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젠달 제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납품하는 상인, 길버트는 본인들의 운이 상당히 좋았다고 생각했다.
‘변절자를 만났을 땐 꼼짝없이 죽게 되는 줄 알았지.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성녀님께 목숨을 구해진 것도 모자라 다음 목적지까지 동행하게 될 줄이야.’
지난밤 돼지 한 마리가 데굴데굴 굴러 제집을 덮치는 꿈을 꿨는데, 그게 길몽이었던 게 분명했다.
“따라올 만합니까?”
카디얀이라고 했던 젊은 기사가 말을 타고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기사는 목덜미를 반쯤 덮는 기장의 회색 머리였다.
긴 앞머리를 중앙에서 양옆으로 나눠 눈썹과 분홍색 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눈초리가 살짝 올라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가까이하기 어려울 것 같은 첫인상과는 달리, 그는 종종 자신들에게 말을 걸며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네, 이래 봬도 이동하는 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놈들인데, 이 정도야 문제없습니다.”
길버트는 짐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너스레를 떨었다.
카디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길버트 일행이 있는 행렬의 끝에서 아리가 있는 행렬의 중앙으로 돌아갔다.
“길버트,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마부석의 옆자리에서, 길버트의 동료 한스가 속삭였다.
그는 여전히 성녀 일행에 합류한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 하루가 지났는데도 꿈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래도…….”
“하긴 나도 이 상황이 믿기지는 않네.”
길버트는 한스의 말에 동의했다.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상대방이 아닌 행렬의 중앙을 보고 있었다.
훌륭한 군마 위, 보기만 해도 성스러운 성녀님의 자태.
저 고귀한 검은 머리칼은 일평생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듯했다.
“어제는 어떻게 감히 성녀님 앞에서 입을 열었는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야.”
당시에는 살았다는 생각과, 성녀님께서 구원하러 오셨다는 감격에 주절주절 말을 내뱉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과거의 자신이 참 뭣도 몰랐구나 싶었다.
성녀님의 눈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서 절로 고개가 조아려지는데.
“그런데 말이야, 성녀님을 모시는 군대라 그런가. 다들 범상치가 않아.”
한스의 말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과 군사들은 물론, 예상외의 인물들까지 활약이 대단했던 탓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행렬의 선두에 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세련된 노신사.
당연히 본인들처럼 성녀님께 구해져 잠시 행동을 같이하는 어딘가의 귀족일 줄 알았건만.
“저기! 황제군과 전투를 벌였던 데르아치 공국군의 잔당입니다!”
“내가 가겠네.”
“헤이즐 님!”
적이 나타나자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나가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보여줬다.
어떤 때는, 그를 지원하러 전투에 뛰어든 기사들이 할 일이 없어 검 휘두르는 척을 하다 돌아올 정도였다.
“적을 베고 즐거운 듯 웃는 모습을 자네도 봤었어야 했어.”
한스는 헤이즐의 맹수같이 번뜩이던 호박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아리의 옆에서 말을 탄 시아나에게로 옮겨갔다.
“저 귀족 여인도 대단했지. 성녀님의 시녀.”
“레이디 프라단이잖아. 사교계의 꽃이었던.”
시아나 프라단이 사교계와 수많은 구혼자를 차버리고 성녀의 시녀로 들어간 건 유명한 사건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이런 전쟁터와 전혀 연관이 없을 위인이니, 당연히 본인들처럼 뒤에 숨어 있으려 생각했는데.
“…….”
펑. 퍼엉.
폭발하는 가벼운 무언가를 적에게 무심하게 던지는 게, 명중률이 백이면 백이었다.
그리고 가장 놀랐던 건 역시…….
“헤, 헬리 몽블랑이요?!”
“이분이!?”
신의 요리사라 불리는, 그 황궁 요리사 헬리 몽블랑이 견습 요리사와 함께 어제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녀님께 배웠다는 닭고기 스튜.
백인분이 넘는 요리를 한 번에 하는데도, 그 맛이 그렇게 대단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입안에서 감칠맛이 느껴질 정도라니.
“이제 큰일 났지. 헬리 몽블랑의 요리 맛을 입이 알아버렸으니, 웬만한 건 성에 차지도 않겠어.”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맛볼 수 있으려나. 벌써 아쉽네.”
이 행복한 동행도 내일까지.
길버트 일행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길 바랐다.
***
“……그래서 집결한 데르아치 군대와는 이곳에서 만날 듯합니다.”
젠달 제국.
황제군 진영의 지휘관 막사.
총사령관인 황제, 황실근위대의 헨켈, 제1 기사단의 단장인 디터, 젠달 군대의 장군 셋은 이곳에 모여 작전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데르아치 쪽의 병력은 8만 명 정도. 저희 쪽에선 30만 명과, 타국 지원병 10만 명을 합해 40만 명 정도입니다.”
30만.
그 숫자에 장군들은 마음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유례없는 규모라 할 정도로 엄청난 수는 아니지만.
모든 병력이 직업군인, 신관, 기사인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숫자였다.
백성을 불러 모으는 징집 없이 삼십만 명의 병력을 채우기란, 웬만한 준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준비도 안 된 자들을 전쟁에 내보낼 순 없지 않은가.”
황제의 그 말이 ‘무고한 백성의 피를 흘릴 순 없다.’라는 뜻인 걸 모르는 부하는 없었다.
그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치를 해왔다는 평을 받고 있었던 황제가.
