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발소리를 죽이고 숲 안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은 점점 선명해졌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좀 더 떨어졌어야…….”
“그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나무들에 가려져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들리는 목소리나 기척으로 유추해볼 때,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명.
……예를 들면 군대 한 부대.
야간 기습이라도 노리며 잠복한 건가.
알렌드와 헨켈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소란을 부릴 필요는 없지.
놈들이 눈치채지 못할 때까지 한 명씩 숨통을 끊어놓으면 그만이었다.
마침 나무 하나 너머, 가까운 곳에 인영이 하나 있었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길을 배회하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알렌드는 망설임 없이 인영의 입을 막았다.
나무 뒤로 끌고 들어와 목을 베려던 그때.
“……!”
헨켈이 다급히 황제의 검을 막았다.
주군의 검을 막은 호위 기사. 헨켈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알렌드에게 말했다.
“폐하, 카디얀입니다.”
“…….”
그제야 알렌드가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서 인영을 바라봤다.
헨켈의 옆에 급히 무릎을 꿇은 그는, 정말로 카디얀이었다.
알렌드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었다.
“……카디얀, 자네가 왜 여기에 있지.”
니세포르엘에 있어야 할 카디얀이 왜 여기에 있는가.
알렌드는 무릎 꿇은 두 사람을 지나쳐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급히 걷는 그의 발목을 불안이 스멀스멀 휘감는듯했다.
“…….”
삼삼오오 무리 지어 서 있는 사람들.
중앙에서 커다란 냄비를 휘젓고 있는 황실 주방장 헬리.
그리고 헬리의 요리를 보조하는 이는…….
알렌드는 성큼성큼 걸어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시아나 프라단.”
“황제 폐하.”
시아나가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헬리도 허둥지둥 엎드려 절했고, 주변의 이들 또한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알렌드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가볍게 그들을 훑었다.
황궁에 남았던 기사들에, 한쪽엔 무릎을 꿇고 능청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헤이즐까지.
모두 알렌드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네들이 여기에 있다는 건…….”
알렌드는 고개를 돌렸다.
“…….”
어,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유일하게 서 있는 여인.
도대체 네가 왜 여기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알렌드는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신아리.”
“으, 으아악……!”
아리는 귀신을 본 사람처럼 허둥지둥 도망갔지만, 곧 무서운 기세로 달려온 알렌드에게 잡혀 황제의 막사로 끌려갔다.
***
크흡.
내가 오늘 정도 들킬 줄 알았어.
알았는데-!
“…….”
둘만 남은 폐하의 막사 안엔 침묵이 가득했다.
조금 전.
날 도망 못 가도록 옆구리에 단단히 낀 채 헤이즐에게 모든 사정을 추궁한 폐하가 화가 났기 때문이지.
어쩌지.
아까 도망간 게 폐하의 화를 돋운 거 같은데.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는걸.’
갑자기 나타나셔서 눈이 멀 거 같았는데 내 이름까지 부르셔서 고막도 녹을 뻔했다고.
사람이 생존 위협을 느낄 때는 도주를 먼저 생각하니까.
지금처럼.
내 심장이 마구 뛰는 게, 폐하 외모 후폭풍 때문인지, 아니면 화난 폐하가 무서워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슬쩍 엉덩이를 뗐다.
“……앉아.”
“네.”
으으. 저 잔잔한 미소.
차라리 정색하시는 게 낫지, 친절해지려 노력하는 연기랑 화난 진심이랑 섞여서 더 무섭다.
근데 잘생겨서 계속 보고 싶은 거 있지.
막사 안의 장식장에 기대서신 모습이 아주 조각상처럼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쫓아왔다고?”
“네…….”
“가짜 성녀 소문을 잠재우려고?”
“네…….”
헤이즐이 진짜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준 덕분에 내가 따로 설명할 건 없었다.
그냥 들은 내용을 확인하듯 묻는 폐하의 질문에 네, 네, 거리며 답하는 게 다였지.
“신성력은…….”
“에이, 사용 안 했죠. 제 목숨 폐하 목숨이잖아요. 대신에 이걸 썼어요.”
