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성녀님?”
“잠시만, 시아나.”
나는 긴장감 속에서 수프에 넣었다 뺀 스푼을 가만히 바라봤다.
검게 변하지 않는다. 좋아.
다음은 윤기가 잘잘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칠면조 다리.
거기에 포크를 찔러넣으려고 하는데,
“요즘에는 그것들로 음식을 확인하시고 식사를 하시네요.”
옆에서 보고 있던 시아나가 내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포크를 살짝 흔들며 시아나에게 말했다.
“이게 내가 있던 세계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독살을 염려하셔서 그러시는 건가요?”
“어? 시아나도 아는구나?”
사극의 왕족들이 은수저로 독 검사를 하는 게 떠올라 따라 해 본 건데.
시아나가 아는 걸 보니 여기에서도 유명한 방법인 모양이었다.
세계를 넘나들며 유명한 건 그만큼 효과가 있다는 거겠지!
헬리한테 부탁해서 은으로 된 스푼 포크 세트를 장만하길 잘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제 내 목숨은……. 내 목숨이 아니거든……. 흑흑.
‘폐하 심장도 멈춘다니. 진짜 무서워.’
성격 나쁜 폐하보다 지금의 폐하가 더 무섭다.
누가 연인 죽는다고 따라 죽게 되는 계약을 하느냐고……!
내 남자친구라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나 방금 자연스럽게 폐하가 내 남자친구라고…….’
으아악.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 온몸의 근육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다.
심장 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툭하면 이렇게 몸이 부정하려고 해서, 틈날 때마다 한 번씩 세뇌를 시켜줘야 한다니까.
나는 폐하와 사귀는 사이다. 연인이다. 폐하와…….
‘말도 안 돼. 진짜.’
현실 아닌 거 같은데! 역시 꿈 아닐까!
……진정하자.
어쨌든, 계약을 풀 방법을 찾기 전까진 꼼짝없이 폐하와 심장 공동체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독살은 물론, 길가의 돌멩이도 의심스러워지는 지경이란 말이지.
폐하 목숨과도 같은 내 목숨. 절대로 지켜.
“독 때문이라면, 이걸 사용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시아나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듯한 작은 나무함을 꺼냈다.
작은 침통 같은 나무함에서 나온 건, 주삿바늘만 한 두께에 검지 길이 정도 되는 바늘이었다.
바늘귀 위치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나는 받아든 바늘을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이게 뭐야?”
“신성석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이 만든 물건인데, 암시장에 유통되는 독까지 발견할 수 있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은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독이 있을 테니까요.”
“오오.”
만능 독 검출기였다.
내 은 숟가락, 은 포크가 구시대 유물처럼 느껴지는 기분인데.
“마음에 드세요?”
“응. 완전.”
나는 눈을 빛냈다.
신성석은 세공에 따라서도 값이 달라진다고 했다.
이렇게 작게 세공된 건 얼마나 하려나.
시아나한테 사고 싶다고 가격을 물어봤는데,
“그럼 1코퍼만 주세요.”
금화도 아니고 동화를 불렀다.
설마 시아나가 신성석 시세를 나보다 모르는 건가.
이러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아가씨라고 어디 가서 호갱님 되는 건……!
“시아나, 1 코퍼로는 길거리 옥수수도 못 사 먹어…….”
“지난번에 친구분이랑 드셨다는 그거 말씀이시죠? 다음에 같이 먹으러 갈까요? 맛있으셨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넘기는 시아나의 미소에 ‘절대 협상 불가’라 적혀있었다.
그냥 돈 받을 생각이 없는 거였구나.
저런 시아나는 이길 자신이 없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동화를 꺼내 시아나에게 건넸다.
“값 더 쳐줄 수 있으니까 마음 바뀌면 언제든 말해……?”
“후후. 네.”
식사 후, 하녀들이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자리 잡았고, 하녀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요새 예배당을 못 가니, 오전은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렇게 수다를 떨곤 했다.
“데르아치 대공 쪽에서 군대를 움직였대요.”
벌써 데르아치의 군대와 싸우게 되는 건가?
프로딘타 궁 내는 평화로웠지만, 바깥은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직접 출정하시게 되는 걸까?”
“폐하가 왜 출정하셔?”
처음 듣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물으니, 하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관례라서…….”
“관례?”
그 뒤로는 다들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말을 하질 못했다.
폐하랑 내가 사귄다고 알고 있으니, 신경을 써 주느라 그러는 거 같은데.
이유를 모르는 나는 애가 탔다.
“니세포르엘 신전에 보낸 아이가 황제가 되었을 때, 아이를 보낸 영주가 대공의 지위를 얻잖아요?”
시아나가 보다 못했는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본 재상님에게 들어 아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데르아치가 폐하를 니세포르엘 신전에 보낸 장본인이라는 소리.
그거랑 폐하가 출정하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나 싶었는데.
“대공이 반역을 일으키면 황제가 출정해 직접 처벌하게 돼 있어요.”
“……왜?”
“이유는 모르지만, 3대 황제께서 그렇게 하셨고, 이후에 같은 상황에 놓인 선황들께서도 그렇게 하셔서 관례로 굳어졌다고 하더군요.”
‘굳이?’란 소리가 절로 나온다.
황제 정도 되면 반역자는 군대 보내서 해결하면 되지 않나!
얼굴도 모르는 3대 황제를 원망하고 있는 중, 하녀들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황궁을 비우셨을 때 황제 대리의 자리는…….”
순간 내 쪽으로 쏠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맞다. 나 성녀였지.
그래도 설마, 나는 아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황제 대리시켜서 제국 말아먹을 일 있나.
