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서, ……리리 님?!”
가만히 서 있던 내가 몸을 갑자기 움직이자, 카디얀과 에드워드가 깜짝 놀라 날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지.
‘설마!’
폐하가 외진 마을에 혼자서 온 이유가 있다면!
헨켈 대장도 따돌리고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면!
‘밀회라든가, 밀회 같은……!’
머릿속에 그런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급기야는 이전에 허퍼슨한테 들었던 말까지 떠올랐다.
“그물이에요.”
그건 안 되지!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내가 그물에 잡혀 허덕여도 좋다고 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폐하랑 엮이다 못해 심장까지 얽히고설킨 이 상황에, 다른 사람한테 폐하를 양보할쏘냐!
‘뭐가 됐든 현장을 덮쳐야……!’
그리곤 3층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남자애였다.
똑 부러져 보이는 그 애는 갑작스러운 침입자(나)의 등장에 표정을 굳히고 손에 신성력을 흘렸다.
“월터!”
그걸 곧바로 막은 게 폐하.
은발 흩날리는 거 미쳤어…….
설원의 정령 같은 그 외모에 넋 놓을 뻔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폐하와 저 남자애 말고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가리려 로브에 달린 후드를 쓰는 여자.
그것도 무려.
“둘……?”
둘 중 누구지. 아니, 둘 다인가.
우리 폐하 외모에 한 사람만 반했을 리는 없는데.
내 동공이 떨렸다.
***
“이봐. 꼬맹이들, 오늘 작업은 다 끝내고 놀고 있는 거냐? 농땡이부리지 마라.”
데르아치 공국의 공장.
공장장 파크는 복도에서 나무 팽이를 가지고 노는 포인과 렉스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신성석 박아넣는 거 다 했어요!”
렉스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씩씩하게 답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파크의 입에서 “그러면 숙소로 빨리 들어가지 않고 뭐 하느냐.”란 소리가 나왔을 텐데.
파크는 불호령 대신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얼마 전, 이 아이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일이 있던 탓이었다.
“이, 이걸 주웠단 말이냐?”
침입자가 훔쳐 간 도면.
며칠째 찾지를 못해 신변을 정리하며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공장의 꼬맹이 둘이 도면을 주웠다며 파크한테 가져왔다.
“……펼쳐봤냐?”
“아니요.”
그 대답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중요한 부분은 암호로 적혀있으니 봐도 모르겠지.
무엇보다 파크는 매 순간 언제 죽게 될까 불안에 떠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면을 발견한 위치도 모래늪 함정 근처라 하니, 침입자는 함정에 빠져 죽은 듯하고.
마침 데르아치는 변절자 우리의 대량생산 때문에 침입자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으니.
‘조용히 지나가자.’
파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만히 도면을 금고 안에 되돌려놨다.
그러곤 포인과 렉스에게는 괜히 약점을 잡힌 기분이 들어 다른 애들 대하듯 할 수가 없었다.
이 어린놈들이 뭘 알겠느냐만.
“그럼 적당히들 놀고 들어가라. 농땡이 피울 생각은 하지들 말고. 별 볼 일 없는 신성력을 가진 너희가 일할 곳이 여기밖에 더 있겠냐. 열심히 해야지.”
“네! 그럴게요! 공장장님!”
파크는 손을 휘휘 저으며 가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우렁차게 대답한 렉스는 그가 보이지 않자, 생글거리던 표정을 싹 굳히고 투덜거렸다.
“별것도 아닌 게 맨날 거들먹거린단 말이야.”
“렉스.”
“응. 포인.”
렉스는 벽을 유심히 살피던 포인의 부름에 쪼르르 그 옆으로 다가갔다.
“찾은 거 같아. 주변에 누구 있는지 좀 확인해줄래?”
“알겠어.”
렉스는 나무 팽이의 막대 중앙부를 꺾었다.
그런 뒤 팽이를 돌리자, 막대 속에 숨겨졌던 신성석에서 옅은 붉은빛이 나와 주변을 구석구석 탐지했다.
아무런 경고음이 들리지 않자, 렉스는 팽이를 집어 들었다.
“아무도 없어.”
포인은 미리 챙겨온 포크로 벽에 난 홈을 긁었다.
그러자 복도의 붉은 커튼 뒤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렉스, 저쪽으로 가보자.”
포인과 렉스는 소리가 난 곳의 커튼을 걷어 젖혔다.
타일 하나가 옆으로 밀려났고, 그 자리에 성인 키 절반만 한 높이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렉스가 감탄했다.
“와. 포인. 네가 맞았네.”
도면에 있는 비밀통로 위치의 암호를 풀었다던 포인의 말이 사실이었다니.
아이들의 시선이 컴컴한 통로에 닿았다.
“포인, 여기로 들어가면…….”
“응. 데르아치 대공의 저택으로 갈 수 있어.”
렉스의 레몬색 눈과 포인의 갈색 눈이 호전적으로 빛났다.
“우리가 잡자. 데르아치.”
“응.”
“대장이 좋아할 거야.”
“성녀님도?”
“당연하지.”
히죽거리는 아이들의 손끝에 노란빛의 신성력이 스멀 피어올랐다.
***
사람 인생 모른다더니.
나는 방의 입구에서 문고리를 붙든 채로 굳어버렸다.
“어머나, 리리.”
“파티쟈앙?”
이런 곳에서 샤를 왕녀님과 볼프만을 만날 줄이야.