민감한 주제의 등장에 서둘러 신성석 주머니를 폐하한테 보였다.
“그게 뭔데?”
“각종 신성석요.”
열흘 간 아낌없이 사용했는데도, 아직도 주머니는 열 개 가까이 남아있었다.
역시 돈이 최고라니까.
“잘했네.”
폐하는 내 신성석 사용처를 듣고 칭찬한 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돌아가.”
“네?”
여기까지 왔는데요?
이미 황궁이든, 니세포르엘 신전이든. 한참 떨어져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 데다가.
밖은 검은 땅과 변절자와 적들이 창궐하고-. 또, 또……!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이런저런 변명을 머릿속으로 주절주절 해봤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폐하한테 살아 돌아온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받아내고, 뒤를 쫓아온 건 나였으니까. 흑흑.
“……라고 말하고 싶어도 상황이 뜻대로 안 되는군.”
폐하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머리 헝클어질 때 제 마음도 헝클어진 거 같은데!
‘아냐, 지금은 주접떨 때가 아니라고.’
폐하는 “전사한 척을 하고 신아리만 지키면…….” 같은 무서운 소리를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지신 듯하더니 이내 마음을 접으신듯했다.
그리곤 한숨을 쉬시고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감싸 품에 안았다.
“어……! 어어어-!”
저 아직 항체 안 생겼는데요!
폐하 외모 면역력 제로인데, 이렇게 훅 들어오시면……!
“…….”
좋지. 너무 좋지.
이게 얼마만의 폐하 냄새냐.
심장이 뛰어봤자 터지기야 하겠어.
이제 내 나름대로 데이터베이스가 생겨서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는지-.
“숨은 왜 이렇게 크게 쉬어.”
“폐하 냄새 좋아서요.”
순간 폐하의 몸이 멈칫 굳었다.
너무 필터 없이 말했나?
그래도 우리 사귀는 사이인데 이 정도 말은 해도 되지 않을까.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폐하 의견은 어때요.
“전쟁터 냄새밖에 안 날 텐데. 뭐가 좋다고.”
“그런 냄새 하나도 안 나는데요? 아, 냄새가 아니고 향기다. 향기. 폐하한테 꽃향기 나는 거 아세요? 지금 그 향기 밖에 안나요.”
“무슨.”
질색하는 척하면서 더 깊숙이 껴안는 건 뭔데요.
나 행복해 죽겠네! 진짜.
아, 죽으면 안 되지. 방금 한 말 취소다, 취소.
“…….”
그리고 말없이 포옹이 계속됐는데.
심장 뛰는 거 말고도 잊고 있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끓는다.’
폐하 허리에 손 올리고 싶다.
나도 폐하 어디 앉히고 어깨에 손 두르고 싶다.
덮치고 싶-.
‘정신 차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한 나와, 그나마 이성적인 내가 머릿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이 와중.
폐하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올 때 괜찮았어?”
“네?”
“전쟁터. 다 봤을 거 아니야.”
그야 뭐…….
아무래도 첫날은 시체니, 뭐니 해서 충격적이긴 했는데.
점차 갈수록 악취 나는 검은 땅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게 괜찮았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끔찍하진 않았단 말이지.
그래도 젠달이 이렇게 된 건 걱정이 되긴 했다.
“검은 땅이요, 데르아치를 잡으면 복구할 수는 있어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폐하는 내 어깨를 감쌌던 팔을 풀고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못 본 사이 일이 상당히 고됐었는지, 폐하의 눈 아래엔 눈그늘이 옅게 깔려있었다.
퇴폐한 황제 같고. 막 그래.
“이런 험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폐하, 그건 걱정 없을 거 같은데요.”
“어떻게 걱정이 없어. 네게 이런 꼴을-.”
“저 지금 폐하밖에 안 보여요.”
크흡. 글러 먹었다 해도 할 말 없긴 한데.
폐하 얼굴 보는 순간 지금까지 겪었던 일은 내 머릿속에서 다 날아갔다 이거지.
머릿속이건 마음속이건, 폐하 한 사람만으로 꽉 차서 자리가 없다고.
