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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89화 (89/150)

89화

“어디 차이지 않게 잘 매달려 있어 봐.”

샤를은 알렌드의 신경을 긁은 뒤, 후련하단 얼굴로 쿠카를 떠났다.

샤를의 공격은 잘 먹혔다.

아직도 그 대화가 날파리처럼 알렌드의 귓가에서 앵앵거렸으니.

“전 평생 폐하 얼굴만 보고 살면 되거든요.”

성녀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언제든 예고 없이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나마 미인을 좋아하는 성녀의 남다른 취향 덕분에 성녀가 제 외모를 떠나지 않을 확신이 조금은 있었지만.

샤를 왕녀 같은 대체품이 있다고 생각하면 불안이 치밀어 올랐다.

성녀가 젠달을, 제 곁을 떠나고 싶다고 선언하면 막을 수 없는 게 그의 위치였으니까.

‘앞으로 이 주…….’

제가 성녀와 계약 연인이 되기로 한 기한 중 남은 기간이었다.

성녀의 감정을 매듭지으려 시작한 위장 연애에서, 제 마음을 자각할 줄은 몰랐으나.

‘겉으로 드러내선 안 되는 마음이다.’

사랑스럽기에 소중하다. 소중하기에 연인이 될 수 없다.

언뜻 들으면 모순된 생각이지만, 알렌드는 그게 옳다고 여겼다.

그가 성녀를 데려온 세계는,

“나들이 한 번 더 가요!”

고작 나들이 한번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 되었으니.

그렇게 기뻐하며 말했는데.

변절자가 황도에 나온 이상, 성녀를 황궁 밖으로 내보낼 순 없었다.

안전한 루트가 확보되는 대로 성녀는 니세포르엘 신전에 보내야 한다.

그리고 데르아치와의 전쟁을 끝낸 후…….

“폐하? 어디를 가십니까?”

알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에본이 물었고, 헨켈이 그런 알렌드의 뒤를 쫓았다.

“성녀께 다녀와야겠네.”

초조함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금 당장 성녀가 무사히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알렌드는 다급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나들이 취소요?”

폐하는 내 방 거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얼굴로 찾아오셔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가 했더니.

황궁 밖은 위험하니 나들이를 못 갈 것 같다는 소리였다.

“그래.”

“그럼 황궁 밖으로 안 나가면요?”

나는 테이블 위, 폐하가 사인해 준 포토 카드들을 챙기며 대안을 내밀었다.

황궁 밖으로 못 나간다고 해도 쉽게 포기할 순 없지.

폐하를 꼬시는 데 실패하면……! 이게 내 마지막 데이트 기회가 될지도 모르잖아!

서로 좋아하는데 왜 사귀질 못하나, 왜!

“……황궁 안에서는 괜찮지만. 황궁 내에 갈 만한 곳이 없을 텐데.”

폐하만 모르지, 황궁엔 연인들을 위한 데이트 명소로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긴 했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건 거기가 아니었지.

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집 데이트. 어때요?”

“집 데이트?”

“실은 제 데이트 로망 중 하나가 집 데이트였거든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간…….’을 다짐했었지.

같이 밥 해 먹고, 수다 떨고, 노트북으로 영화 보고, 손잡고……!

취소, 취소. 손잡고는 망상 취소합니다.

스킨십 관련 항목은 꿈도 꾸지 마라, 내 신체들……!

우리 폐하는 내가 지킨다.

“집 데이트……. 어떻게 하는 거지?”

“그냥 뒹굴뒹굴하는 건데요.”

“뒹굴?”

뒹굴이라는 말이 생소한 듯 폐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빈둥빈둥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밥 먹고 놀고…….”

“인간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역시 이 나태함의 적.

미라클 모닝이 뭐냐. 폐하는 새벽부터 밤까지 아주 미라클하신데.

삶뿐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미라클이지.

이런 완벽한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꿈인가? 설마 폭우에서 쓰러진 날 이후로 계속 꿈이었나!’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아줘…….

라니. 정말 믿기 힘들지만, 여기가 현실이다.

“그럼 제가 심심하시지 않게 오락거리 몇 개 준비해놓을게요! 폐하는 몸만 오세요, 몸만.”

영화는 당연히 안 되니 체스 같은 보드게임도 좋을 거 같고,

그런데 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에 빠져있던 폐하가 물었다.

“……내가 어디로 가는데?”

“당연히 제 방이죠?”

집 데이트라고 해봤자, 황궁에서 그런 기분을 낼 만한 곳이 내 방밖에 더 있나.

하지만 폐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별로 좋은 발언은 아닌 거 같군.”

“왜요?”

“성녀의 방에서 데이트하는데 몸만 오라……?”

그렇게 말하는 폐하의 귀 끝이 살짝 불거져 있었는데, 그걸 목격함과 동시에 내 얼굴도 화르르 붉어졌다.

방 한쪽에서 호위를 보던 헨켈 대장은 카디얀한테 이끌려 방 밖으로 나가고 있었고…….

아니, 자리 안 피해줘도 되거든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폐하의 몸을 노리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에 서둘러 설명을 보충했다.

“무,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건전한 집 데이트 문화를 추구하거든요!”

그럼. 불과 몇 분 전에도 나한테 신체접촉은 꿈도 꾸지 말라 엄포를 놓은 건전한 사람이라고. 내가!

“누가, 뭐라고 했나?”

와. 부끄러워서 헛기침하시는 것 좀 봐. 나 오늘 귀한 거 본다.

“안 믿으시는 거죠? 제가 성녀 이름 걸고 맹세하는데, 그날 폐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자신 있거든요. 절.대.로.요.”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폐하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지만.

