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99화 (99/150)

99화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폐하가 죽으면 제 심장이 멈춘다는 소리를 안 하셨다고요?”

그럴 리가.

나는 손을 쫙 펼치고 손가락 접을 준비를 하며 지난날을 곰곰이 곱씹었다.

어디 보자, 폐하가 그런 소리를 하신 적이…….

없네. 정말 없네.

기운 빠진다.

어깨를 축 내리고 시무룩하게 소파에 앉은 뒤 투덜거렸다.

“불공평해요.”

상대방의 죽음에 심장이 멈춰야 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폐하는 황제 자리라도 있지만, 폐하 없는 이 세계는 내겐 살아갈 의미가……!

‘진짜……. 오늘도 잘생기셨다니까.’

어제의 폐하는 알고 있었을까……!

오늘의 폐하가 어제의 자신을 뛰어넘을 거란 걸!

왜 하루하루 더 잘생겨지시는 거지! 우리 폐하는!

“또 이게 폐하와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만약에 제가 전쟁 중에 죽기라도 해봐요. 폐하도 죽고. 그러면 군대는 누가 이끌고 젠달 황제는 누가 해요?”

“헨켈도 총사령관의 자질이 있지. 차기 황제 문제는 라울 신관이 잘해줄 테니 문제없어.”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눈꼬리까지 접어서 웃으시는 거 잘생겨서 짜릿해.

아니, 이게 아니라.

나는 옆에 앉은 폐하를 흘겨보는 척했다.

“전 지금 심각하거든요?”

“나도 심각해. 성녀가 없으면 난 살아갈 수 없거든.”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폐하의 입매는 어느새 굳어 있었다.

“이제 네가 없으면-.”

“…….”

나는 옆에 앉은 폐하의 손을 잡았다.

폐하의 크고 단단한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살포시 손가락을 접어 내 손을 감쌌다.

으, 내가 저질러 놓고 후회하기 있냐. 신아리.

목구멍까지 두근거리고 아주 난리가 났다.

이대로 확 끌어안고 싶다며 날뛰는 머릿속 짐승들을 이성의 끈으로 칭칭 묶고서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도 전쟁에 따라갈까요?”

꽉.

폐하가 힘껏, 하지만 아프진 않을 정도로 날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상상만 해도 무섭죠?”

“……그래.”

“저도 무서워요.”

폐하가 왜 이런 억지 계약을 맺었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내 시한부 인생이 걱정됐던 거겠지.

폐하가 없는 동안 내가 신성력을 사용할까 봐. 그렇게 내 생명력을 깎아 먹을까 봐.

날 잃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무서워.

“폐하, 저는요. 남겨지고 싶지 않아요.”

떠난 사람보다 끔찍한 건 남겨진 사람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나중에 눈물을 닦고 씩씩한 척 잘살아 보겠노라며 말하는 것도.

모두 남겨진 사람의 몫이었다.

“전 이제 그러기 싫거든요.”

폐하는 내 중얼거림을 가만히 들었다.

“폐하가 누구보다 강하신 것도 아는데, 그래도.”

아무리 폐하가 오랫동안 준비한 전쟁이라고는 해도, 누군가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곳이 전쟁터였다.

“살아 돌아오세요.”

“약속할게.”

폐하는 집념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두 팔을 잃어도, 두 다리를 잃어도. 어떻게든 돌아올게.”

“묘하게 상상이 되는 그 예시는 뭐예요.”

싫다는 듯 대답했지만, 솔직히 폐하가 살아 있으면 머리통만 있어도 좋을 거 같긴 해.

“뭐든 좋으니까 돌아만 오세요. 저도 안 죽을 테니까.”

“그래.”

이번에는 내가 폐하의 손을 꽈악 쥐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목표는 폐하를……!”

“행복하게 해줄게. 신아리.”

“……헙. 가, 갑자기 훅 들어오시면 곤란한데요!”

“왜. 이번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네. 터질 것 같은데요.

저렇게 웃으면서 능글맞게 얘기하시는 건 언제 또 익히셨담!

진짜 어디서 수업이라도 받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

“으……. 위험하다고 얘기했는데……!”

짜증 나.

너무 좋아서 짜증이 난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폐하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이런 폐하를 그런 험한 전쟁터에 내보내야 한다니-!

하지만 보내야겠지. 보낼 수밖에 없겠지……!

다시 미쳐 날뛰려는 짐승들을 이성의 끈으로 꽉 조이며, 나는 폐하의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갰다.

“폐하, 돌아오실 때 데르아치 목숨줄요.”

그리고 며칠 뒤.

폐하는 날 니세포르엘 신전에 데려다 준 후, 전쟁에 참전했다.

***

“…….”

헤이즐은 총장실의 창문 너머로 바깥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성녀가 아이들과 함께 중정을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얼마 전, 노엘을 랑데트 후작에게 빼앗긴 날.

만신창이가 되어 신전으로 돌아온 헤이즐에게 아이들이 달려왔다.

“총장님, 저희 탓이에요.”

“노엘이 화장실에 간다고 했는데, 함께 간 덴드 교수님을 두고 혼자 교실에 왔어요.”

“저희가 할아버지를 설득하러 간다는 노엘을 붙잡지 못했어요.”

그리곤 울며불며 노엘이 신전을 나가버린 게 본인들 탓이라며 자책했다.

노엘을 지키지 못했다.

신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경험한 상실감.

교수들이 아무리 위로를 건네도 아이들은 충격의 여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랬던 아이들이, 이번 성녀의 방문에 다시 미소를 찾을 줄이야.

