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루.”
폐하의 말에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뚝 멈췄다.
“루? ……주인님?”
[…….]
그러곤 고개가 숙어졌다.
날카로운 노란 눈이 데굴 굴러가며 우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맹수 같던 눈이 동그래지고 거대한 몸집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했다.
동시에 몸이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친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갸옹.”
“주인님……?”
진짜 주인님이었잖아!
너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지네.
주인님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 날아와 보호 결계가 입혀진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러다 폐하한테 대롱 들어 올려졌지.
“루.”
[…….]
“왜 여기에 있지?”
주인님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폐하의 계속되는 추궁에 날 힐끔 바라봤다.
“나?”
어리둥절한 눈으로 멀뚱히 눈을 마주치자, 주인님은 포기한 듯 휴, 하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평상시의 울음소리 대신에 못마땅한 말투로 툴툴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왜 둘이 여기에 있어?]
***
세계의 지하.
어떻게 탄생했는지도 모르는 그 공간은, 루와 비슷한 생명체들이 사는 곳이었다.
비슷하다기엔 어폐가 있었다.
“끼익!”
[한 입 거리도 안 되는군.]
지능이나, 실력이나.
루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했으니.
말 상대 하나 없는 그곳에서 루는 지루했다.
태어나보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것이 제 발아래에 있었다.
본인의 영토를 세우고 스스로를 ‘칼리드라누’라 이름 지으며 드높였지만, 그것도 썩 재밌진 않았다.
[바깥?]
지능 낮은 놈들은 가끔 만들어지는 틈 사이로 나가 활개를 치고 다녔다.
때론 자신도 밖으로 나가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귀찮았다.
그렇게 한들, 지금 이 세계랑 달라질 게 뭐가 있을까.
“키이익.”
그런 루의 유일한 취미는 미식이었다.
그날은 아주 오랜만에 커다란 어둠을 발견한 날이었다.
그냥 먹어버리기엔 아쉬워서 가지고 놀다가 놓쳐버렸다.
루는 어둠을 뒤쫓아 간 장소에서 밝게 빛나는 틈을 하나 발견했다.
[맛있는 냄새.]
입에 침이 고이며 구미가 당겼다.
바깥으로 나간다는 자각도 하지 못하고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곳에서 한 어린아이가 볼에 눈물 자국을 달고 보석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이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가 루의 후각을 자극했다.
루의 몸은 아이가 있는 방에 가득 찼다.
루는 천장에 뒤통수를 붙이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무서울 게 분명한데, 아이는 도망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맘에 드는군. 루는 히죽 웃었다.
[네가 이 몸을 소환했느냐?]
“……넌 누구야?”
[네 소원을 들어주고 네 영혼을 먹을 존재지.]
“난……. 복수할 힘을 원해.”
[힘? 좋아. 내가 들어줄 수 있지.]
“하지만 영혼은……. 당장 줄 수는 없어.”
[염려 마라. 네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도 내 즐거움이거든. 계약하겠는가?]
“응.”
[계약 성립이다. 난 위대한 칼리드라누. 계약자, 네 이름은 뭐지?]
“……알렌드 레오디우스.”
그게 루와 알렌드의 첫 만남이었다.
[이번에도 맛있는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루는 입맛을 다셨다.
루가 바깥으로 나가면서 힘을 봉인할 때, 신체 능력에도 제한이 걸리는데 그중 하나가 후각이었다.
바깥에서도 맛있는 냄새가 풀풀 나던 성녀와 계약자의 신성력.
그 둘의 신성력이 얽힌 냄새를 지하에서 맡게 되니, 이건 정신이 회까닥 돌고 군침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태어난 지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냄새의 황홀경.
다른 놈들이 채가기 전에 제가 먹겠노라며 부리나케 달려왔더니.
[너희였잖아.]
루는 그렇게 말하며 불만족스러운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못 먹는 것도 억울한데, 성녀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본모습까지 보였다.
성녀 앞에선 귀여운 이미지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망했어.]
인간이 왜 지하층에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루의 말에 알렌드가 답했다.
“변절자가 소환한 사역마에게 먹혔다.”
[네가?]
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을 넓혔다.
잘난 제 계약자가 그런 덜떨어지는 사역마 따위한테 먹힐 리가.
“먹히기 직전 목을 꿰뚫었다. 아마 죽었겠지.”
