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성녀는……. 정말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어서 곤란하군.”
폐하는 한참을 웃으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섰다.
“온종일 이렇게 있을 건가?”
“네?”
멍청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아까 봤던 폐하의 끅끅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 여운에 뇌가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데, 눈꼬리에 웃음이 남아있는 폐하의 눈빛이 다정하기 그지없는 거 있지.
그것도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누구세요. 우리 폐하는 이런 눈으로 저 안 보는데……!
“이 상태로는 식사도 못 할 텐데. 그만 나오지 그래.”
그 말에 나는 결계를 풀었다.
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몸이 폐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저절로 움직였단 말이지.
정신을 차렸을 땐 폐하의 커다란 손등이 내 이마를 가볍게 스친 후였다.
“어……?”
“이걸로 내기도 성녀가 이겼으니, 다시 결계를 칠 일도 없겠군.”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폐하는 손끝으로 자기 이마를 건드렸다.
아, 맞다. 그런 거 있었지.
배려해주신 건가. 심하게 감동이긴 한데 지금은 내기보다 다른 게 더 문제였다.
“……폐하.”
내 부름에 폐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어떻게 해요?”
“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요.”
화악-.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자, 이제야 인지했다는 듯 내 얼굴 전체에 뜨끈뜨끈한 열이 퍼졌다.
내 심장 이상해.
지금까지 터질 거 같고 쥐어짜는 거 같고 그랬던 적은 많은데……!
이건……!
“심장?”
폐하는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이 되어 내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열이 심하게 나는 것 같은데. 불덩어리 같아.”
차가운 폐하의 손바닥이 내 이마 전체를 덮었다.
생각보다 높은 열에 놀랐는지, 폐하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내가 준 브로치를 꺼냈다.
치료계 신성석을 사용하실 생각인 듯했는데.
“아, 안 돼요!”
나는 폐하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지금 신성석 아깝다고 막는 건가? 걱정 마. 다 사용하면 마차째로 사줄 테니까.”
“……그 정도면 황궁 하나 살 수 있지 않아요? 아니, 그보다……!”
지금 나한테 신성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건 치료받는다고 나아질 증상이 아니란 말이지!
나으려면, 그래. 내가 창문으로 뛰어내리거나, 방을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폐하가 내 이마에서 손을 떼 주시거나……!
‘진짜……. 나란 인간은……!’
중증이다. 폐하의 품에 안기고 싶다거나, 어! 막 그렇고 그런 생각만 드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당장 폐하와 멀어져 이 불끈불끈 하는 젊은 혈기를 식혀야 했다.
안 그러면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탐스러운 붉은 입술을 내가-! 내가……!!
‘정신 차려! 이 짐승아!’
눈에 뵈는 게 없어질 판이어서, 나는 내 뺨을 양손으로 세차게 때렸다.
이런 내 기행에 놀란 폐하가 내 양 손목을 붙들었다.
“신아리! 무슨 일이야!”
“으악!”
“신아리!”
소, 손목!
폐하의 목소리도 다급했지만, 나도 다급했다.
폐하가 손목을 놔주셔야 내가 여기를……! 이 시야를……! 저 입술을……!
‘입술……!’
큰일이다. 나는 이제 폐하 입술밖에 안 보여.
너 그거 정말로 하면 종신형이라고 내 뇌가 열심히 경고하는데.
경고하는데 말이지!
“…….”
턱이 제멋대로 각도를 맞추고 목이 천천히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점점 바닥과 멀어지는 발뒤꿈치까지.
“……신아리?”
진짜 누가 뒤에서 내 머리끄덩이 좀 잡아당겨 줘라.
이 사특한 대가리, 폐하한테서 멀어지게……!
나는 열기로 촉촉이 젖은 눈을 폐하의 입술에 고정하며…….
‘으악. 멈춰, 멈추라니까-!’
쿵. 쿵.
“누구지.”
굳게 닫힌 방문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폐하와 나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게.”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에본 재상님이었다.
재상님은 정신없는 얼굴로 폐하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를 발견하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긴 지금 상황이 누가 봐도 좀 이상하긴 하지.
바닥에 늘여놓은 다과에, 한쪽으로 밀어진 테이블에, 손목을 잡고 잡힌 채 가까이 서 있는 두 남녀.
‘재상님 나이스.’
재상님 아니었으면 완전 큰일 날 뻔했지 뭐야……!
나는 폐하한테서 내 손목을 빼고 후다닥 티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다.
그 와중에도 폐하는 내 몸 상태가 신경 쓰이시는지, 잠시 날 보다가 에본 재상님에게 시선을 돌려 용건을 물었다.
“폐하, 조금 전 니세포르엘 신전이,”
니세포르엘 신전이라는 말에 순식간에 공기가 달라졌다.
재상님이 별일 아닌 것을 전하려 이렇게 급히 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
짐작한 대로, 아연실색한 재상님의 뒷말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습격 받았다고 합니다.”
***
몇 시간 전, 니세포르엘 신전.
“내 손주를 데려가야겠네.”
랑데트 후작은 노엘을 데려가야겠다며 무작정 신전으로 찾아왔다.
과거,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데려가겠단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랑데트 후작도 아들 부부를 잃고, 이제 남은 혈육은 노엘뿐이니 손자가 그리운 것이리라.
라는 눈물 젖은 이야기로 넘기기엔 타이밍이 그리 좋지 않았다.
[황도, 변절자, 배후, 데르아치.]
오늘 새벽에 헤이즐이 전서구로 받은 쪽지 암호의 내용이었다.
그런 데르아치와 함께하는 랑데트 후작이 손자를 데려가겠다니.