둘 중 누가 폐하랑 이런저런 사이인지 따질 때가 아니었다.
현장 검거하려다가 내가 검거되게 생겼거든.
‘으아아. 잊고 있었던 과거가……!’
첩자로 의심받고 갇혀있던 상태에서 탈출, 그 과정에서 기물파손.
당장 잡아가겠다고 할까 봐 샤를 왕녀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다.
볼프만한텐 잡힐 걱정은 없지만, 내가 뒤통수를 때리고 해군에 넘긴 전적이 있었으니까.
‘이대로 문 닫고 튈까.’
나는 불편한 재회에 잠시 고민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급히 내 앞으로 온 폐하가 묘하게 샤를 왕녀님을 내 시야에서 가리고 있단 말이지.
마치 내가 왕녀님과 마주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역시 지난 사랑을 못 잊고…….’
크흡.
폐하가 전에 왕녀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단 걸 간과해선 안 됐었는데.
“혼자 온 건 아니지? 위험한 일은 없었나?”
걱정스럽게 묻는 폐하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심장에 무척이나 해로운 저 미모…….
오늘따라 청아하고 잘생기고 화려하고 눈부시고 다 하는 저 미모!
‘내가 왕녀님이었으면 보니아로 가다가 젠달로 배 돌렸다.’
그러니까 왕녀님도 폐하를 거절해놓고 머릿속에 폐하 얼굴이 한 번쯤 아른거렸을지도!
한 번쯤이 뭐냐.
매시간 매분 생각하다 상사병 걸리게 생겼는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지.
일 년 365일 8,760시간 525,600분 31,536,000초마다 더 잘생겨지는 거 같은데.
이런 속도로 잘생겨지면 괜찮나. 이 세계가 폐하 미모 감당할 수 있나.
‘그런 미모가 둘…….’
순간 한 프레임에 들어온 폐하와 왕녀님의 미모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나 지금 분한 것보단 행복한 거 같은데…….
이렇게 외모합 장난 없는 조합을 어디서 볼 수 있겠냐고.
‘나는 글러 먹었다. 폐하 여자친구로 글러 먹었어……!’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코가 간지러워 코를 훌쩍였는데.
“……우는 건가? 설마, 또 이상한 상상을-.”
폐하가 중요한 뭔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다급히 내 어깨를 붙들었다.
“어라, 저 기사들은 누구야~?”
하지만 폐하의 뒷말은 볼프만의 말에 묻혔다.
계단참에서 어중간하게 서 있던 카디얀과 에드워드가 방까지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걸 볼프만이 제일 먼저 목격한 모양이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당신들은 누구지.”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흉흉한 시선은 볼프만이 아닌…….
‘으악. 에드워드, 지금 폐하가 내 어깨 잡았다고 그러는 거예요?!’
폐하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걸 보아하니, 이번에도 그 정신 조작 신성력을 사용하셨나.
하여튼 이대로 가다간 나중에 에드워드가 후회할 확률이 백 퍼센트였다.
‘폐하인 걸 밝혀야 하나? 아니, 폐하가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
다행히 지원사격이 들어왔다.
카디얀이 에드워드의 팔을 잡아끌며 적개심을 내려놓으라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에드워드. 잘 봐. 안쪽에 계신 분은 보니아 왕국의 왕녀님이시지 않는가. 주변은 일행분들이신 거 같은데, 그런 살기를 내뿜으면 안 되지.”
역시 카디얀.
지난번에 한 번 만났으니 이번엔 폐하란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샤를 왕녀님 앞이라는 카디얀의 설득이 먹혔는지, 에드워드는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일단 앉아서 얘기라도 해볼까요?”
내 제안에 나를 포함한 일곱은 방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갈색 머리인 나, 은발인 폐하, 제국 기사단인 카디얀과 에드워드, 정체 모르는 소년 월터, 전혀 사연이 예상가지 않는 조합인 왕녀님과 볼프만.
애매한 관계 때문인지 침묵이 일었다.
카디얀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왕녀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자는 해적 아닙니까? 왕녀님께선 어쩌다 범죄자와 동행하게 되셨는지…….”
오오, 나도 궁금했는데.
카디얀의 질문에 볼프만이 깔깔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목숨을 구해줬거든~ 글쎄, 탈옥하고 내 배를 찾으러 가려는데 절벽 나무에 예쁜 게 걸려있지 뭐야~?”
“조용히 하세요.”
“이 왕녀님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런지 내가 이 얘기만 하면 조용히 하라 그러더라. 죽을 뻔한 걸 신성석까지 써가면서 구해줬더니 이 마을로 와야 한다고 그래서 데려왔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샤를 왕녀님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오려고 한 곳이 폐하가 있는 쿠카였다니.
역시 폐하와 왕녀님은…….
“아니야.”
“뭐, 뭐가 아니에요?”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라고.”
깜짝이야.
옆에서 훅 들어온 폐하 목소리에 고막 녹을 뻔.
뭔가 오해가 생긴 모양인데, 지금은 듣는 귀가 많으니 나중에 물어봐야지.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러다 샤를 왕녀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윽.’
사르르 웃는 눈웃음. 미쳤다.
옆에는 폐하, 앞에는 샤를 왕녀님.
이게 무슨 안구에 복 터진 조합이야……!
내가 폐하 여자친구란 사실도 잊고 머릿속이 꽃밭이 되어갈 때쯤.
폐하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