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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97화 (97/150)

97화

불과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절망밖에 보이지 않았다.

옆 마을은 변절자들에 당해 검은 땅이 되어버렸다.

이제 꼼짝없이 본인들 차례구나 생각했을 때.

구원자처럼 나타난 성녀와 힐리스 왕자의 군대가 변절자를 물리치고 마을을 구했다.

“신성력으로 변절자를 처단하시는 모습이 어찌나 성스러우셨던지. 세이칸 신께서 저희 마을을 구원해 주시는 거라 여겼습니다.”

그 순간을 회상한 영주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성녀를 찬양했다.

검은 긴 생머리와 얼굴의 윗부분을 덮고 있는 반가면.

가면을 쓴 행색을 수상쩍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얼마 전, 성녀가 가면을 쓰고 젠달에서 활약했다는 것은 보니아 왕국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얼굴을 가리시는 이유가 있겠지. 미천한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성녀님께선 젠달의 황궁 바깥으로는 나오지 않으신다 들었사온데, 이렇게 저희 왕자님과 같이…….”

“어떻게 전달에만 계실 수 있겠는가. 세이칸 신께선 만물을 사랑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성녀님.”

힐리스의 말에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보더니 들뜬 얼굴을 했다.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보니아 왕국이 번영되겠군요. 마치 그 옛날, 초대 성녀님께서 보니아 왕국과 함께 해주셨던 그때처럼 말입니다.”

“영주, 아직 현왕께서 건재하신 상황에 무슨 망발인가.”

“죄,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로-.”

“하지만……. 훗날 내가 왕이 된다면 그리할 수 있도록 힘써 보도록 하지.”

힐리스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영주도 술잔을 부딪치며 그의 농담을 받았고, 연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

얼마 뒤, 성녀는 혼자 연회를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영주가 숙소로 내어준 화려한 방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소파에 앉은 소년과 벽에 기대고 서 있는 청년. 둘 다 용모가 빼어났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성녀는, 성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야, 꼬마.”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아, 갑갑해서 뒤지는 줄 알았네.”

그녀는 거침없는 욕설과 함께 검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검은색의 가발이 벗겨지고, 보라색 단발머리가 드러났다.

성녀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범한 머리카락.

함께 벗겨진 반 가면의 안쪽엔 눈동자 색을 검게 보이기 위한 정신 조작계 신성석이 박혀 있었다.

가면 뒤 드러난 그녀의 눈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이는 붉은색이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메이브는 소파에 벌러덩 누우며 투덜거렸다.

온종일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다녔더니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점술사 말대로 올해는 안식년으로 보낼 걸 그랬어. 일 받으면 재수가 없을 거라더니.”

메이브, 그녀는 원래 대륙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떠돌이 해결사였다.

길거리 영업을 하다 만난 고갱님이 보수로 지방 영지를 준다길래 덥석 물었더니.

가짜 성녀를 연기하라는 손톱 끝까지 소름 끼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의뢰받지 않을 자신도 아니었지만.

신보다 좋은 건 돈이고, 신보다 무서운 것도 돈이었다.

“그러면 그만하시던가요.”

노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그만두면 넌 어쩌고? 네 할아버지가 잡혀있다며?”

“메이브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너 내가 가짜 성녀 연기한다고 자꾸 틱틱거리는데. 너도 가짜 성녀잖아. 꼬마야.”

메이브는 깔깔거렸다.

사람들이 성녀의 신성력이라 믿는 건 다 이 꼬마의 힘이었다.

그녀도 신성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엘에게 비할 바는 못 되었으니.

메이브가 신성력으로 적을 공격하는 시늉만 살짝 해주면, 나머지는 힐리스의 군대 사이에 숨은 노엘이 처리하는 식이었다.

“니세포르엘 신전 출신이라며? 엘리트 앞길이 이런 데서 막혀서 어째. 이 건 끝나면 나랑 해결사 노릇이나 할래? 비율은 잘 떼줄게.”

“됐어요.”

노엘은 자신도 가짜 성녀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만지작거리던 털 방울 인형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재미없게.”

메이브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벽 쪽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봐, 그쪽도 한잔할래?”

“…….”

대답도 없고, 미동도 없었다.

솔직히 제일 재미없는 건 저 꼬마가 아니라 저 남자였다.

힐리스 왕자의 이복동생, 이름이 델칸이라던가 뭔가.

의뢰인이 한 조라며 셋이서 같이 움직이라고 했을 땐, 미남이 함께 있다고 좋아했더니.

명령받고 싸우는 것밖에 못 하는 꼭두각시였다.

“어이, 이것 봐라.”

메이브는 가발을 머리에 썼다. 델칸의 눈이 그제야 메이브에게 향했다.

메이브는 다시 가발을 벗었다. 델칸의 눈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

쓰고, 벗고, 쓰고, 벗고.

보고, 제자리로, 보고, 제자리로.

그러다 현타가 온 그녀가 가발을 내던졌다.

“에이씨.”

한 꼬마는 가짜 성녀라고 무시하지, 한 놈은 검은 머리 아닐 땐 인간 취급도 안 해주지.

목숨 걸고 일하는데 일시적 사업 동료들한테 받는 게 이딴 취급이다.

서러워서 어디 살 수가 있나.

메이브는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진짜 한탕 하고 뜬다…….”

***

짹짹.

오늘따라 요란하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무슨 새가 아침부터 울어…….”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 눈을 슬쩍 떴는데.