죽였다니.
그래도 이 칼리드라누 님의 명성에 누를 끼칠 정도는 아니었나 보네.
루는 계약자가 기특해 날개를 파닥였다.
아리가 루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서 주인님을 만나니까 신기하다. 우리는 여기가 사역마의 뱃속이라고 생각했거든.”
[사역마의 뱃속?]
“아니야?”
[맞아. 사실은 나도 먹혔어…….]
루는 꼬리를 추욱 늘어트리며 쪼그려 앉은 아리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헛. 진짜?”
“장난하지 마라. 루.”
성녀의 품에서 어리광 좀 부려보려고 했더니.
다시 알렌드에게 붙잡혀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루는 쳇, 하고 혀를 찬 뒤 말했다.
[여긴 이 세계의 밑바닥이야. 쉽게 말해서 너희가 사는 쪽이 지상이고, 이쪽이 지하지.]
“우리가 주인님이 사는 곳으로 넘어온 거야?”
아리는 깜짝 놀라며 알렌드를 마주 봤다.
“어떻게? 우리는 사역마한테 먹혔는데?”
[죽은 놈이 검은 천 같은 걸 펼치지 않았어?]
“어, 맞아!”
[개중에 그런 놈들이 있어. 자기 입이랑 연결된 주머니를 지하에 따로 보관하는. 놈이 죽었다고 그랬으니까 주머니가 사라지고 너희가 주머니 밖인 여기로 나온 거지.]
루는 장난스럽게 눈매를 좁혔다.
[그렇다곤 해도, 나와서 살아있는 것들은 없었는데.]
“살아있는 게 없다니?”
[지상의 생명체는 이곳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더라고. 죄다 먼지로 변해버렸거든.]
그렇게 말한 루는 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둘은 살아있지?
계약자랑 성녀의 몸에 둘린 저 결계 때문인가?
아니지. 결계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지. 다른 인간들도 저런 건 가능하잖아.
성녀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 그런가? 그렇게 보자면 제 계약자는 이쪽 세계 인간인데.
왜지?
그런 루의 상념을 알렌드가 깨웠다.
“루, 밖으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통로로 나가야지.]
“주인님이 소환될 때 나오는 출구 같은 거? 거기로 나가면 되는 거야?”
[그건 계약자가 밖에서 열어야 하는 데다가 내 전용 통로라 둘은 사용 못 해.]
그 말에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풀어 올랐던 아리의 기대감이 폭삭 가라앉았다.
아리는 낙담 하며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못 나가?”
루는 알렌드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착지한 후, 기지개를 켰다.
[나갈 문 정도는 내가 만들어줄게.]
“가능한가?”
“가능해?”
아리와 알렌드가 동시에 같은 반응을 보였다.
성녀와 계약자가 제게 매달리는 이 상황.
짜릿함에 루는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몸의 대단함을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네.
루는 가슴 털을 부풀리며 우쭐거렸다.
[그럼. 내가 누군지 알고 그래?]
***
[출구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계약자가 필요하니까 성녀는 여기 근처에서 놀고 있어.]
“응.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폐하가 걱정하듯 주인님에게 물었다.
“……위험하지 않나?”
[내 영토에 함부로 들어올 겁 없는 녀석은 없어.]
“루, 절대라는 건 없다.”
[이 성녀밖에 모르는 계약자…….]
주인님은 툴툴거리며 작은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러자 바람을 타고 바닥에서 모래알처럼 작고 검은 결정들이 올라와 내 몸에 붙어 스며들었다.
“주인님, 이게 뭐야?”
[이걸로 성녀에게 다른 놈이 위협을 가하면 바로 알 수 있지.]
그런 뒤 폐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됐지? 가자, 이제.]
그럼에도 폐하는 안심이 되지 않은 듯 미적거리다가, 여기서 안 나갈 거냐는 주인님의 재촉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남은 건 퓨와 나.
“퓨! 퓨우!”
가방에서 나온 퓨는 폴짝거리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퓨, 그렇게 좋아?”
여기가 고향이라더니.
신이 잔뜩 났다.
‘하긴 여기가 태어난 곳이니까.’
나한텐 삭막하기 그지없어도 퓨한테는 아늑한 요람 같을 수도 있겠지.
“너무 멀리 가진 말자.”
“퓨!”
