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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00화 (100/150)

100화

그러니까, 약 닷새 전.

황궁을 한동안 떠난다는 사실에 심란해져 망토를 입고 남몰래 추억의 장소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보니아 왕국에 성녀가?”

성녀?

내가 지나는 건물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건물 뒤에서 걸음을 멈추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사람이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고 다녀? 금방 들킬 거짓말일 텐데.”

“성녀님을 직접 뵈는 우리야 그게 거짓이란 걸 알지. 그런데 진짜 성녀라 믿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야.”

“그걸 왜 믿지?”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꽤 생생해. 신성력으로 변절자를 잡는 데다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은색이라더군. 얘기만 들어서는 진짜 성녀 같잖아?”

성녀 사칭범인가.

그동안 사칭범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목격담까지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이칸 신께서 초대 성녀를 보낼 때 내리신 신탁이 있잖아. 같은 시기에 성녀는 둘 이상 나올 수 없다고.”

“쯧. 그것 때문에 더 이상한 소문이 도네. 우리 성녀님께서 젠달을 버리고 반역자인 힐리스 왕자를 택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그 말에 상대방이 분통을 터트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서 놈들이 그런 소리를 했던 건가?”

“무슨 소리?”

“그제 황도 순찰을 하다가 구둣가게 종업원이 여행객들과 싸우는 걸 말렸거든. 도중에 여행객 놈들이 빈정거리는 소리를 하는 거야. ‘지난번 히펜 광장의 일이 황제의 자작극 아니냐.’, ‘갈색 머리 성녀가 어디에 있냐.’라고.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군.”

“잘했네. 자작극이라니. 우리 황제 폐하께서 그런 걸 하실 리가 있나.”

으. 역시 그날 검은 머리로 다시 나타날 걸 그랬나.

우리 폐하한테 이런 오명이라니-!

억울함에 머리를 부여잡는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하여튼 제국이 뒤숭숭해서 그런가. 황당한 말들이 많아. 폐하께서 변절자를 풀어놓는다거나, 사역마를 부린다더라.”

“그건 올해 들은 농담 중 제일 웃기는군. 코흘리개 어린애도 안 믿을 말을.”

“그렇지?”

두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루는 내 사역마야.”

마지막 이야기는 진짜였으니까.

“사역마요?”

“그래. 사역마를 소환하는 건 이 세계에선 변절자들만 쓸 수 있다고 알려진 힘이고.”

“와. 그런 것도 하세요?”

“……안 무서워?”

“왜요? 주인님 귀여운데.”

폐하는 그 말에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무슨 이유로 내게 이런 힘이 있는지는 알지 못해. 어린 시절 우연히 사용하게 됐고, 그걸 처음으로 목격한 원장님께서 남들에게 보이지 말라 하셨기에 그리했지.”

“원장님요?”

“부모를 잃은 날 받아준 보육원 원장님.”

폐하의 푸른 눈이 잠잠히 가라앉았다.

그런 폐하가 왠지 슬퍼 보여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짓자, 폐하는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펼치며 말했다.

“그렇게 조언해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이단으로 몰려 죽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폐하가 사역마를 부린다는 소문이 돈다니.

‘……어쩌지?’

이게 다 가짜 성녀 이야기 때문에 퍼진 소문들 때문인 거 같은데.

내가 나서는 게 좋을 듯했지만, 폐하는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황제 대리가 된다는 라울 신관님에게 찾아갔다.

“황제 폐하를 따라가고 싶으시다고요?”

“네, 당장 내일모레면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들어가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면 황제 폐하의 군대와 함께 이동하시는 게 아니라, 성녀님께서도 군대를 이끄시는 건? 그쪽이 좀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묻자, 라울 신관님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출정하시면, 제가 성녀님의 군대를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성녀님께서 그렇게 하길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저야 그래 주시면 감사한데……. 에본 재상님께서 반대하시지 않을까요? 황궁에 남으신다던데요.”

“이 늙은이가 그 정도 힘은 있습니다.”

그리고 라울 신관님과 상담한 날로부터 사흘 뒤.

니세포르엘 신전.

“앗, 총장님!”

나는 신전 입구로 뛰어가는 총장님 무리를 급히 불러 세웠다.

