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힐리스는 샤를의 미친놈 소리가 꽤 마음에 드는 듯 조소했다.
“그런 다음엔 이 세계를 가질 거고.”
“단단히 돌았구나.”
“누이야. 나는 영웅이 될 거다. 멸망에 속에서 땅을 정화하고 세상을 구한 영웅.”
샤를은 주먹을 힐리스의 얼굴에 향해 내질렀다.
쿵. 하고 주먹이 결계에 막혔다.
힐리스의 표정은 평온했고, 뒤이어 흘러나온 샤를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너.”
샤를은 힐리스를 똑바로 노려봤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해서 일을 이렇게까지 키운 거야?”
신의 저주를 받고 변한 인간, 변절자. 그리고 변절자가 자신들의 왕국을 죽음으로 물들이며 만들어낸 검은 땅.
오디트리아 대륙의 수많은 신성력자가 그곳을 ‘변절자들의 땅’이라 부르며 정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결계를 치는 게 전부였다.
저 멍청한 놈이 어디서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땅의 정화는 네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곧 죽을 누이를 위해 선물하는 셈 치고 알려주지.”
힐리스는 샤를에게 속삭였다.
“성녀는 제물이야. 변절자를 없애고 검은 땅을 정화하기 위한 제물.”
“……너랑 같이 다니는 그 성녀가?”
“왜 그래. 저게 가짜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힐리스는 제 뒤쪽, 가면 쓴 성녀가 있는 방향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진짜 성녀를 제물로 바치고 나면 성녀는 죽는다. 영광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올 테지.”
샤를은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성녀를 그렇게 대한다고? 바버논 왕국이 왜 변절자의 땅이 돼버렸는지…….”
“걱정 말거라. 나는 믿는 신이 다르거든.”
일순 힐리스의 어깨 위로 검은 기운이 얕게 일렁이다 사라졌다.
샤를은 소름이 돋았다.
신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는 세이칸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저놈은 대체 무엇을 믿고 있단 말인가.
“이 세계에 신은 세이칸 하나뿐이야.”
“어리석은 너희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힐리스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며, 델칸에게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샤를을 가뒀던 결계가 풀리고, 검날을 세운 델칸이 샤를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힐리스!”
샤를은 델칸의 등 뒤로 멀어져가는 힐리스에게 소리쳤다.
걸음이 멈추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암기를 그의 목덜미를 향해 던졌다.
하지만 델칸의 검이 그것을 막았다.
“안타깝구나. 누이야.”
힐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샤를은 화사하게 그를 비웃으며 오른쪽 손날로 왼손바닥을 쳤다.
왕녀가 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매우 상스러운 욕이었다.
“세이칸 신한테 저주나 받고 변절자나 돼 버려.”
힐리스의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 올라갔지만, 샤를은 그다음 표정을 볼 수 없었다.
“……!”
델칸의 무자비한 검이 샤를의 복부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샤를의 피 묻은 손이 덜덜 떨리며 델칸의 손을 잡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샤를의 몸은 파도가 사납게 몰아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
폐하와 합류하고, 나는 무척 편하게 이동했다.
얼마나 편했는지 신성석 한 번 던질 기회도 없었다니까.
뭐 해달라 부탁하는 사람도 없고.
이따금 얼굴 보며 주며 민심 챙기는 게 다였다.
그렇게 이틀 정도 지난 뒤, 황제 군은 데르아치 공국에 도착했다.
결전을 벌일 거라던 8만 명의 데르아치 본군은 그때까지도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비겁한 자식들.”
우리는 높은 암벽 위에서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폭은 10m 정도 되려나.
거대한 육상트랙처럼 빙 둘린 검은 땅 안에는, 사막,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마을, 커다란 공장, 영주의 성이 있었다.
검은 땅은 데르아치 쪽에서 인위적인 방어막이 분명했다.
이래서야, 모든 병력을 이끌고 공국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고.