어두운데다 풍경이라 할 게 없어 거리 감각이 애매해지는 곳이었다.
나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신성석을 증간 중간 떨어트렸다.
어둠 속에선 희미한 빛을 내며 발광하는 성질이 있어서, 돌아갈 때는 이걸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퓨는 방방 뛰어다니고, 나는 그런 퓨를 뒤쫓고.
같은 공간에서 그러기를 수십 바퀴.
“지쳤어…….”
크흡. 폐하와 퓨와 나 사이에 체력 순위 꼴등이 나였다니.
이런 원통한 일이.
“퓨우?”
“퓨는 좀 더 놀래? 나는 근처에 좀 앉아 있을게.”
애견 운동장이나 애들 놀이터에 보호자 의자가 왜 있겠어.
지칠 줄 모르는 저 체력을 보호자가 따라가질 못하니까 있는 거겠지. 흑흑.
나는 본능적으로 앉을 곳을 찾았다.
마침 두꺼운 나무뿌리가 땅을 뚫고 의자처럼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난 여기 있을게.”
“퓨!”
퓨는 신나서 폴짝거렸다.
신성석 중에서 작은 걸 골라 머리의 끈에 달아줬더니, 야광 인형이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더 우스꽝스러워졌지만……. 퓨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아마도.
그렇게 애견 카페 보호자가 된 기분으로 놀고 있는 퓨를 구경하던 중.
휘이잉.
어디서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갑자기 웬 바람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와. 엄청나게 커.”
내가 앉은 나무뿌리의 출처로 보이는 거대한 나무 고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둡고 정신이 없어 벽 같은 거로 생각하고 넘겼던 게 다 나무의 몸통이었다니.
“이렇게 큰 나무가 있네.”
나는 감탄했다.
다 말라서 가지는 앙상했고, 덩치 외엔 볼품이 없긴 했지만.
어디서 봤나? 익숙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뭐해?]
귀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주인님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주인님, 이 나무는 얼마나 됐어?”
[이거? 이건 얼마나 됐는지 몰라. 내가 발견했을 때부터 이렇게 있었거든.]
그렇게 말한 뒤, 주인님은 내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가자, 계약자가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대.]
“폐하가? 알겠어.”
나는 몸을 일으켰다.
퓨를 챙기고 폐하에게로 가려는데.
[……ㅓ…….]
뭐지?
“주인님,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무슨 소리가 들린 거 같았는데.
주변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잠잠했다.
[이상한 게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잘못 들었겠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데르아치 대공의 성벽 근처.
허공에 생긴 틈을 가르고 알렌드가 밖으로 나왔다.
본래의 찬란한 금발이 햇빛에 부서졌다.
틈은 점점 작아져 사라졌지만, 그때까지도 밖으로 나온 사람은 알렌드뿐이었다.
“루, 출구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공간을 억지로 갈라서 고정해놓는 거야.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사용하면 깨져버릴걸?]
“그러면…….”
[성녀는 나중에 내보내 줄까?]
알렌드의 의도를 파악한 루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부탁한다.”
[아, 그동안은 소환 안 될 테니까. 주의하라고.]
어느새 알렌드는 데르아치의 성벽을 넘어, 거대한 저택의 굳게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데르아치.’
목소리로 변한 그의 죄책감들이 귓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제야, 만나게 되는가.
알렌드가 문의 잠금장치를 향해 검을 빼 들었을 때였다.
끼익.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누구십니까?”
안에서 나온 건 안색이 어두침침한 남자였다.
보고에 따르면, 몇 해 전부터 데르아치의 곁에 한눈에 보기에도 쇠약한 자가 대변인이라며 붙어 다닌다던데.
그자인가.
“데르아치를 만나러 왔네만.”
알렌드의 범상치 않은 살기, 흉흉하게 빛나는 날 서린 칼날.
결코 호의적인 만남을 위한 모습이 아니었건만, 대변인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콜록거리며 알렌드에게 물었다.
“초대장은 있으십니까?”
초대장.
그 말에 알렌드는 품 안에서 찢기고 구겨져 너덜거리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전에 데르아치의 이름으로 황궁에 날아온 것이었다.
대변인은 걸레짝 같은 그 종이를 받아들고 눈으로 한 번 훑더니 문을 활짝 열었다.
“환영합니다. 알렌드 레오디우스 님. 들어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