나 말고 유능한 에본 재상님도 있고, 에본 재상님도 있을 텐데……!
“에ㅂ…….”
“라울 신관님께서 하시겠네요.”
“어?”
왜 우리 직장 상사님 이름이 여기서 나오지.
“니세포르엘 신전 출신이시거든요.”
“……라울 신관님이? 그런데 왜 황제 대리를 하셔?”
“황제 폐하께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실 땐 니세포르엘 출신 신관님들 중 한 분이 황제 대리로 계시게 되거든요. 지금은 라울 신관님께서 제일 가까이에 계시니…….”
라울 신관님과 니세포르엘 신전.
전혀 상상이 안 가는 조합에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졌다.
“그런데 괜찮을까? 라울 신관님은 항상 느긋하게 계시는 모습만 봐서.”
“나 기도한다고 하면서 주무시는 거 몇 번 본 적 있어.”
“그래도 할 땐 하시지 않아?”
다들 신이 나서 말하는 걸 보니 라울 신관님이 인기가 은근히 있는 모양이었다.
최애는 아니더라도 모두의 차애 같은 느낌인가.
……가만, 라울 신관님이 선황제랑 나이가 비슷하시지 않았나?
“그럼 라울 신관님은 선황제 폐하와 니세포르엘 신전 동기이신 건가?”
갑자기 든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는데, 일순 공기가 달라졌다.
또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음. 성녀님.”
이번에도 설명은 시아나의 몫이었다.
“라울 신관님께선 선황제 폐하가 즉위하시고 난 다음 대 황제 후보생이셨어요. 그리고…….”
시아나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제가 선출된 대의 니세포르엘 신전 황제 후보생들은 ‘선택의 미궁’ 속에서 영원히 나올 수 없어요.”
***
젠달은 10년에 한 번씩, 혹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 직후에 신성력이 강한 아이들을 황도로 모집한다.
그렇게 뽑힌 열 명의 아이는 황제 후보자가 되어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황제가 사망했을 때, 황제 후보자들은 ‘선택의 미궁’에 들어간다.
시련을 이기고 밖으로 나온 최초의 한 명이 황제로 선택되며, 남은 후보자들은 출입구가 닫힌 미궁에서 영영 나올 수 없게 된다.
‘……라는 게 시아나의 설명이었지.’
그럼 폐하의 동기들은 계속 미궁 속에서 갇혀 지내고 건가?
그때 헤이즐이 폐하 어린 시절 소장품을 가지고 폐하의 흉터라고 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나.
‘……그런 걸 소장품이라고 자랑한 총장님…….’
좀 못 됐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때 들은 상자 속 소장품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폐하의 귀염뽀짝한 시절의 초상화, 조그만 손으로 적었을 시, 처음으로 작곡한 곡의 악보……!
“보러 가고 싶…….”
“언제 나올 거야?”
“……지 않고, 안 나갈 건데요……!”
담요 바깥쪽에서 들려온 폐하의 기습 질문에,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지금 이곳은 내 방.
폐하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고.
나는 방 한쪽에 서랍장과 쿠션과 담요로 만든 요새 안에 있었다.
왜 쿠션 하나를 빼서 만들어 놓은 작은 창 외엔 시야가 다 막힌 여기에 들어와 있냐면…….
“내 연인 얼굴도 못 보나?”
“……윽. 연인.”
훅 들어온 공격에 정신이 아찔 거리는 사이, 폐하는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걸어왔다.
잘 뻗은 길쭉한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난 보고 싶은데.”
그리고 창 사이로 다리 대신 불쑥 나타난 천상계 외모.
“으악!”
“……으악?”
내 비명을 들은 폐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가를 움찔 좁혔다.
“그, 그러니까 얼굴 보면 안 된다니깐요!”
나는 조금 전 빼뒀던 쿠션으로 다시 창을 막고 심장을 부여잡았다.
“심장 터질 수도 있단 말이에요…….”
“심장이 터져?”
“으…….”
‘폐하는 나랑 사귀는 사이다.’라고 시도 때도 없이 뇌에 인식시킨 건 다 좋았는데.
부작용이 온 게 문제였다.
“이제는 폐하 얼굴만 봐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고요…….”
내가 간과했다.
길가의 돌멩이나 독살 따위를 걱정하고 있을 게 아니었지.
제일 위험한 건 세상이 아니라 폐하 얼굴이었다니까.
‘폐하랑 심장 공동체인 이상, 터지면 안 된다 이거야…….’
내 진지한 말이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바깥에서 폐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웃음도 이제 며칠 뒤면 못 보겠지.
조금 울적해진 마음에 폐하한테 다시금 물었다.
“……전쟁 안 나가시면 안 돼요?”
“금방 돌아올게.”
빈말로라도 안 간다는 소리는 안 하시네.
뭐, 내가 말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긴 했다.
제국 곳곳엔 변절자가 나오지, 벌써 황제군은 데르아치의 군대와 전쟁을 시작했지.
“어쨌든 목숨 잘 부지하시고요. 폐하 심장은 제 심장이니까……. 폐하가 죽으면 저도 죽잖아요.”
훌쩍.
남몰래 코를 훔치는데 폐하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반대로는 성립 안 되는데.”
“무슨 소리세요.”
“내가 죽어도 성녀는 멀쩡할 거란 소리지.”
뭐?
나는 벌떡 일어났다.
후두두 무너져 내리는 쿠션들 너머로, 쪼그려 앉아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폐하가 보였다.
윽. 내 심장.
“전사하실 거예요?!”
“……내가 왜?”
“안 하시면 다행인데요!”
아니, 배신감에 냅다 외치긴 했는데. 그보다.
“저도 폐하 심장 주세요!”
이건 불공정 계약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