“성녀님, 위험합니다. 들어가 계시지요!”

“군대 왔어요?”

“……그걸 성녀님께서 어찌?”

“제 군대일걸요.”

무슨 수를 쓰신 건지, 라울 신관님은 정말로 황제 대리가 된 지 하루 만에 군대를 파견해줬다.

“성녀님! 저희가 왔습니다!”

기사단의 부단장 넷과 잘 훈련된 기사와 병사 100여 명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공통점이 있다면…….

“성녀님께서 전장에 나가시는데, 공식인 저희가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성녀교에서 얼굴 한 번씩 익힌 사이라는 거지.

“저, 저도 왔습니다. 성녀님!”

그 틈엔 헬리도 있었다.

어쨌든, 라울 신관님 대단해.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인원을 모아서 보내주다니.

아무리 황궁에 폐하가 없다지만, 남은 에본 재상님이 분명 반대했을 텐데!

‘알고 보니 라울 신관님이 황궁 최강자라던가.’

에이, 설마.

나는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헤이즐의 배려로 군대는 신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중정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짜 성녀 소문에 관한 대책을 세우는 중이었는데.

“노엘이 가짜 성녀 무리에서 목격됐다고요?”

지나가던 교수 한 명이 우리 대화를 우연히 듣고 놀라 되물었다.

노엘의 정보를 가져온 성녀교 간부인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보니아 왕국의 제 친우가 힐리스 왕자의 군대에서 아이를 목격했다더군요.”

“아. 세이칸 신이시여.”

교수는 감탄사처럼 신을 부르더니, 다급히 본관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이즐이 본관에서 나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헤이즐의 뒤를 아이들과 교수들의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총장님을요?”

나는 의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계 때문에 못 나가신다고 들었는데…….”

니세포르엘 신전의 결계는 안정성을 위해 한 사람의 신성력만을 공급한다고 들었다.

그게 헤이즐의 신성력이고, 그 때문에 헤이즐은 오랜 시간을 외출할 수 없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이 여정에 합류하려 하다니.

“괜찮습니다.”

답은 헤이즐의 뒤쪽에 선 교수들이 대신했다.

“총장님께서 당분간 자리를 비우셔도 신전의 결계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그때까지 결계를 지킬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저희도 나름대로 실력 있는 자들이니……. 성녀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남아있는 아이들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니세포르엘 신전은 저희를 믿고 맡겨주세요.”

교수들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이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성녀님. 노엘이 자기가 원해서 가짜 성녀랑 있는 건 아닐 거예요.”

“맞아요! 노엘은 잘못 없어요. 노엘 할아버지가 잘못했다고 했어요.”

“저희 교수님들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있을게요. 수업도 열심히 듣고요! 그러니까 노엘……. 미워하진 말아 주세요…….”

아이들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가득했다.

“총장님께선 노엘을 되찾으러 가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헤이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희는 가짜 성녀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기회는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는 법이니깐요. 그리고 성녀님을 지키란 황제 폐하의 명도 있었고요.”

……마지막을 이유로 삼기엔 너무 노엘 얘기 나오고 합류 의사 밝히지 않으셨나.

하지만 전력은 많을수록 좋지.

‘게다가 고급 인재……!’

젠달 황제 후보생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총장님이다. 무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슬쩍 주위의 눈치를 살피니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러면 동행을 부탁해도 될까요?”

그렇게 굴러들어온 헤이즐, 처음부터 신전에 동행했던 카디얀과 시아나, 라울 신관님이 보내준 백여 명의 군사와 헬리까지.

‘폐하 오명 벗기기’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대충 작전은 이랬다.

첫 번째.

황제 군은 전투를 하면서 갈 테니 이동속도가 느릴 테고.

우리는 최대한 빨리 움직여 황제 군과의 거리를 좁힌다.

“성녀님, 분명 승마는 처음이시라고…….”

“어……. 카디얀 경, 저 잘 타고 있는 거예요?”

“완벽하신데요.”

“오오, 왜지……? 이세계 혜택이 운동신경 같은 걸로 들어가 있나?”

근데 춤은 왜 그 모양이지.

“못 들었습니다……?”

“아, 혼잣말이었어요.”

두 번째.

황제 군이 지나간 장소를 반나절 늦게 지나간다.

