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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90화 (90/150)

90화

“그럼 저는 가볼게요.”

아리는 슬린과 카디얀을 대동하고 훈련장을 떠났다.

성녀교 단원들이 그런 아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웅했다.

한 시간도 채 안 돼 작별이라니.

아쉬움이 길게 남았지만, 그래도 커다란 수확이 있었다.

단원들의 맨 앞줄. 간부인 에드워드가 소중히 품에 안은 아리의 친서와,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

‘드디어…….’

성녀교 단원들의 마음이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앙뜨완 제과점의 본점에 전시해놓은 공식 친서와 머리카락을 보고 어찌나 샘이 났던가.

우르르 몰려간 그곳에서 몇몇 단원들은 부러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더욱이 성녀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밸런타인 초콜릿은 황제 폐하의 초상화를 종류별로 모아야 구할 수 있다니.

‘상술이다…….’

‘악덕 업체군…….’

왜 저렇게 돈을 밝히는 사기업이 인정받고 있는가.

순수하게 성녀님을 따르는 건 우리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단원들은 모두 밸런타인 초콜릿을 구했다.

이유가 있겠는가.

성녀님의 허락을 받고 세상에 나온 것이니 손에 넣는다.

그리고 결국.

앙뜨완 제과점에 가졌던 시기와 질투도 오늘로 끝이었다.

“에드워드.”

성녀교의 또 다른 간부이자, 제3 기사단의 부단장인 럭쉘이 에드워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선을 마주친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격에 젖은 대화가 이어졌다.

“이제 우리도…….”

“공식이네.”

공식.

그 한마디를 듣는 단원들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

‘와. 혼났네.’

어제. 카디얀을 뒤쫓아 들어간 곳에서 만난 게 성녀교일 줄이야.

익숙한 얼굴이 꽤 보여서 당황했다.

역시 이 세계 사람들은 세이칸한테 진심이라니까.

평범한 학생이었던 날 두고 세이칸이 보냈다며 교단까지 창설한 걸 보면……!

“역시 덕질은 당하는 것보단 하는 게 최고야.”

나는 아무도 없는 방 한가운데 서서 중얼거렸다.

‘성녀님…….’ 하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은 시간이 지나도 부담스럽더란 말이지…….

어쨌든, 오늘은.

‘결전의 날!’

폐하와의 집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이때를 위해 어젯밤부터 정신을 무장했지.

‘할 수 있어……!’

결연한 마음으로 방문을 주시하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성녀께 초대받다니 영광이네요.”

윽. 오늘따라 미모가 열권 뚫고 우주까지 소문나게 생기셨는데!

폐하교는 없나.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그리고 거기 명예 회장 자리는 나…….’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폐하랑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우리만 남은 방의 문이 닫히고, 폐하가 피식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뭐, 뭘요?”

“결계.”

폐하가 말하는 건 내가 들어가 있는 결계였다.

변절자 세 마리가 달라붙어도 몇 분은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내구성의…….

“구속 결계가 아니라 보호 결계거든요……! 제 신성력 말고 반지 신성력이요!”

이 와중에 내 신성력 사용한 거라 의심받을까 이실직고라니. 분하다.

내가 이틀간 고민해봤는데, 이것처럼 괜찮은 방법이 없더라니까.

아니,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지…….

자력으로 황제 자리까지 올라간 저 대단한 분의 의지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냐고. 흑흑.

게다가 아무리 정신을 무장한다고 해도 내 몸의 의지력은 작심 삼분일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결계에 들어가 있는 게 최선…….

“그래서.”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폐하는 내가 들어간 결계를 손으로 건드렸다.

그리곤 눈꼬리까지 접어 웃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오늘 결계에 들어간 연인과 집 데이트란 걸 하게 되는 건가?”

……함정이다. 이건 날 꼬셔서 밖으로 나오게 하려는 함정이 분명해.

바로 앞에서 보는 외모만으로도 미칠 거 같은데, 단어 선택 뭔데요.

‘연인’이라니. ‘데이트.’라니-!

훅 들어온 2연타 공격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이게 정녕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의 대사인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저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폐하 모태 솔로 아니야. 분명 경험 있으시다니까.

내가 굳은 채 어버버하는 사이, 폐하는 언제 그런 소릴 했냐는 듯 태연하게 소파로 가서 앉았다.

……더 꼬셔 주셔도 됐는데.

라니. 오늘은 어림도 없다. 나 자신……!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성녀가 몸만 오라고 해서 정말로 몸만 왔는데.”

“아, 맞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심심하시지 않게 제가 다 준비해놨거든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몸을 돌려 티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티 테이블에 올려놓은 각종 서적과 보드게임, 그 옆 트롤리에 담아놓은 다과들까지.

우선은 차를 대접하는 게 먼저일 듯해 트롤리를 잡으러 손을 뻗었는데.

“어라?”

턱. 턱.

투명하고 단단한 막이 내 손을 막았다.

“…….”

“…….”

후후. 그렇지. 결계 안에 있으면 난 아무것도 못 집지.

‘으아아…….’

소리 없는 절규가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폐하한테 손 안 대는 것만 생각하다가 이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다니-!

내 시야에 걸쳐진 폐하의 어깨가 들썩이는 거 같은데, 못 돌아보겠다.

“……폐하.”

“……왜, 그러지.”

익. 지금 중간에 웃음 참으신 거 맞지……!