이 정도였으면 한국에선 버스 요금 두 배로 냈어.
[삑-.]
[기사님, 한 명 더요.]
[그냥 타요.]
[하지만 그냥 타기엔 양심의 가책이……! 제가 보기엔 한 사람 같아 보여도 마음속엔 언제나 폐하가 있거든요!]
[알아요.]
[네?]
[알지만, 학생. 난 빛 요금은 받지 않거든.]
으으. 너무 좋아.
시도 때도 없이 좋아 미치겠다.
그런데 나 오늘 어디서 자지. 폐하 막사에서 같이 자나?
그러면 오늘도 이불로 묶어 달라고 해야겠다.
폐하는 피곤하신 거 같으니 침대에서 주무시라 하고, 나는 소파에서 열흘 치 폐하 얼굴 충전이나…….
“……신아리.”
아까부터 말없이 내 얼굴을 보던 폐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아나가 있는 막사에 침실을 마련해 뒀을 거야. 오늘은 거기 가서 자면 돼.”
“어-. 폐하, 저 그러면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폐하 너무 오랜만에 보는데.”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미간도 아직 안 익숙해졌는데-!
이 와중에 심장 소리는 시끄럽게 쿵쾅쿵쾅 하고 난리가 났다.
물론 대부분이 내 심장 소리겠지만, 폐하 심장 소리도 꽤 섞인 거 같은데……!
“폐하……?”
어쨌든 나는 조금 더 있고 싶단 말이지.
최대한 불쌍한 눈망울을 하고 열심히 매달려 봤지만 폐하는 단호했다.
“가.”
결국 나는 막사 밖에 있던 헨켈 대장에게 안내받으며 시아나가 있는 막사로 들어왔다.
“…….”
“성녀님? 여기서 주무시나요?”
“응.”
시아나가 의외라는 반응을 하며 날 맞이했다.
시아나도 오늘 나랑 같이 잘 줄 몰랐지? 나도 몰랐어.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시아나, 나 쫓겨났어.”
“왜요?”
“왤까……?”
왜겠어.
내 시커먼 흑심이 폐하한테 들켜서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밖에 없다.
전쟁터에서 흑심이라니. 폐하가 화날 만도 해.
아까 폐하 심장 소리도 화나서 커진 게 분명하다니까……. 흑흑.
***
샤를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그녀는 투명한 구속 결계 속에서 제 이복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델칸.”
“…….”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도 델칸은 석상처럼 아무런 미동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델칸의 뒤에서 말에 탄 힐리스와 가면을 쓴 성녀, 군사들이 서서 샤를을 바라보았다.
‘젠장.’
함정에 빠졌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던 마을의 영주가, 저 가짜 성녀의 편이었을 줄.
샤를은 매서운 눈으로 힐리스를 노려봤다.
“힐리스, 너 미쳤구나.”
“말버릇하고는. 돌아가신 선왕비 전하가 탄식하시겠다. 누이야.”
“나라를 버린 놈한테 예의라도 갖추란 소리야?”
“나라를 버리다니. 왕가의 일원으로 변절자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이들을 도운 것뿐인데.”
“보니아 영토의 5분의 1이 검은 땅이 돼버렸어. 영웅 놀이를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어때? 이렇게 피해를 줘놓고 무슨 영웅 행세야.”
힐리스는 그 말에 웃음 짓더니, 말에서 내려 샤를이 갇힌 결계의 앞까지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왕궁에서 다 죽어가던 환자의 모습이었는데, 그새 혈색이 돌고 살이 올랐다.
특유의 음침한 구석은 더 짙어졌지만.
샤를은 힐리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반역자.”
마음 같아선 힐리스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이라도 실컷 하는 수밖에.
“무슨 꿍꿍이야? 이제 와 보니아의 왕좌가 탐나기라고 한 거야?”
“보니아의 왕좌?”
힐리스가 비웃었다.
“그런 건 너나 야망 적은 불쌍한 내 동생, 루이드가 갖는 꿈이겠지.”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샤를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힐리스는 샤를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는 젠달의 황좌를 가질 거다.”
미친놈.
샤를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