‘역모가 실패했을 때 손주를 영영 보지 못할 경우, 혹은 이쪽에서 노엘을 인질로 삼을 경우를 염려한 것인가.’
“…….”
신전 외벽의 바깥쪽.
교수들과 함께 선 헤이즐은 꼿꼿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 세 대의 길이만큼 떨어진 곳엔 랑데트 후작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후작과 동행한 무장한 수십의 기사.
두 세력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랑데트 후작이 지팡이로 땅을 치며 성을 냈다.
“뭐 하고 있나. 헤이즐 로이컨. 어서 가서 내 손주를 데려오지 않고!”
“각하, 손주 분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하나, 노엘은 신전에 들어온 이상 세이칸 신께 약속한 날짜를 채우기 전까진 신전의 아이입니다. 각하께선 아이를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내 손자네. 랑데트 가문의 핏줄이야.”
벌써 몇십 분째 이런 대치가 계속됐다.
노엘을 데려오기 전까진 달라지는 것이 없을 듯했다.
헤이즐은 결단을 내렸다.
“각하, 아무리 그러셔도 규율을 어길 순 없습니다. 니세포르엘에 예외는 없으니깐요. 돌아가십시오.”
신전의 결계 안으로 들어가면 무장한 기사를 데려온들, 랑데트 후작이 뭘 어찌할 수는 없었다.
저러다 지쳐 돌아가겠지.
헤이즐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교수들을 이끌고 신전 입구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그의 발을 랑데트 후작이 다시 잡았다.
“멈춰 서게.”
끼익. 끼익.
녹슨 철에서 나는 소름 끼치는 소리.
랑데트 후작의 행렬 가장 뒤, 당나귀가 끄는 짐마차에서 나는 소리였다.
“…….”
기사 하나가 행렬의 앞쪽으로 수레를 몰았다.
수레가 가까워지자 악취가 풍겼다.
헤이즐에겐 익숙한 과거의 냄새였다.
물웅덩이에 빠진 시체들이 물과 함께 썩으며 내는 그 냄새.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공기가 이랬다.
짐수레에 덮은 가죽 천을 단단히 고정하던 밧줄 몇 개가 풀렸다.
바람이 불었고 천이 반쯤 벗겨지자, 그 안에 있는 끔찍한 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끄어어…….”
우리 안에 갇힌 변절자.
두 개체였다.
그것을 목격한 헤이즐의 뇌리를 26년 전의 참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검게 변한 고향, 그 앞에 망연자실해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무능력한 전쟁영웅.
헤이즐의 호박색 눈에 불꽃이 일고, 그의 입에서 천둥 같은 처절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카시우스 랑데트!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헤이즐은 믿었다. 랑데트 후작은 변절자의 일과 무관할 것이라고.
데르아치와 손을 잡긴 했지만,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리라고.
황제의 자리를 노려도, 랑데트도 젠달을 위해 사는 자였다. 그도 세이칸을 두려워하는 피조물 중 하나였다.
“…….”
저 자는, 누구인가.
랑데트를 움직이게 하는 건 누구인가.
“……각하.”
헤이즐은 손에 신성력을 둘렀다.
“정신 조작 여부를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고 헤이즐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그 속도에, 주위 기사들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정도의 반응밖에 할 수 없었다.
헤이즐의 손이 랑데트 후작의 관자놀이를 노렸으나, 갑작스럽게 끼어든 검 하나가 그를 막았다.
콰가가각.
충돌한 두 개의 신성력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검의 주인은 눈구멍 두 개만 뚫린 가면을 쓴 남자.
가면의 정체를 알아본 헤이즐이 남자에게 속삭였다.
“그 가면. 보니아 왕족이 부리는 그림자 부대의 것이군.”
보니아 왕실 호위 부대라 알려졌지만, 실상은 왕가의 뒤가 구린 명령을 받아 은밀히 움직이는 부대였다.
샤를 왕녀 쪽인가, 아니면 힐리스 왕자 쪽인가.
둘 중 어디든 상관은 없지만.
방정맞게 올라오는 투지를 억누르며, 헤이즐은 남자에게 말했다.
“내 속도를 따라오는 이가 오랜만이라 기쁘긴 하네만, 비키게. 해야 할 일이 있으니.”
“…….”
“비켜줄 의향이 없으면 무력으로 해결을 봐야겠군.”
헤이즐은 검을 잡은 손에 힘과 신성력을 더했다. 하지만 남자의 검도 만만치 않았다.
그저 멈춰 있는 듯 보였으나, 조금이라도 힘이 빠지는 이가 상대방에게 당하는 상황.
교수들이 헤이즐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랑데트 후작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헤이즐 로이컨이 공격을 시작했는데!”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가면 쓴 이들과 랑데트 후작의 기사들이 그들을 공격했다.
교수들도 반격했다.
신전의 바깥은 순식간에 작은 전장으로 변했다.
신성력과 검을 사용하는 전투.
누군가는 폭발을 일으켰고, 누군가는 베었고, 누군가는 결계를 펼쳤으며, 누군가는 쓰러졌다.
정신없는 그 싸움에서, 랑데트 후작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변절자를 가둔 우리의 문을 열었다.
‘랑데트……!’
아군의 목숨도 버릴 생각이냐며 비난할 틈이 없었다.
아직 남자와 대치 중인 상황이었지만, 헤이즐은 급히 짐수레로 시선을 돌렸다.
놈들이 활짝 문이 열린 철장의 문턱을 넘으려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나오게 둘 순 없다!’
눈앞의 남자에게 팔 하나를 내어주는 한이 있어도, 저것들을 나오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끄어…….”
“……으어어…….”
놈들은 자유를 눈앞에 두고서도 나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철장을 향해 펼친 결계 때문이었다.
헤이즐의 입에서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가거라. 노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