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발이 크지! 정신 차리라고!’
안 되겠어.
이대로 가다간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철컹 철컹 소리가 손목에서 나게 생겼다.
나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앞서 가는 말의 꼬리를 바라봤다.
양옆으로 일정하게 흔들거리는 걸 계속 보다 보니 조금씩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거 같기도 하고.
‘고동색 털……. 군밤 생각난다.’
그러면 다음 신메뉴는 밤을 이용해서 만들어볼까.
이따가 헬리한테 가서…….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아, 그게요.”
마침 잘 됐다.
폐하한테 밤 좋아하시냐 물어보려고 했는데.
“왕녀랑 같이 못 타서 아쉬운가?”
“네?”
뜬금없이 왕녀님 이야기라니.
나는 내 말이었던 군밤이(가명)를 타고 있는 왕녀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리리, 같이 탈래요?”
샤를 왕녀님이 같이 말 타자고 제안해 주셨을 땐 꼬시는 줄 알았지 뭐야.
순간 세 명이 사귀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한 걸 보면, 난 역시 글렀다.
“그런데 저보단 폐하가 아쉬우신 거 아니에요?”
“내가 왜 아쉽지?”
“그야, 왕녀님이랑 같이 말을 탈 기회가 날아갔으니까……!”
툭, 하고 폐하가 가볍게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폐하의 탄탄한 가슴팍에 내 뒤통수가 닿았고,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폐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날 똑바로 보고 있었다.
으악. 내 눈.
“오해하는 거 같아서 확실히 말하지. 나는 샤를 왕녀한테 관심이 없어.”
“어……. 그렇지만 샤를 왕녀님은 폐하의…….”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헙. 나는 숨을 들이 삼켰다.
폐하 미쳤나 봐! 지금 사, 사, 사……!!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사랑하는 건 너뿐…….”
“……랑하는 건 너…….”
누가 내 옆에 영화관 스피커라도 가져다 놨나.
반복 재생되는 폐하의 목소리에 고막이 쿵쿵 울렸다.
이런, 이런 말을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으아아. 이거 녹음했어야 했는데!
충격 속에서 어버버 거리다 뒤늦게 볼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는데, 옆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월터였다.
“두 분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 말에 나는 후다닥 폐하의 가슴팍에서 머리를 떼어내고 주변을 살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디얀과 에드워드,
경악하고 있는 볼프만,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샤를 왕녀님.
‘으……아악…….’
다 들었어…….
나 이 파티 탈퇴해도 되나. 해도 될까!
부끄러움에 몸서리가 절로 쳐졌는데, 저 멀리 황제 군의 진영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가 향하는 곳은 초원이 아닌 서쪽의 외진 곳이었다.
마른 흙에 나무와 커다란 바위가 듬성듬성 나 있는.
“데르아치 쪽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곳으로 들어가려는 거죠?”
“그래.”
어제 그렇게 회의하시더니, 하룻밤 만에 침입 루트까지 짜셨다.
대단해, 정말.
‘냄새…….’
악취가 나는 검은 땅 바로 앞에서 우리는 말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작전을 확인하던 중, 볼프만이 내 쪽으로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파티쟝……. 너 능력 있구나? 젠달 황제의 애첩이라니~”
애첩이라니.
제가 노리는 건 정실부인 자리인데요.
하지만 저 잿밥을 노리며 번뜩이는 볼프만의 눈을 보니 그런 얘기까진 할 필요 없을 듯했다.
그냥 얌전히 있어야지.
“그럼, 리리. 살아서 봐요.”
검은 땅을 건너기 전, 샤를 왕녀님은 로브의 후드를 쓰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왕녀님의 좌우에는 마찬가지로 로브를 입은 월터와 볼프만이 있었다.
볼프만은 데리고 갈지 말지 마지막까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함정이 나오면 쓸만할지 모르니까.”
라는 조금은 무서운 샤를 왕녀님의 말에 데리고 가기로 결정이 난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수호 결계를 몸에 두른 샤를 왕녀님 일행은 검은 땅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검은 땅 경계를 넘어 안쪽 땅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우리고 황제군 진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그때.
“끄……어…….”
거대한 바위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내가 가장 먼저 들었고, 그다음이 폐하.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변절자.’
녹아서 무너져 내리는 바위 뒤로 변절자가 서 있었다.
그제야 카디얀과 에드워드도 변절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검을 빼 들었다.
실력자가 셋이나 있고, 변절자는 고작 한 마리.
하지만.
“카디얀 경! 당장 성녀를 모시고 이 자리를 뜨게!”
“아, 알겠습니다!”
폐하는 카디얀에게 날 밀치듯 안기고 검을 뽑아들었다.
허공에 멈춰져 있는 마른 고목 같은 새카만 검지.
갈라진 틈 사이로 변절자의 사역마가 나오고 있었다.
폐하와 에드워드가 변절자를 향해 섰고, 카디얀은 내 손을 붙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기를 가르는 소리, 삐이익- 하는 초음파 소리가 시끄럽게 고막을 때리더니.
“신아리!”
괴상한 모습의 날개가 달린 사역마가 날 향해 커다란 입을 쩌억 벌리며 날아왔다.
“피해요, 카디얀!”
나는 있는 힘껏 카디얀을 밀쳤다.
카디얀이 뒤로 넘어졌고, 사역마의 속도를 따라잡은 폐하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어 폐하의 검이 사역마의 목을 꿰뚫었으나, 커다란 입이 검은 장막을 펼치듯 산개했다.
지잉-.
내 손가락의 반지에서 나온 결계가 폐하와 나를 감싸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검은 장막에 먹혔다.