‘성녀께서 여기 계시는 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헤이즐은 어제 있었던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폐하, 보니아 왕국에서 나타난 성녀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들었네. 데르아치와 힐리스 왕자의 합작이겠지.”

“조심하십시오. 생각보다 많은 이가 그쪽을 진짜 성녀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황제를 향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성녀에게 버림받은 황제, 보니아 왕국에 성녀를 빼앗긴 황제.

‘지금 젠달에 변절자가 나타난 것도 황제가 세이칸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폐하, 성녀님은…….”

사실 헤이즐은 전장에 성녀를 데려가는 것을 권하려 했다.

이렇게 꼭꼭 숨겨 놓는 것보다는 힐리스 왕자가 하는 것처럼, 성녀의 이름으로 황제의 위상을 높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 보니아 왕국에 나타난 성녀가 가짜 성녀라는 것도 밝히고. 황제에 대한 오해도 잠재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성녀께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네.”

강한 힘에는 강한 반동이 따라오기 마련.

지난 성녀들의 역사가 썩 좋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 헤이즐은, 군말하지 않고 니세포르엘 신전에 성녀를 두기로 했다.

“전 이곳에 남겠습니다.”

또한 전장으로 데려가 준다는 황제의 말을 거절하고 신전에 남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노엘을 그렇게 떠나보낸 것과 남은 아이들을 지키는 데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도 총장 이전에 감정과 생각이 있는 하나의 인간.

지금 헤이즐 로이컨이 느끼는 감정은 총장의 의무감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지루하군.

창밖을 보는 헤이즐의 호박색 눈에 무료가 깃들고 있었다.

“……!”

그 눈에 생기가 돈 것은 그가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을때였다.

니세포르엘 신전을 보호하는 결계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그 흔들림을, 결계에 신성력을 공급하는 헤이즐은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문 바깥의 인기척을 감지한 헤이즐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총장님!!”

아니나 다를까. 교수 한 명이 총장실로 급히 달려 들어왔다.

외부 토지 보수를 위해 밖으로 나갔던 교수 중 하나였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자신이 목격한 것을 헤이즐에게 알렸다.

“군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

“기어코 왔구나.”

마을 어귀에 앉은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찬란하던 젠달의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세이칸 신께 사랑받던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곧 놈들이 이곳에도 올 것입니다.”

고향을 잃은 청년 하나가 이 마을을 지나며 그리 말했다.

“아버지! 도망가야 합니다!”

“가거라. 나는 여길 떠날 수 없단다.”

노인의 자식은 그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이 땅을 떠났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그럴 체력도, 이곳을 떠날 용기도 없었다.

그가 나고 자란 땅이었다.

네발로 기던 갓난아기 때부터, 지팡이에 의지하며 걷는 지금까지.

노인처럼 땅을 떠나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입구와 이어진 길목에 나와 죽음을 마주 보고 섰다.

“끄어어…….”

저것의 걸음을 따라 검게 변하는 땅이 차츰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발악은 해 보고 죽겠노라.

식은땀이 흐르는 노인의 손. 그 손이 잡은 지팡이에 미약한 노란빛이 흘렀다.

“세이칸 신께 드리는 마지막 제물이 될 수 있으면 좋겠구먼.”

그러면 죽어 세이칸 신을 만날 제게, 황제 폐하를 변호해 드릴 자격이 조금이나마 생길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성녀님을 떠나보내고 세이칸 신께 미움을 받게 된 가엾으신 그분을.

변절자가 마을의 입구를 밟았다.

노인은 있는 힘껏 지팡이로 변절자의 몸을 찔렀다.

“이놈!”

“끄어?”

신성력을 두른 지팡이였지만,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노인은 뒤로 밀려 나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변절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튕겨 나가 검은 땅에 떨어진 지팡이는 순식간에 녹아 땅에 스며들었다.

아, 하는 탄식 소리가 그 모습을 목격한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확실한 것은 이제 그들에겐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가온 검은 땅이 노인의 신발 끝을 녹였다.

‘이렇게 끝나는가.’

기적은 제 것이 아니었음을 잠시 잊었다.

번쩍.

노인이 체념하며 눈을 감은 그때, 눈꺼풀 너머로 환한 빛이 번뜩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쩌억, 하고 무언가 깨져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상냥하고 자애로운 음성.

눈을 뜬 노인의 두 뺨을 뜨거운 눈물이 적셨다.

“당신께선…….”

검은 머리, 검은 눈.

말을 타고 나타나, 저주받은 검은 것을 처단한 신성한 검정.

신은 젠달을 버리지 않으셨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심에 노인과 마을의 길목에 선 이들이 무릎을 꿇고 깊숙이 절했다.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이시군요.”

그날 저녁.

마을에서 성녀님의 일행을 맞이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남은 인원과 남은 음식으로 급히 꾸린 소규모의 잔치는 자정이 되기 전에 마무리됐다.

“…….”

잔치 후, 성녀는 홀로 마을에서 내어준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곤 닫힌 방문에 등을 기댄 뒤, 허리춤에서 주먹 두 개만 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두둑한 주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잘그락거리는 소리.

그 소리를 들은 성녀의 입꼬리가 흐뭇한 빛을 띠며 올라갔다.

“역시 돈이 최고라니까.”

“그렇게 좋으세요?”

먼저 숙소에 들어와 있던 이가 성녀에게 말을 건넸다.

“당연하지.”

성녀의 검은 눈동자가 침실에서 나오는 적갈색 머리의 미인에게 향했다.

“시아나도 좀 줄까?”

아리는 신성석이 가득 든 주머니를 시아나에게 내밀며 씩 웃음을 지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