아무도 모르게 이런 병력을 뒤에서 모으고 있었을 줄, 그 잘난 귀족들은 몰랐겠지.
젠달이 갑자기 나타난 변절자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황제가 몇 년간 물자와 자원을 군에 지원해 놓은 덕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피해는 여전히 존재하고, 변절자가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란 것에도 변함은 없었다.
“데르아치 쪽 병력보다 저희가 우세하긴 하나, 변수는 변절자입니다.”
“변절자들의 뒷수습도 문제입니다. 변절자를 처리하더라도 이미 검은 땅이 퍼진 뒤라, 정화하는 과정도…….”
“그자들, 이제는 대놓고 우리를 끌고 다니더군요.”
장군 중 하나인 슈벨첸이 분에 차 말했다.
오전에 전투를 치르고 온 황제군 진영에 합류한 그는, 데르아치 공국군이 끌고 온 변절자 우리 때문에 부하를 수십 잃었다.
거기에 주검마저 검은 땅에 휩쓸려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오늘 전투뿐만이 아니었다.
데르아치 공국군을 쫓아 수세에 몰아넣으면,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변절자를 풀었다.
그런 다음엔 혼란해진 틈을 타 쥐새끼처럼 숨는 것이 그들의 전법이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전투는커녕, 제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밖에 하질 못하니.
“데르아치 공국군이 아니라 변절자와 싸우는 것 같습니다.”
슈벨첸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에는 데르아치가 전장에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쥐새끼 대장이라 이거지.’
굴속에 숨어 자신이 유리할 때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지.
“결국 데르아치 공국까지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제1 기사단 단장인 디터의 말에 다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금 공국군이라며 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건 잔챙이들이었다.
이기고 없애봤자, 저 데르아치에겐 큰 타격을 줄 수 없는.
“공장의 파괴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네. 변절자 우리는 공장에서 생산한다고 하니.”
황제의 그 말에 전략 회의에 불이 붙었다.
작전이 어느 정도 틀을 갖추고 나자, 디터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실은 막사에 들어오기 전, 가짜 성녀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알렌드의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풀어졌다.
그의 입매가 싸늘하게 변했던 것은 찰나였기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디터의 말에 집중했다.
“무슨 소식입니까.”
“그게, 아직 확실치는 않은 것이라 알아보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기사단장, 뜸 들이지 말고 본론만 말하게.”
성격 급한 슈벨첸이 디터를 보챘다.
“가짜 성녀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내가 사람을 구하는 건 젠달의 황제 폐하를 위해서다.’라고.”
“뭐?”
알렌드와 헨켈을 제외한 장군 세 명이 놀란 반응을 했다.
알렌드의 눈은 차분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오른쪽 눈썹이 들썩였다.
무슨 꿍꿍이지. 데르아치.
“힐리스 왕자가 아니라 황제 폐하께 공을 돌린다고?”
슈벨첸이 인상을 팍 구기며 디터에게 물었다.
디터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의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조사해보라 사람을 파견했으니 내일 아침이면 알 수 있을 듯합니다.”
***
늦은 밤이 되어서야 알렌드는 지휘관 막사를 나왔다.
그는 본인의 막사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총사령관이 전쟁터에 호위 기사 한 명만 대동하고 밤 산책이라니.
하지만 마주치는 이들 중, 감히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황제가 누군가. 혼자서 군부대 하나를 상대하는 실력가였다.
걱정해야 하는 이가 있다면 황제의 검을 상대 해야 할 운 없는 이일 테지.
그보단.
‘눈 호강하는군…….’
명화 같은 황제의 외모를 가까이에서 봤다는 사실이 횡재한 기분을 들게 했다.
“오늘도 깨끗한 밤하늘이군요.”
헨켈은 한 발자국 앞서 가는 주군의 등을 향해 말을 걸었다.
니세포르엘 신전을 떠났을 때부터 오늘로 열흘째.
이 시간이면 황제는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보곤 했다.
알렌드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늘을 그토록 바라보는 이유를, 헨켈은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두고 온 이를 그리워하기 마련이니.
“그렇군.”
알렌드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여, 헨켈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잘 계실 겁니다.”
“그렇겠지.”
알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오늘따라 하늘이 해맑은 성녀를 닮아서인지, 평소에 내뱉지 않던 속마음을 조금 흘렸다.
“연인과 떨어져 있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더군. 좋은 일보단 아쉬움이 더 남으니.”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조금 더 빨리 용서를 구해볼 것을.
“걱정도 되네. 식사는 잘하고 계시는지. 잠은 잘 주무시고 계시는지.”
또 며칠째 제 얼굴을 못 보고 있다고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오다가도, 제가 못 해준 것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져 오곤 했다.
“많이 그리우신 모양입니다.”
“그런가 보네. 지금도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은-.”
알렌드는 입을 다물고 어둠이 깔린 빽빽한 나무숲을 바라봤다.
분명 사람의 인기척이었다.
알렌드의 시선이 고개를 끄덕인 헨켈에 닿았다가, 뒤쪽을 향했다.
언제 이렇게 진영에서 멀리 떨어졌는지. 막사의 불빛은 저 멀리 일렁이고 있었다.
‘두고 온 연인을 그리워할 틈도 주지 않는군.’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는 전장이니.
누군가 어디서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고,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과 직결되는 곳이었다.
“헨켈.”
“네.”
알렌드와 헨켈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검을 빼 들고 숲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