***
“…….”
눈 깜빡할 사이에 일이 일어나고 끝났다.
샤를은 제가 목격한 것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검은 땅 바깥을 바라보았다.
“대장이…….”
월터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볼프만은 재밌는 것을 봤다는 듯 양 소매를 펄럭이며 제자리 뛰기를 했다.
“이야~! 봤어? 봤냐고오!”
“이게 무슨 일…….”
샤를의 동공이 떨렸다.
황제와 성녀가 사역마에게 먹혀 사라졌다.
황제는 그렇다 쳐도 성녀까지.
“으아아아!”
“죽여버리겠어…….”
바깥의 기사들은 절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사역마는 황제의 검을 맞아 죽었지만, 변절자가 남아있었다.
에드워드와 카디얀은 달려들어 변절자를 난도질해 그 영혼석을 베었다.
그런 뒤, 볼프만을 제외한 네 사람이 좌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쪽들…….”
샤를이 가장 먼저 감정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젠달과 보니아는 동맹관계이기에, 여기에 모인 사람 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건 샤를이었다.
“지금 진영에 황제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누구죠?”
“헨켈 레바르튼. 황실 근위대의 대장이십니다.”
카디얀이 답했다.
성녀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헨켈을 찾으라던 황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우선은 그 사람에게만 지금 일어난 일을 알리세요.”
“하지만, 모두에게 알리고 폐하와 성녀님을 되찾아야……!”
에드워드는 패닉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다급히 소리쳤다.
샤를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는 그러고 싶지 않은 줄 아나요? 하지만 어떻게 되찾죠? 당신들 또한 내전 중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되죠. 모두에게 알리면? 혼란스러워질 그 사태를 감당하고 성녀를 되찾을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있나?”
“…….”
샤를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사역마에게 먹힌 사람을 구해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요. 성녀님과 황제잖아.”
“성녀어?”
황제와 함께 없어진 건 파티쟝인데?
볼프만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다들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샤를도 마찬가지였다.
성녀가 사라졌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피가 끓는 것이었다.
‘되찾아야 해.’
변절자의 짓이니 그 뱀 같은 늙은이라면 알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뱀을 잡아서 물어봐야지.
샤를의 가라앉은 눈이 차분하게 빛났다.
“이쪽은 우선 계획대로 행동하죠. 당신들은……. 그 호위대 대장이라는 사람한테 말해요. 공장이 폭파되면 검은 땅을 건널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투입해 대공의 성을 함락시키라고.”
***
분명 저쪽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사역마의 목구멍이었던 것 같은데.
“소화기관이 특이하게 생겼네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위장이라기보단 삭막한 장소였다.
휑한 길, 돌멩이, 말라 죽은 나무…….
거기에 사물의 식별이 겨우 가능할 정도의 어둠.
“불이 필요하겠군.”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는 폐하에게, 나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불이 왜 필요해요?”
“왜라니.”
“폐하 얼굴이 빛이라 온 사방이 환한데요……!”
“…….”
폐하는 내 진심 어린 말을 무시하고, 허공에 신성력을 피워올렸다.
“신성력 사용이 가능한 장소군. 반지의 결계는 풀어도 될 거 같아. 내가 대신하지.”
“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가 반지의 신성석에 내 신성력이 흘러 들어갈까 봐 염려하는 게 뻔히 보였으니까.
괜한 고집부리다가 폐하 불안하게 하면 안 되지.
반지의 결계를 해제하자, 폐하는 곧바로 보호 결계를 펼쳤다.
“나갈 수는 있을까요?”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런 다음, 우리는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도 출구는커녕, 살아있는 생명체 하나 볼 수 없었다.
“힘들어?”
“아뇨. 문제없는데요.”
“힘들어 보이는데.”
들켰나.
내가 여기 와서 체력이 좋아졌다곤 해도 폐하 체력에는 영 안 되는 모양이었다.
만보계 차고 있었으면 벌써 삼만 보 채웠다.
발바닥이랑 종아리가 후끈후끈한 게, 앉아서 다리 뻗고 싶다.
“뭐 하세요?”
나는 내 앞에 양손을 펼치고 선 폐하를 멀뚱히 바라봤다.
“안아 주려고.”
헙. 지금 저 다정한 눈웃음치면서 안아 준다는 사람이 우리 폐하냐.
내 남친 맞나……!
나는 심호흡하며 폐하에게 두 손바닥을 내보였다.
“……폐하, 잘 생각하세요. 여기서 제 심장 터지면 우리 둘 다 개죽음이거든요. 차원을 넘나든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 그런 낭만도 뭐도 없다고요.”
폐하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등을 내보였다.
……태평양 어깨라는 게 이런 건가.
눈앞이 아찔해진다.
“업히는 것도 안 될 거 같아?”
“절대 안 돼요.”
업히는 순간 사역마 위장에서 세이칸 눈앞까지 직행이라니까.
그날로 저승이란 소리다.
“……그럼 쉴 곳을 좀 찾아볼까.”
폐하의 말에 나는 반색했다.
내가 또 시력 하나는 좋으니…….
“그런데 폐하, 아까보다 어두워진 거 같지 않아요?”
“확실히.”
환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주변이 보였는데.
지금은 폐하의 불에 비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지.
우리는 고개를 슬쩍 위로 올렸다.
“…….”
폐하의 키 다섯 배의 높이에 거대한 검은 짐승의 아래턱이 보였다.
꿀꺽, 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턱이 움직이자, 짐승의 목소리가 그르릉거리는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이 칼리드라누의 영토에 겁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