신성력 여부에 따라 병력을 나누자니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당장 움직임이 보이진 않으니, 주변에 진을 치고 놈들을 감시하도록 하지.”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검은 땅 주변 초원에 황제 군의 진영이 자리를 잡았다.
사람은 많고 적은 없고.
가끔 변절자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투지가 들끓는 수십만 명 사이에 ‘끄어어’ 거리는 놈이 한두 마리씩 등장해봤자지.
군사들에게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하루 만에 좀이 쑤신다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삼 일째 되던 날엔 다들 시간 때울 일을 찾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슈벨첸 장군, 뭐 하세요?”
“오, 성녀님.”
검은 땅 바로 옆에서 슈벨첸과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무슨 작전 회의라도 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갔는데.
‘윽. 냄새.’
땅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지독했다.
내가 후각은 평균 수준이라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자진해서 니세포르엘 신전에 돌아갔을걸.
“성녀님께서도 하시겠습니까?”
“뭔데요? 제가 도울 거라도 있어요?”
슈벨첸은 덩치만큼 큰 목청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도와주실 건 없고, 재밌어하실 만한 건 있습니다.”
내가 재밌어할 만한 거?
폐하 총사령관일 때 어떤 모습인지 서로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나!
기대감에 눈을 빛냈는데, 슈벨첸이 가리킨 건 준비운동을 하며 몸을 푸는 병사들이었다.
“수호계 신성력을 가진 부하들과 내기 중이었습니다.”
“내기요?”
“보호 결계를 두르고 검은 땅에 들어가서 가장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성녀님께서 참여하시면 일등은 맡아놓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와.”
완전 위험해.
나는 요새 꽤 익숙해진 성녀 미소를 장착하며 말했다.
“탐나긴 하지만 일등은 슈벨첸 장군께 양보할게요.”
그리곤 자연스럽고 재빠르게 뒷걸음질치며 슈벨첸 무리에서 멀어졌다.
폐하의 심장 같은 내 목숨을 저런 애들 장난 같은 행동에 걸 순 없지.
“거절하셔서 다행입니다.”
뒤따라 걷던 카디얀이 잘됐다며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아쉬운 소리를 했다.
“맞다. 슈벨첸 장군한테 오늘 폐하 뵌 적 있는지 물어볼 걸 그랬어요.”
오늘은 아침 식사 후, 오전 내내 폐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보던 폐하였는데.
갑자기 안 보이니까 걱정이 돼서 말이지.
그래서 산책이란 핑계를 대곤 카디얀과 함께 진영을 어슬렁거리며 폐하를 찾는 중이었다.
“제가 다시 가서 장군께 폐하의 행방을-.”
“카디얀, 잠시만요.”
나는 한 곳을 주시하며 카디얀의 말을 가로막았다.
보통 사람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거리.
말을 타고 암벽 협곡 사이를 향해 달려가는 저 얼굴은……!
‘미쳤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저건 분명 우리 폐하였다.
그것도……! 그것도!
‘은발 폐하!’
크흡. 너무 좋아서 주변 막사 말뚝 다 뽑을 뻔했지만…….
“성녀님?”
주위에 보는 눈이 많으니 발을 동동 구르는 정도로 타협 봤다.
‘어딜 가시는 거지?’
폐하는 혼자였다.
헨켈 대장을 두고 가실 정도면 먼 거리를 가시는 건 아닌 듯한데.
‘따라가 볼까?’
가볍게 떠오른 생각에 매고 있는 가방을 뒤적였다.
절그럭거리는 신성석 주머니 옆에 딱딱한 유리병 하나가 손에 걸렸다.
황궁을 떠나기 전, 초비한테 받아온 염색약이었다.
막사 안에 있는 짐가방에 다 두고 온 줄 알았는데, 다행히 하나가 있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카디얀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심각해 보였나.
하긴 카디얀의 눈에는 내가 아무것도 없는 협곡을 주시하다 가방을 뒤지는 걸로 보였을 테니.
