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저한테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있다든지.”
아리의 물음에 알렌드는 말을 삼켰다.
‘후회해.’
후회한다.
너를 소환한 것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성녀가 평범한 인간이란 걸 알았더라면.
술식을 고치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곳에 널 불러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에 불안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몇백 년 전 황궁 도서관의 서기관이었던 이의 일기장을 발견한 뒤부터였다.
[오랜 친우인 보니아의 국왕이 얼마 전 소환된 성녀에 관해 상담을 요청했다.]
……
[그는 제 손으로 성녀의 감옥을 짓는 게 아니냐며 자책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그래야 성녀는……]
……
[역사서를 보관할 장소를 고민하기에 지하 미궁을 추천했다.]
단편적이지만 초대 성녀에 대한 정보가 있는 일기장이었다.
중간중간 빈 부분이 있어 내용을 추측하던 중, 접촉을 시도하던 샤를 왕녀가 쿠카의 아이들에게 잡혔다.
그리고 빚이라는 억지까지 써 듣게 된 성녀가 가진 신성력의 비밀.
알렌드는 그날 후회란 감정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없어.”
“정말요?”
“그래.”
하지만 ‘널 소환해서 후회한다.’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리였다.
“전 이만 가볼게요.”
“데려다 줄게.”
“아니에요. 망토도 있고…….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그 말에 초조해진 알렌드가 급히 말을 붙였다.
“오늘 일은 고마워. 신세는-.”
“나중에 얘기해요.”
아리는 알렌드의 말을 끊었다.
허공에 시선을 둔 두 눈엔 혼란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당연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 왔고, 그것 때문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막 들은 참이니까.
“……그러지.”
아리는 등을 보이며 보물 창고를 나갔고, 알렌드는 그 빈자리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봤다.
이젠 제 얼굴도 보기 싫어할지 모른다. 왜 자신을 소환했느냐며 한평생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보니아의 왕녀한테 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
루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상념에 사로잡힌 알렌드를 깨웠다.
[잘된 일이라 생각해. 더 숨겨봤자 좋을 것도 없었어.]
알렌드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루는 무슨 일이 벌어졌었냐는 듯 앞발을 할짝댔다.
“말하기 전에 상의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넌 또 나중에 말한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도 성녀는…….]
“……?”
[날 귀여워하거든. 아까도 내 턱 쓰다듬은 거 봤지?]
루는 기지개를 켜며 제 귀여움을 뽐냈다.
알렌드는 기가 차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에 루의 힘을 쓴다고 어둠을 사냥하지 말 것을. 그러면 울음소리밖에 못 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본들 다 지난 일이고 미련이었다.
알렌드는 검지로 허공에 선을 그어 공간을 갈랐다.
“오늘은 돌아가.”
[성녀 말인데.]
루는 알렌드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을 했다.
[생각보다 몸이 괜찮은데?]
“…….”
순간 알렌드의 손이 노란빛으로 발광했다.
그걸 본 루가 폴짝 뛰어오르며 털을 곤두세웠다.
[몸 상태가 괜찮다는 말이었다고! 이 성녀밖에 모르는 계약자 놈아!]
알렌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상태가 괜찮다고?"
[그래. 그 초대 성녀는 신성력을 사용한 지 며칠 만에 쓰러졌다며? 아까 성녀가 신성력을 사용할 때 봤는데, 당장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러면 성녀는, 초대 성녀와 경우가 다른 건가?”
알렌드는 마른 세수를 한 뒤, 다급히 물었다.
루가 그 의문을 부정했다.
[그건 아니야. 영혼과 신성력의 연결부에 계속해서 흔들림이 있었거든. 앞으로 신성력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목숨을 잃긴 하겠지.]
“…….”
[내가 봤을 땐, 지금까지 멀쩡한 게 신기한데. 왜지?]
루는 심각해진 알렌드를 두고 갈라진 틈새로 들어가며 말했다.
[하여튼 좋은 일이지. 성녀가 오래 살 가능성이 커진 거잖아? 성녀마저 떠나면, 네 소중한 사람들은 다 죽어버리는 거니까.]
알렌드의 주먹이 세게 쥐어졌다.
그런 미래를 경고라도 하듯 닫혀가는 틈 사이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갸옹.”
***
“날아다니네, 날아다녀.”
“……슬린 요즘 뭐 특훈하냐?”
젠달 제국 제2 기사단 단원들은 혼자서 변절자를 상대하는 슬린을 넋 놓고 바라봤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처럼 3인 1조로 행동하던 그였는데.
요즘 들어 슬린의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됐다.
“쟤 그거잖아. 성녀님 호위.”
“아, 그랬지.”
한 기사의 말에 다른 기사들이 이해가 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 호위로 들어가면 상급 기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실력이 는다던데.”
“말도 마라. 헨켈 레바르튼 대장님네 애들은 이제 괴물이라니까. 거기 애들이 돌아가면서 성녀님 호위하잖아.”
“황실 호위대 보충이라고 했을 때 자원할걸. 귀찮은 일인 줄로만 알았지. 설마 성녀님 호위 자리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과거 후회 버튼이 눌린 기사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퍽하고 내리쳤다.
그때 슬린에게 불쌍하다고 낄낄거릴 게 아니라 제가 가겠다고 해야 했다.
슬린에게 바꿔 달라 빌어볼까.
제2 기사단 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한 번 정한 일을 번복하기엔 황실 호위대 대장인 헨켈 레바르튼은 너무 무서웠다.
