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런 난장판이 된 전투와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
노엘이 어떻게 신전의 결계를 뚫고 나왔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자질이 뛰어난 아이니, 그쯤은 우스웠겠지.
“……노엘, 들어가라고 했을 텐데.”
헤이즐은 제 뒤쪽에 있는 노엘에게 다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의 등장으로 바뀔 상황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지금 제일 신경이 쓰이는 건.
‘손주에게 못 볼 꼴을 보이나. 랑데트 후작.’
노엘이 자기 할아버지가 변절자를 풀어놓으려는 걸 목격한 것이었다.
“내 손자, 이리 오거라.”
랑데트 후작은 변절자 우리 입구의 반대 방향에 서서 노엘을 불렀다.
과도하게 차분한 모습이었다.
제 중범죄를 아끼는 손주에게 들킨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정신 조작이 분명하다.’
헤이즐은 확신했다.
“노엘, 총장님의 말씀을 들어!”
“그만 멈추거라!”
노엘이 랑데트 후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수록, 노엘을 말리는 교수들의 외침이 커졌다.
한 교수가 대치하던 적을 뿌리치고 노엘을 잡으려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노엘……!”
노엘의 신성력이 땅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지반이 갈라지고 속에서 나온 나무뿌리가 그들을 옭아맸기 때문이었다.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은 니세포르엘 신전의 아이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받고 있었으니.
헤이즐도 예외는 아니었다.
“땅이…!”
노엘의 신성력에 대지가 솟구쳤다.
남자는 그제야 검을 거두고 솟아오르기 시작한 대지를 경계로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신성력을 두른 헤이즐의 손끝이 남자의 종아리에 긴 상처를 남겼다.
노엘이 나무뿌리에 단단히 감긴 헤이즐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가면 안 된다. 네 할아버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헤이즐은 충고했다.
노엘은 걸음을 멈추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으며 말했다.
“총장님, 저 할아버지 따라서 집에 갈래요.”
“노엘!”
아이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헤이즐의 시선이 앞으로 나아가는 노엘을 쫓았다.
솟아오르는 대지가 노엘의 모습을 가리기 직전, 아이가 뒤를 돌아봤다.
우스꽝스러운 인형을 손에 꼭 쥔 아이.
헤이즐과 마주한 맑은 두 눈엔 두려움이 어려있었다.
대지는 노엘을 완전히 가리고 헤이즐의 시야를 차단하고서야 솟는 것을 멈췄다.
“죄송해요. 쫓아오지 마세요.”
자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흙벽 뒤에서, 노엘은 결연한 목소리로 헤이즐에게 말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떠나는 랑데트 일행의 마차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
이튿날.
제2 기사단 단장, 카펜터는 군사들을 이끌고 랑데트 후작가로 들이닥쳤다.
집안 곳곳을 수색했지만 랑데트 후작과 노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라고는 저택 한구석에 뭉쳐 불안한 눈으로 상황을 살피는 사용인들뿐.
그들과 대화하던 한 기사가 로비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는 카펜터에게 다가왔다.
“단장님, 일단 저택에 있던 모두와 대화는 나눠봤습니다.”
“랑데트 후작의 행방을 아는 자는?”
“다들 모른다는 소리만 하더군요. 2, 3주 전부터 후작의 외출이 잦더니, 최근 일주일은 아예 저택에 머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도주했군.”
어쩔 수 없나.
카펜터는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집사에게 걸어간 뒤, 품속에서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꺼내 들었다.
“폐하의 명을 대신해서 전한다.”
“제, 제게? 폐하의 명이?”
놀란 토끼 눈이 된 집사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옆에 있던 기사가 “그쪽이겠소?”라 말하자, 그제야 집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펜터는 듣는 이 없는 선고를 이었다.
“현시간부로 랑데트 후작가가 소유한 모든 지위를 박탈하고 가문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한다. 또한, 당주인 카시우스 랑데트의 신변은 국가에서 관리한다.”
그 소리를 들은 사용인들이 불안감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체 높은 자신들의 주인이 이런 가혹한 처분을 받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카펜터가 이어 말했다.
“……라는 황명을 받았지만, 카시우스 랑데트는 도주한 것 같으니 전제국 내에 수배령이 내려질 겁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없다는 것이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 이 저택에서 나가지 못합니다.”
“저희 후작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길래 이런…….”
집사의 물음에 카펜터는 서신을 봉투에 넣으며 대꾸했다.
“손자분을 니세포르엘 신전에서 납치했습니다. 그 자리에 변절자를 데리고 왔고. 거기에 며칠 전 히펜 광장 변절자 사건마저 카시우스 랑데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벼, 변절자.”
그 말을 들은 집사는 그 자리에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
에본 재상님이 찾아온 후,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날. 폐하는 곧장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향했고, 돌아온 다음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긴 회의가 있었고, 그걸 기점으로 황궁 분위기가 변했다.
처음 보는 무장한 기사들이 황궁을 출입했다.
랑데트 후작이 세이칸을 배반하고 타락했다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왔다.
‘노엘은 괜찮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랑데트 후작과 관련된 귀족들이 하루가 멀다고 잡혀 들어간다는데.
그래도 납치범이 노엘의 할아버지고, 폐하도 노엘은 랑데트 후작이 받은 처분과 상관없이 신전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 말했으니.
노엘의 신변은 걱정하지 않아도…….
‘……라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기엔 요즘 분위기가 너무 무섭지.’