나는 왜 폐하 심기가 불편해진 건지 신경 쓸 정신도 없이, 내 결백을 주장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폐하께서 걱정되시면 장소는 프로딘타 궁 응접실로 정해도 좋고요.”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지 않아도 될 거 같군.”

폐하는 어느새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우고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생긋 웃는 폐하의 눈에 그늘이 져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내가 누구와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 이성을 잃을 일은 절.대.로. 없어서.”

지금 그런 소리 들은 기분인데.

무인도에 영원히 둘만 갇히게 돼도 너랑은 절대 안 돼, 같은!

“오오, 그러세요?”

그럼 이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는 누구 거람!

……내 심장 소리잖아.

하여튼 여기서 질 수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안 건드리겠다는 서약이라도 썼겠지만, 지금은 폐하도 날 좋아한단 걸 안단 말이지.

오기가 생긴다.

“아까 제 어깨에 얼굴 기대고 저 막 품에 안으셨던 분은 폐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나.”

나는 다 들릴 정도의 크기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폐하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얼굴이었지만, 난 아직 할 말이 남았다.

“그리고 누구랑 다르단 말은 취소해주실래요. 저도 자신 있거든요. 폐하랑 둘만 밀실에 갇혀도 안 건드릴 자신.”

대신 결계 안에 내 몸을 좀 가둬야겠지만.

그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니까……!

“……다행이군.”

오기가 생긴 건 폐하도 마찬가지인지, 폐하의 미소 짓는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성녀도 그렇게 해줄 수 있다니. 하루 동안 서로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겠어.”

“하루가 뭐예요. 전 삼 일도 가능한데요.”

“……일주일.”

“그럼 전 일주일 받고 반나절 더.”

“…….”

“…….”

소파에 마주 앉은 우리는 작은 신경전을 벌이며 눈싸움했다.

물론, 내가 주시하고 있는 건 폐하의 미간이었지만.

“……폐하, 언제 시간 되세요.”

“언제든.”

“그러면 내일모레가 주말이니까 모레 낮에 제 방으로 오세요. 몸. 만.”

“그러지.”

“먼저 손대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제가 질 리는 없겠지만.”

“그거야, 봐야 아는 일이지. 참고로 난 지금껏 아무한테도 져본 역사가 없어.”

“그 역사, 내일 깨지게 되겠네요.”

“그건 성녀 생각이고.”

그렇게 폐하와 나의 집 데이트 날짜가 결정됐다.

***

“아, 라울 신관님. 허퍼슨은 오늘부터 휴가죠?”

“허허, 그렇습니다.”

내일 결전에 관해 허퍼슨한테 조언을 좀 받아볼까 했는데.

허퍼슨이 오늘부터 2주간 휴가를 간단 걸 잊고 있었다.

“대단한 일을 하셨더군요. 변절자를 막으셨다니.”

“에이, 아니에요. 폐하가 다 하셨는데요.”

“성녀님께서 시간을 벌어주셨다 들었습니다.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죠. 대단하십니다.”

“너무 띄워 주시는데요……. 부끄럽게.”

라울 신관님은 흐뭇한 얼굴로 칭찬을 해주고, 나는 그 칭찬이 은근히 싫지 않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청소를 끝낸 뒤, 프로딘타 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면 돌려줘야 하는데.”

어제 정신없이 오는 바람에, 그 꼬마한테 빌린 가면 돌려주는 걸 잊었다.

‘가면 주인을 어디서 찾지?’

하필이면 만난 곳이 인파 가득한 광장 한복판인데다가, 통성명도 못 했다.

수소문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카디얀?”

저 멀리 바쁘게 걸어가는 카디얀의 뒷모습이 보였다.

카디얀한테 어린애를 맡겼었으니,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카디얀한테 물어볼까?

“슬린 경, 저 좀 어디 들렀다 가도 돼요?”

“당연히 됩니다.”

그래서 카디얀을 쫓아 열심히 걸어갔는데, 걸음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빠르네, 카디얀.

도착지는 기사단 건물 중 훈련장이 있는 곳이었다.

‘훈련하는가 보네, 그럼 방해하지 말아야…….’

“외칩시다. 변절자는 잡아 족친다.”

“잡아 족친다!”

닫힌 문 앞에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기사들이 외치는 것인듯한 우렁찬 기합이 들렸다.

멘트 살벌한 걸 보니 기합을 실전용으로 하나 보다.

안에서 또다시 선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은 우리가 지킨다!”

“우리가 지킨다!”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날 지켜?”

“성, 성녀님. 잠시…….”

호기심이 일었다.

슬린 경이 뒤쪽에서 쭈뼛거리며 날 말렸지만.

나는 이미 문고리를 돌린 뒤였다.

“……지각자입니까.”

문을 살짝만 열어 안을 살필 생각이었는데, 누군가의 예민한 목소리가 나를 지목했다.

단상 위에 선 남자였다.

부자 가문의 장남으로 자랐을 거 같은 인상, 고급스럽고 단정한 차림새, 포마드로 올린 금발,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 같은 분위기.

기억난다. 제1 기사단의 에드워드 부단장이었나?

“……아, 안녕하세요.”

“……!!”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수십 명의 사람이 나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했다.

당황한 에드워드는 지휘대를 넘어트렸다.

카디얀도 보이고, 중간중간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는데…….

‘……그냥 못 본 척하고 나갈까?’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왜냐면, 나 지금 못 올 곳에 온 거 같단 말이지.

단상 뒤, 벽에 걸린 익숙한 얼굴의 거대한 초상화.

검정 머리, 검정 눈.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 보정의 신이었는지, 미의 여신이라고 해도 믿겠다. 진짜 누군데, 저거!

“하하…….”

나는 굳어있는 사람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가 그 유명한.

“성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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