“그나저나 쟤 요새 체력이 미쳤어. 지난번엔 야간 순찰을 하고 훈련을 나왔는데도 하품 한 번 안 하더라니까.”
“저 잠 많은 슬린이?”
놀라운 목격담이었다.
잠이 부족하면 병든 닭처럼 고개가 시도 때도 없이 숙어지는 슬린이었다.
자신들의 대장인 카펜터가 고치려 해도 못 고쳤던 것 아닌가.
슬린에게 쏠린 기사들의 시선에 경악이 어렸다.
쩌억.
기어코 혼자 변절자의 영혼석을 베어버린 그를 보며, 기사들은 감탄했다.
‘과연 성녀님…….’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길래 저 슬린을…….’
***
“듄 경, 여기요.”
“감사합니다.”
아침 식사 후, 듄과 나는 습관처럼 물약을 한 병씩 들이켰다.
영양제 챙겨 먹는 느낌이랄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몸에 좋다니까 챙겨 먹는 거지.
‘두고 봐.’
누가 두고 봐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물약 병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각오를 다졌다.
시한부 인생이라니, 어림도 없지.
내가 이래 봬도 타고난 건강 체질이니까.
사고도 아니고. 건강 때문에 죽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응접실로 가실 겁니까?”
“네.”
우리는 방을 나가 1층 응접실로 향했다.
‘젠장.’
분해서 이가 갈린다.
폐하한테 계속 차이던 게 그런 이유였다니.
죄책감이 뭐냐고. 나는 지금 생활에 완전히 만족하는데!
‘날 소환했다길래 난 또 무슨 저승사자처럼 날 콕 집어 소환했다는 소리인 줄 알았네.’
폐하와 주인님이 한 일은 고작 소환진을 고친 것뿐이었다.
거기에 내가 랜덤으로 걸려 나온 걸 가지고 죄책감?
폐하가 나한테 신성력을 줬어, 뭘 했어?
생각해보면 어차피 트럭에 치여 죽을 운명이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소환진이 복구돼서 여기로 소환된 덕분 아닌가?
게다가 그렇게 소환된 곳이 폐하가 황제로 있는 젠달이라니!
죽었다 깨어나서 만난 천상계 미남이랑 한 공간에 있는 삶. 그 미남에게 성녀로 대우(?)받는 삶……!
삼 대가 아니라 삼십 대 조상 덕을 끌어모아도 실현 불가능하지. 그런 삶을 내가 살고 있다니.
‘크흡……. 나 완전 행운아.’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텐 나쁠 게 하나 없었다.
시한부란 게 조금 걸리지만, 그건 신성력을 사용 안 하면 될 일이고.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면 신성력 사용할 일이 아예 없진 않을 테니까. 신성석을 좀 사놔야겠다.’
덕질 자금을 빼놓고 남은 돈으로 신성석을 얼마나 살 수 있는지 계산하다 보니, 어느새 응접실에 도착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난 허퍼슨을 보고 반가운 기색을 했다.
“허퍼슨, 휴가는 잘 다녀왔어요?”
“네.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랑데트 후작과 얽힌 귀족들 때문에 황궁 밖이 어수선하다길래 걱정했는데.
다행히 허퍼슨은 무사히 다녀온 듯했다.
“앉아요, 앉아.”
다시 자리에 앉으라 권한 뒤, 나도 허퍼슨의 맞은편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허퍼슨이 휴가 동안 다녀온 지역 특산물을 주제로 시작한 대화는, 이번 랑데트 후작의 사건까지 흘러갔다.
“데르아치 공국과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말이 어린애들 입에서도 나오더군요.”
“데르아치 공국? 공장으로 유명한 젠달의 종속국이요?”
“맞습니다.”
“그곳과 젠달이 전쟁할 이유가 있나요? 이번에 문제가 된 건 랑데트 후작이잖아요.”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시치미를 떼며 놀란 얼굴을 했다.
허퍼슨이 답했다.
“랑데트 후작과 연관돼 붙잡힌 귀족들이 실토했다고 하네요. 데르아치 대공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요.”
“역모라니.”
“끔찍한 일이죠. 전쟁은 더 끔찍하고요.”
허퍼슨이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찻잔이 떨렸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허퍼슨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고스란히 담겼다.
“성녀님께서……. 전쟁이 일어나면 성녀님께서도 세이칸 신의 가호를 젠달에 내려주실 테죠……?”
이건……. 전쟁이 일어나면 같이 싸워달라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출전하는 군대에 축복을 내려달라는…….
허퍼슨이 말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음, 제가-.”
“허퍼슨.”
단단하고 엄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티 주전자를 가지고 막 응접실로 들어온 시아나였다.
“성녀님께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아……. 제, 제가 그만 경황이 없어 이상한 소리를……. 죄, 죄송합니다. 성녀님……!”
허퍼슨은 갑자기 정신이 든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사과했다.
시아나는 냉랭한 시선으로 그런 허퍼슨을 보고 있었고.
분위기 너무 싸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허퍼슨, 휴가에서 뭐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아……. 있었습니다.”
허퍼슨은 아직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말투로 답했다.
“오? 뭔데요?”
“성녀님의 친구분이라 말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제 친구요?”
누구지. 나 친구 없는데.
성녀 친구 사칭범인가.
‘내 친구’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냄새에 한껏 경계하고 있었는데.
“기사분이셨습니다. 키가 크시고 갈색 머리의 무척이나 잘생기신…….”
“델칸요?”
“아, 맞습니다. 그런 이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