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샤를.”
보니아 왕국.
제2 왕자, 루이드가 노크할 정신도 없이 샤를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건틀릿을 착용하던 샤를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잠시만요. 오라버니.”
샤를이 루이드의 말을 끊고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짓에 시중들던 이들이 모두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샤를은 루이드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노크도 없이 찾아오고 난리야.”
“너 알고 있었지? 힐리스 형님께서 젠달의 대공과 손을 잡고 역모를……!”
“알고 있었지. 네가 제일 늦게 알았고.”
힐리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군대가 국경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수도가 있는 방향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부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걸, 이제 와 호들갑이라니.
정보망이 너무 느리잖아.
‘저런 거랑 후계자 싸움을 하려고 했다니.’
루이드의 얼굴이 평소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해 보였다.
“어쩔 거냐? 왕께선 충격으로 쓰러지셨는데.”
“보면 몰라? 반역자 잡으러 가려고 준비 중이잖아.”
갑옷을 입은 샤를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그래. 내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됐어.”
한 시간 전, 국왕인 이슈팔드 애팅거는 병석에서 샤를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으니, 그녀가 현재 차기 왕위 계승자였다.
샤를은 힐끔 루이드를 바라봤다.
저와는 달리, 루이드는 같은 어머니를 가진 힐리스를 꽤 따랐었다.
세 모자가 왕위를 노리고 꽤 사이가 돈독했으니, 어지간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평소의 야생마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낯선 곳에서 빈털터리로 길을 잃은 놈 같았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갑자기 나타난 변절자도 형님께서 처리하고 계신다고.”
“넌 그 반역자를 아직도 형님이라 부르고 싶니?”
루이드의 말대로 변절자를 잡으며 영웅 놀이를 하는 힐리스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난번 계약을 빌미로 데르아치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 대가리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어찌 됐든, 변절자를 풀어 넣는 건 그 뱀 같은 늙은이의 수법이니.
함께 움직이는 힐리스가 지금 하는 짓은 본인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자작극임이 확실했다.
힐리스가 해로가 아닌 육로를 이용해 수도까지 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루이드보다 더 멍청한 힐리스.
어디 끌어들일 게 없어서 그딴 걸.
그 영웅 놀이가 한 번이라도 실패한다면, 보니아 왕국은 변절자들의 땅이 돼 버린 바버논 왕국 꼴이 날지도 모르는데.
“그럼……. 그것도 사실일까.”
“뭐가.”
루이드의 징징거림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샤를은 빨리 본론만 말하라는 듯 짜증 어린 목소리를 냈다.
“힐리스 형님의 군대에 델칸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리고 성녀님과 행동하고 있다더군.”
그 말에 샤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델칸이 뭐래요?”
“곧 만날 수 있을 거라 하더군요.”
허퍼슨은 그렇게 말했다.
곧 만날 수 있다는 건 델칸이 황궁에 방문할 일이 있다는 건가?
무슨 일이지. 보니아 왕국이 내전 중인 상황에 문화교류는 아닐 테고.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델칸의 소식이 반갑긴 했지만, 당장 급한 건 델칸보다 이쪽이었다.
나는 편지를 접어 헨켈 대장에게 건넸다.
“대장, 또 부탁해서 죄송한데요, 이것 좀 폐하한테 전해주세요.”
“바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답장 없으시면 제 마음대로 행동할 거라고도 얘기해주실래요?”
“네.”
며칠 전, 보물창고에서 나온 뒤.
폐하가 날 피하고 있단 말이지.
편지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도 감감무소식.
요즘 정신없이 바쁘신 건 알고 있지만, 답장으로 문장 한 줄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아……!
내가 편지에 ‘언제 시간 되세요?’란 질문을 적고 ‘오늘’, ‘내일’, ‘내일모레’, ‘당분간 바쁨’이란 선택지까지 써놨는데!
선택지에 체크 표시마저도 안 해주시는 걸 보니, 이건 고의로 내 연락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헨켈 대장이 나간 정문을 비장하게 바라봤다.
‘오늘도 답장 안 주시면……. 나간다.’
위험이고 뭐고. 프로딘타 궁 밖으로 나가서 폐하 직접 찾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하가 궁으로 들어왔다.
로비 중앙에 의자 하나를 갖다 놓고 앉아 대기하던 나는 갑자기 들어온 빛 덩어리에 눈을 감았다.
윽. 오랜만에 보는 얼굴 눈부셔.
급히 오셨는지 포마드로 고정한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내렸는데, 이래도 되나. 이렇게 사람이 섹시해도 되나!
왜 폐하 미모는 한계도 모르고 매일같이 기록 경신하는 거지. 어제의 폐하는 예상도 못 했겠지. 완벽한 자신의 미모를 뛰어넘는 게 오늘의 폐하일 줄……!
‘폐하 미모 당장 세계 유산으로 지정해…….’
심장이 하도 두근거려 현기증이 다 날 거 같았다.
나는 주접으로 가득 찬 속마음을 숨기고 뻔뻔스레 물었다.