“이 빛나는 금발은…….”

“성녀님, 뭣 좀 찾으셨습니까?”

“헬리, 이것 봐봐요.”

“이건?”

“폐하의 머리카락이에요.”

“네? 흙바닥에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 한 올만 가지고 어찌…….”

“아니, 바닥에서 얘만 막 빛나고 그러더라니까요……! 진짜 머리카락마저 존재감 뚜렷해……. 얜 몸에서 떨어져 나왔는데도 왜 이렇게 자체 발광하는 걸까요? 와. 나 이번 외모 후폭풍 어쩌면 좋지. 이젠 미간도 못 보는 거 아니야……?”

“서, 성녀님?”

“……라는 대사가 지난번 본 연극에서 나오더라고요. 어쨌든 이 길로 가면 되겠네요……! 폐하께선 이쪽으로 가신 것 같으니까.”

세 번째.

보이는 변절자는 다 잡는다.

“끄어…….”

“시아나, 이거 쥐고 있다가 혹시라도 쟤가 가까이 오려고 하면 힘껏 던져.”

“이 종이로 싼 돌들은 신성석인가요?”

“맞아. 공격계 신성석인데, 종이에 수식을 그려 넣었거든.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게끔. 일종의 신성석 폭탄 정도 되려나?”

“후후. 신성석을 일회용으로 사용하시는 분은 성녀님밖에 없을 거예요.”

시아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래, 신성력 사용 못 하는 핸디캡이 대수냐.

신성력을 못 쓰면 신성석을 쓰면 되지!

내가 신성석을 마차 째로는 못 사도,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꽉꽉 눌러 담아 지를 정도의 재력은 된다 이거야!

퍼어어엉-. 펑.

신성석 폭탄, 개당 제작 비용 7골드.

나는 던지는 족족 펑펑 터지는 내 일주일 치 봉급을 보고 감탄했다.

위력 장난 아니다.

이 맛에 다들 플렉스 하는 건가.

‘돈지랄……. 최고…….’

네 번째.

데르아치 공국군이나 변절자 때문에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있으면 돕는다.

“성녀님, 민가를 습격하던 데르아치 공국군을 모두 잡았습니다.”

“에드워드 경. 거기에 데르아치란 자는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쯧. 뒤통수 때려주려면 멀었네.”

“……데르아치의 뒤통수, 원하시면 제가 상자에 담아 대령하겠습니다.”

혼잣말이었는데 들린 모양이다.

그보다 상자면, 머리통이 들어갈 만한 조그만 상자?

검지 두 개로 상자의 크기를 허공에 그렸더니 귀공자 같은 모습의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들어가려면 목 위아래가 분리돼야 하지 않나……!

“거기에 들어가려면 머리가……. 몸이랑 떨어져 있겠죠……?”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뒤통수가 좋아요…….”

마지막.

도움받은 사람들에게 성녀 미소 날려주며 내가 폐하의 편이라는 걸 어필한다.

바로 지금처럼.

“앞서 가신 젠달의 황제 폐하께서 제게 부탁하셨답니다. 부디 어려움에 빠진 제국민들을 도와주셨으면 한다고요.”

“아아…….”

변절자에게 당할 뻔한 상인 넷은, 짐마차 두 대 앞에 옹기종기 모여 감동 어린 눈으로 말에 탄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곤 구해준 우리의 칭찬을 늘어놓은 뒤, 폐하 칭찬을 시작했다.

“황제 폐하의 용안을 우연히 뵌 적이 있습니다. 눈이 어찌나 곧고 맑으시던지. 그 눈을 보면…….”

“헤엄치고 싶어지죠.”

“헤엄치…….아니, 위엄을 느끼……. 성녀님, 죄송하지만 방금 뭐라 하셨는지…….”

“아, 폐하의 위엄을 깨친다. 위엄 친다…….”

으아아.

치긴 뭘 치냐……!

나도 모르게 나온 주접을 수습하려고 아무 말을 내뱉고 있는데.

내게 질문한 상인이 눈을 빛내며 내 말을 따라 했다.

“오오, 멋진 말이군요! 위엄 친다!”

“…….”

어쨌든.

작전은 나쁘지 않게 돼 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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