마침 잘 됐다. 나는 설명 대신 카디얀에게 소곤거렸다.
“카디얀, 말 두 필만 구하러 갈까요?”
***
“성녀님, 거의 다 왔습니다.”
앞서가며 안내하는 사람은 제1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성녀교 간부인 에드워드였다.
카디얀과 조용히 다녀오려던 폐하의 미행 계획에 에드워드가 끼어들게 된 건…….
“제가 망보고 있을게요!”
“성녀님, 말이 필요하십니까?”
시아나에게 폐하와 외출한다는 쪽지를 남긴 후,
카디얀과 말 서리하는 장면을 에드워드에게 들켰기 때문이지.
……갈색 머리인데 어떻게 알아봤지.
어쨌든 더 목격자를 늘리고 싶지 않았기에, 후다닥 에드워드도 데리고 진영을 떠났다.
그리고 직면한 문제.
이미 멀어져간 폐하를 쫓으려면 내 시력을 풀가동 해야 했는데, 이건 후폭풍으로 두통이 올 게 분명했다.
“폐하께서 이쪽으로요? 그러면 한 곳밖에 없군요. 쿠카입니다.”
다행히도 에드워드가 이 근방 지리에 빠삭했다.
그렇게 에드워드를 선두로 말을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우리는 쿠카에 도착해 마을 입구에 멈춰 섰다.
쿠카는 어설프게 외관을 수리한 건물과 낡은 건물이 듬성듬성 섞여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에드워드, 여기에 사람이 사나?”
카디얀이 그렇게 물을 만도 했다.
오후 4시경.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할 시간임에도, 거리엔 작은 회전초 몇 개가 굴러다니는 게 전부였으니.
나는 가까이에 있는 건물을 힐끔 바라봤다.
‘우리를 보고 숨은 건가?’
잠잠한 건물 안,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누구지?”
“저 아저씨들. 대장이 지난번 입고 온 옷이랑 똑같은 걸 입고 있어.”
“대장 친구들일까?”
옷은 카디얀과 에드워드가 입은 제국기사단의 제복을 말하는 건가?
그럼 대장은 누구지.
아이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에드워드가 마을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예전엔 노인 몇이 살았지.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폐하께선 어디에 계실는지…….”
두 사람은 막막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말에서 내려 그런 둘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이쪽이에요.”
황궁보다 크기가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가, 사실 마을에 들어왔을 때 폐하의 목소리가 한 번 들렸었다.
그렇게 설탕 가게 차려도 될 만큼 감미로운 목소리는 페하 밖에 없지.
나는 중앙에 있는 3층짜리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누군가 있군요.”
따라온 카디얀의 시선이 닿은 곳은 꼭대기 층이었다.
커튼이 쳐진 닫힌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갈까요?”
에드워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입구에서도 충분히 들릴 건 다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공장 안에 누가 있다고?”
폐하 목소리랑,
“포인이랑 렉스요.”
10대 후반 정도로 여겨지는 남자애의 목소리.
‘포인이 내가 아는 포인은 아닐 테고. ……그 포인은 치료 잘 받았으려나? 내 머리카락이 잘 쓰였을지 모르겠네.’
불현듯 떠오른 포인에 대한 걱정을 이어나갈 새도 없이, 폐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위험하니 공장엔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본인들이 시작한 일이니까 마무리 짓겠대요.”
“위험한 짓을.”
보지 않아도 알겠다.
지금 폐하 눈살 찌푸리고 있을 게 뻔해.
다정 폐하 연기할 때랑 다르게 목소리 톤도 조금 낮은 거 같고.
설마하니 또 새로운 부캐를 생성하셨나 싶어 설레는 중, 남자애가 폐하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장,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
“아, 지난번 데려오신 여자분이네요. 맞죠?”
…….
‘여자?’
그것도.
지난……번…… 데려온…….
“뭐!”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앞으로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