윽. 햇살 눈 부셔.

“잘 잤어?”

“어…….”

창밖을 보니 아직 동트기 전이었다.

뭐야, 햇살인 줄 알았는데 폐하 얼굴이었잖아.

“폐하 얼굴……?”

나는 잠이 덜 깨 눈을 끔벅였다.

여긴 내 방이고, 내 침대인데.

왜 폐하가 내 침대 머리 판에 기대앉아 있으신지.

‘꿈인가.’

현실 속에서 나랑 한 침대에 있기엔 너무 잘생기셨는데.

아무래도 꿈인 모양이다.

“내가 천사를 소환했…….”

“시장하지는 않나?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까.”

“헐. 폐하.”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숨을 곳을 찾아 이불 속으로 얼굴을 쏙 집어넣었다.

‘왜지? 왜 폐하가 내 방에 와 계시지?’

…….

순간 단편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어제의 잔상.

내가 폐하한테 키스, 키스를……!

그리고 내 방으로 올라와서…….

‘으아아아아.’

나는 붉어진 얼굴로 이불 속에서 몸부림쳤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나!

“……괜찮아?”

“으으…….”

진정될 리가.

지금 같은 침대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 박동 한도 초과인데.

이불 밖에서 폐하의 가벼운 웃음이 들렸다.

“……폐하.”

어쨌든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나는 폐하를 불렀다.

“응.”

“저 좀 풀어 주실래요?”

이불에 꽁꽁 묶인 애벌레 신세에서 벗어나야 했다.

밤새 이러고 있었더니 몸이 저리네.

“이러다 응접실에서 밤새우겠어요. 그냥 올라가서 얘기할까요?”

자정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는 대화에, 폐하와 나는 내 방으로 올라왔다.

올라온 건 좋았지. 대화도 좋고.

다 좋았는데……!

문제는 한 번 분위기를 타버린 후라 내가 날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묶어주세요.”

“……뭐?”

“대화하자면서요……! 제 몸이 폐하의 옥체랑 대화를 나눠버리려 하기 전에! 빨리!”

이불에 몸을 말고 외치는 날, 폐하는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난 절박했다.

짐승, 난 짐승이다.

폐하한테 또 어디 가서 말 못 할 짓을 할 수는 없어……!

“……꼭 묶어야 하나?”

“빨리요!”

과거, 보니아 왕국에서 젠달로 돌아오는 배에서 했던 경험이 있으셔서 그런가.

내키지 않아 했지만, 이불을 묶는 폐하의 손놀림은 완벽했다.

절대 안 풀리더라니까.

“숨소리…….”

“……신아리?”

“이익……. 이거 왜 안 풀려…….”

덕분에 중간 중간 고비가 왔었어도 나름 건전하게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지.

죄책감에 관한 오해도 풀고.

그동안 서로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도 나누고.

속마음도 확인하고……!

“후후…….”

나는 폐하가 풀어 준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히죽히죽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폐하는 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그러는 폐하 입꼬리도 올라가 있는 거 다 보이거든요……!

“폐하는 왜 웃으세요.”

“내가 언제.”

“지금도 웃으시는데.”

폐하도 나도 입꼬리가 주체가 안 됐지.

그도 그럴 게,

“……폐하, 저 좋아하세요?”

“좋아해.”

“그러면 저랑 연애해요. 제가 잘해줄게요.”

“……나는.”

“죄책감 그런 거 다 빼고요. 그냥 ‘예’, '아니요'로만 생각했을 때 폐하 답이 듣고 싶어요.”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지.”

“폐하.”

“……내가 잘해줄게, 신아리. 내 연인이 되어줄 수 있나?”

“완전요.”

폐하랑 내가 진짜 사귀는 사이가 됐다, 이거다.

내가 폐하를 꼬시다니.

이게 가능한가. 가능해도 괜찮은 건가.

나 무슨 무슨 법으로 안 잡혀 들어가려나……!

“같이 식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침에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 해.”

폐하는 프로딘타 궁으로 찾아온 헨켈 대장의 노크에 나갈 채비를 했다.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 괜찮아?”

“저야 뭐. 요즘 놀고먹는 백수인데요.”

“……미안하군. 성녀는 일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안에만 있게 해서.”

그건 어느 나라 성녀죠.

요즘 전쟁 소리 때문에 마음이 좀 불편해서 그렇지.

환경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니까.

놀고먹는 거 최고다.

“아, 잊을 뻔했군.”

폐하는 방문을 열기 전, 품속에서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폐하의 서명 외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였다.

“이게 뭐예요?”

“연인이 된 기념으로 해두면 좋을 거 같아서. 빈 곳 아무 데나 서명하면 돼.”

연인이 된 기념이라니.

연인이 된……! 그래, 이제 연인인데 이상한 거 하시겠어!

하자, 폐하가 하고 싶으시다는데!

머릿속이 꽃밭이던 나는 별생각 없이 폐하가 내민 종이에 서명했다.

그러자 종이가 빛으로 변하더니 폐하와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뭐, 뭐예요? 종이가 빛으로……?”

“별건 아니야.”

폐하는 내 손에 들린 펜을 거둬가며,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내 연인이 목숨을 잃을 때만 효과가 나타나니까.”

뭐지. 나 죽으면 부활하는 그런 건가.

“무슨 효과인데요?”

“내 심장이 멈춰.”

아, 내가 죽으면 폐하 심장이…….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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