당장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가 일주일 정도 지속되자, 폐하도 결국 전쟁이 일어날 거란 이야기를 나한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도 망설이시던 걸 보면, 최후의 최후까지 숨기고 싶어 하신 게 아닐까.
“성녀는 내가 반드시 지켜.”
비장하게 말씀하시는데, 반할 뻔.
아니, 벌써 반했지. 홀딱.
어쨌든, 그에 맞춰 내 생활도 변했다.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가는 일정은 당분간 보류.
예배당 출근도 당분간 금지.
프로딘타 궁에는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결계가 쳐졌다.
나도 눈치란 게 있는지라, 얌전히 프로딘타 궁에 박혀 있기로 했다.
전쟁 중 내 목표는 ‘걸리적거리지 않기’니까……!
“밖이요? 성녀님은 안에 계시는 게 좋아요.”
응접실에 놀러 온 초비가 ‘으.’ 하고 넌더리가 난다는 얼굴을 했다.
“사람이 너무 많다고요.”
“연구소에도요?”
“여기저기에서 많이 오죠. 전쟁을 치른다니까. 연구실에 와서도 전쟁용 무기를 내놔라 어쩐다 찾아온다니깐요.”
“그럼 초비 여기 있어도 돼요? 바쁜 거 아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1층 응접실 창문을 두드렸다.
황궁 연구소 직원인 론데이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론데이만은 결계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창문 너머에서 날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런 뒤, 한 마리의 곰처럼 창문 가까이에 서서 초비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아, 징한 놈. 찾았네.”
초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성녀님,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높으신 분들이 자꾸 찾는 모양이라…….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응접실을 나간 초비는 다시 창문 너머에서 모습을 보였다.
론데이만의 등짝을 한 번 때린 뒤 군말 없이 연구소로 가는 걸 보니, 초비도 정말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나 너무 하는 거 없지 않아?”
나는 지금껏 응접실에 함께 있던 시아나에게 물었다.
제국이 멸망하고 어쩌고 하는 걱정 어린 소리까지 나오는 마당에.
나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건가.
“성녀님께선 다른 것 생각하지 마시고 무사히만 계셔주세요.”
“그래도…….”
“설마 신성력을 사용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순간 시아나의 온화한 미소가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그러고 보니 시아나는 내가 신성력 사용하는 걸 반대하지는 않았는데.
요즘 들어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고 있단 말이지.
……폐하가 신성력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과 연관이 있나?
“시아나.”
나는 고개를 빙글 돌려 시아나와 눈을 맞췄다.
“혹시 폐하한테 무슨 얘기 들은 거 있어?”
“무슨 얘기를요?”
“내 신성력에 관한…….”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번뜩하고 떠오르긴 했는데 질문을 하기엔 내 머릿속에서 정리가 덜 됐다.
그리고 시아나한테 폐하랑 신성력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까지 말해도 되나……?
내 고민이 계속되자, 시아나가 조금 전에 했던 대화 내용을 보충하듯 말했다.
“이번 전쟁은 인간들의 일이니깐요. 성녀님께서 귀한 신성력을 사용하실 필요는 없어요.”
“……나도 인간인데?”
“광장에서 변절자를 막으셨던 일은.”
나는 귀를 세웠다.
변절자가 나타난 후, 시아나가 직접 그 사건을 언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혹시 내 신성력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일어날 그런 불의에 맞서 싸우라는, 그런 뜻깊은 말을 하려는 건가!
역시, 유서 깊은 가문의 귀족은 생각하는 것도 깊다니ㄲ…….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려는 대화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성녀님, 다음에 변절자를 만나시면 땅이 검게 변하든 말든 그냥 도망가세요.”
“에이, 어떻게 그래.”
“변절자를 상대하는 건 신성 기사들의 몫이지요. 그러라고 나라에서 봉급을 주는걸요.”
“하지만 주변에 기사들이 없으면 나라도-.”
“아니요.”
시아나는 고아한 몸짓으로 내 머리를 정리해주며 생긋 웃었다.
“성녀님께서 위험한 것을 상대하실 바엔 젠달이 망하도록 두는 게 나아요.”
“시아나…….”
아무리 그래도 젠달은 망하면 안 되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아나의 주황색 눈이 진심이라 관뒀다.
시아나 무서워.
***
‘와. 달 엄청나게 커.’
나는 발코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걸린 보름달.
오늘따라 달이 땅을 덮칠 듯 컸다.
하지만 달이 커 봤자 뭐하고 휘영청 해봤자 뭐해……!
‘폐하를 못 보는데-!’
나는 난간 사이에 얼굴을 갖다 대고 고뇌했다.
폐하를 못 본지도 무려…… 36시간.
금단 증상으로 난간을 잡은 손이 벌벌 떨린다.
짐이 되지 않는 건 좋다 쳐도, 지금쯤 폐하 얼굴 한 번 봐줘야 할 거 같은데.
그래야 그다음 36시간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폐하 얼굴……. 그 미모……. 내 각막에 충전을…….
“독한 데르아치.”
랑데트 후작이 광장 변절자 사건의 배후란 말이 있지만, 나는 들었지. 범인은 데르아치라는 걸.
폐하랑 사귄다는 소문을 냈는데도 기어코 변절자 같은 걸 데리고 오다니.
“……성녀란 이름이 생각보다 영향력이 없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원한 밤바람을 쐬며 난간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헙.”
놀라서 심장 떨어질 뻔.
덤불 사이로 작은 쌍라이트 두 개가 번뜩이며 날 보고 있었다.
이어 환한 달빛 아래에 드러난 검고 앙증맞은 체구.
“갸옹.”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