순간 탱탱볼 신세가 된 나와 폐하가 집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떠올랐다.

차마 입 밖에 낼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하다.

내가 원하던 건 이런 게 아니었지만, 이제 와 되돌릴 수도 없는 일…….

나는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하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집 데이트가 원래 둘이서 같이하는 매력이 있거든요. 제가 준비했으니까…….”

나는 차마 뒷말을 바로 잇지 못했다. 주먹이 바들 떨릴 정도로 수치스럽다.

“폐하께서 이것 좀 직접 가져가실래요……?”

이게 뭐야. 이게 뭐람……!

말해놓고 ‘폐하가 가져가기 싫다 그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의외로 폐하는 선뜻 트롤리를 가져간 뒤, 소파에 다시 앉았다.

“성녀도 이리 와서 앉아.”

그리곤 환히 웃으며 소파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셨는데-!

미소 뭔데. 왜 저렇게 기분 좋으신데-!

저런 웃음으로 옆에 와 앉으라고 하시면, 안 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네.”

나는 홀린 듯 걸어가 폐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

데굴.

“……하.”

커다란 짐볼이 소파에 앉으려 하면 어떻게 되는가.

미끄러지지.

지금의 나처럼.

소파를 노렸던 내 궁둥이는 그대로 바닥에 안착했다.

결계의 안락한 내부 보정 덕분에 원래부터 바닥에 앉으려고 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크흡.’

나는 눈물을 삼켰다.

폐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온 걸 보니, 다 알면서 놀릴 작정이셨던 게 분명했다.

오늘 하루 잘 버텨라, 신아리. 대신 폐하 웃는 거 볼 수 있잖아……!

폐하 즐거워요? 그럼 됐어요.

‘좋게 생각하자.’

솔직히 결계 아니었으면 벌써 곤란할 일이 생겼을걸.

내가 문 꽉꽉 닫힌 방 안에서 폐하한테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아……!

나는 폐하한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 원래 소파에 등 기대고 바닥에 앉거든요! 폐하는 소파에 앉아 계세요! 전 이게 편해서.”

“그래?”

그러자 폐하는 소파 앞 테이블을 밀어 바닥 공간을 넓힌 뒤, 내 옆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러면 나도 이렇게 앉아볼까.”

으악. 바닥 더러운데!

카펫 위에 앉은 폐하의 흰 바지가 그렇게 신경이 쓰일 수 없었다.

깨끗한 천이라도 깔아야 하나 싶었지만, 난 아무것도 집을 수가 없는걸!

결계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다였지. 흑흑.

“왜, 왜 폐하가 바닥에 앉으세요……!”

“오늘은 뭐든 같이 하는 거라며.”

“그건……!”

그냥 핑계였죠!

빨리 소파로 올라가셨으면 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폐하는 트롤리에 있는 다과까지 가져와 바닥에 늘어놓았다.

이렇게 폐하를 누추한 바닥에 앉히는 건 내 데이트 계획에 없었어…….

“집 데이트에 그런 건 없나?”

“……어떤 거요?”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거라든가. 듣자 하니 연인들은 그런 것도 한다던데.”

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진짜 연인이나 할 법한 짓(?)을 하자고 하시는 건가……! 우리는 위장 연인, 계약 연애 중일뿐인데!

그보다. 내 심장……. 괜찮냐! 그런 거 해도 괜찮을까!

“자.”

폐하는 헬리의 야심작인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내게 내밀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없을 상황에 고개가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내 입안으로 케이크가 들어올 일은 없었지.

“……알고 이러신 거죠.”

젠장.

나는 결계에 막혀 멈춘 포크의 끝을 주시하며 말했다.

복에 겨운 상황에 내 몸은 잠시 내 탱탱볼 상태를 잊을 수 있다고 쳐도, 폐하가 그럴 리는 없을 테니까!

포크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으면 한숨까지 쉬시고.

그런데 먼저 놀리신 건 폐하 아닌가!

슬쩍 올라오는 억울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결계가 움직이고, 접시 하나가 결계에 밀려 폐하 앞으로 갔는데.

그것도 억울한 거 있지.

나는 폐하의 무릎 옆,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건 제가 드리는 거니까 알아서 드시던가요.”

“……이걸……. 하, 성녀가……?”

“네. 먹여 드려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제가 손을 못 써서요.”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결계 안에서 손을 파닥였다.

그랬는데.

바닥에 앉아 그런 나를 구경하던 폐하의 입매가 보기 좋게 움직이며 그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뭐, 뭐지!’

순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가 찐으로 웃음을! 배에 손까지 올리면서 웃음을!

게다가, 고막을 타고 머릿속까지 흘러들어와 온몸을 정화 시키는 듯한 이 청량한 웃음소리는!

‘설마!’

나는 숨이 멎을 각오를 하고 폐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보는…….’

끅끅거리는 웃음, 열이 올라 붉어진 뺨과 입술, 살짝 주름 잡힌 콧잔등, 반달 모양의 눈은 또 어떻고-!

폐하 눈꼬리에 맺힌 건 액체로 된 보석인가.

아아,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건 이걸 보기 위해서였구나.

세이칸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었나 했더니 이 장면을 위해서였던 게 분명했다.

나 지금 세상을 떠난다 해도 여한 없이 떠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내가 어디 소설 속 주인공이었으면 이게 엔딩 장면이 아닐까.

“여기가 내 인생의 종착역…….”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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