“어? 직접 오셨네요? 그냥 답장만 해주시면 되는데,”
“마음대로 뭘 하시려고요.”
“뭘 하긴요. 궁에서 체스나 두려고 했죠.”
주변에 사용인들이 있어서 그런지 다정 모드였다.
폐하는 남들이 눈치채지 않을 크기로 짧은 한숨을 쉬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
“성녀.”
“이 뒤에 급한 일정 있으세요?”
“……없습니다.”
“잘됐네요. 저도 없는데.”
내 일정이라고 해봤자, 저녁 먹고 편지 보내고 폐하 기다리는 게 다였지만.
나는 응접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폐하에게 말했다.
“저희 얘기 좀 해요. 폐하.”
“……그러죠.”
폐하는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응접실로 따라 들어왔다.
그런 뒤, 나는 폐하에게 보안상의 이유를 대며 방음 결계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제 신성력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깐요.”
“그래.”
세상에. 내가 폐하를 부려 먹는 날이 오다니.
믿기 힘든 광경에 이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폐하는 고분고분하게 결계를 쳐주시곤,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간 마음고생을 하셨는지 얼굴이 무척 수척했다.
오늘 퇴폐미 장난 아니다.
폐하는 나한테 들을 말을 걱정하느라 지친 사람처럼,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할 말……이 뭐지.”
나도 그런 폐하의 분위기에 맞춰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폐하 혈액형이 뭔지 생각해봤는데요.”
“……?”
“제 이상형.”
“…….”
“미남형, 호감형.”
내가 단어를 하나씩 말할 때마다 폐하의 몸이 움찔거렸다.
모르긴 해도, 속으론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으실까……!
결국 참지 못한 폐하가 내 말을 막으려 했다.
“그만…….”
“그리고 회피형.”
폐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도 폐하와 눈을 맞췄다.
으-. 뭐야, 나 지금 증강현실 렌즈라도 끼고 있나. 폐하 눈에 바다가 있는데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는데,
지금은 피할 수 없었다.
내 심장……. 조금만 버텨……!
“삼 일간 일부로 제 연락 피하셨죠.”
“…….”
“그렇게 제 말은 안 듣고 피하기만 하시면 뭐가 해결돼요?”
“…….”
“맨날 저보고 혼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폐하가 더 심하신 거 알아요? 제가 이 세계에 온 지 일 년도 넘었는데, 소환 때의 일을 아직도…….”
나 지금 폐하한테 한 소리 하는 건가.
이렇게까지 커버린 자신이 기특해 잠시 말을 멈추고 감동하고 있었는데.
잠잠하던 폐하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신아리.”
그리고 날 보는 폐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널 불러들였어.”
으아아아아.
폐, 폐하가! 눈에서 보석을! 아니, 눈물을!
나, 나 어떻게 하냐!
일단, 일단!
‘내 각막에 각인……!’
뭔 사람이 저렇게 예쁘게 울어……!
얼마 전 배 잡고 웃으셨을 때랑은 또 다른 매력이…….
아니, 아니지.
내 최애가 힘들어서 울고 있는데!
그걸 좋다고 넋 놓고 감상하는 인간말종이 될 순 없었다.
나는 진정되지 못한 마음을 안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폐하의 손에 들렸다.
“왜, 왜 우세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 뭐든 말해. 비난이든, 원망이든, 저주의 말이든.”
속에 있는 말을 내리 말하는 폐하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널 여기로 데려온 보상을 원한다면 그것도 뭐든 들어줄게. 다만.”
몸을 일으킨 폐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손을 본인 뺨에 갖다 댔다.
“내가 널 잃지 않게 해줘.”
폐하가 고개를 들자, 푸른 눈이 다시금 날 본인의 세계에 담았다.
폐하는 지금 나에게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폐하의 미모를 수단으로 삼으면서까지.
그렇게 높던 자존심을 내던지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내게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빌고 있었다.
“제발.”
“…….”
공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목에 뜨거운 열 덩어리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은 나도 모르게 폐하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얼굴을 내어주는 폐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제가…….”
열 덩어리가 목덜미를 타고 뇌 속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뜨거운 기운에 절여진 뇌가 입에게 헛소리를 내뱉으라 명령하고 있었으니.
“제가 폐하에게 그 정도로 잃기 싫은 사람이에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
뭐가 어떻든, 나는 지금 이 미모에 홀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 사랑스럽고 애틋한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일 리 없을 테니까.
열기를 머금은 보드라운 살갗이 맞닿자,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겹쳤다.
***
보니아 왕국의 변방.
영주의 성에선 힐리스 왕자 일행을 맞는 호화로운 연회가 한창이었다.
악사와 무용수의 무대를 관람하는 중, 영주가 힐리스에게 다가와 술을 권했다.
“부디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저희 마을이 무사한 것은 모두 왕자님의 군대와…….”
술잔을 들어 올리는 영주의 눈이 황홀하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힐리스의 오른편, 검은 머리의 여인이 앉은 상석이었다.
“성녀님 덕분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