져 넣었다.
꿀꺽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만족스러워하는 사역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틈이 닫히고, 알렌드는 서재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어갔다.
데르아치가 있다던 방의 문.
망설임 없이 문 손잡이를 돌렸다.
안에서 새어 나온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