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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88화 (88/150)

88화

정수리에서 꽃향기 나는 사람이 본 적 있어요? 전 있어요.

미쳤다. 내가 지금껏 향기를 맡았던 꽃들은 죄다 조화였던 게 분명했다.

힐링하러 왜 경치 좋은 산까지 올라가나.

폐하 정수리 근처에서 숨 한 번 쉬면 거기가 수목원이고 휴양림인데.

“……뭐해.”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

폐하는 찜찜해 하는 것 같았지만, 이마를 떼지 않았다.

대신 원하는 걸 조르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여셨지.

“그래서……. 신성력 계속 사용할 거야?”

“아뇨.”

신성력이 뭐죠.

저 애초부터 개살구 성녀였는데요.

폐하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사용할 건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탕. 또 있나? 봐봐. 없잖아.

“그리고…….”

폐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큰일이다. 지금 상태면 폐하가 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줄 거 같은데.

‘신성력 사용 금지 말고 또 어떤 걸 부탁하시려고……!’

폐하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뿐이었다.

내 몸은 현 상황에서 벗어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그렇지만 완전 이해하지.’

내 어깨에 폐하 머리가 있고, 폐하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고!

얼마나 복 터진 상황인지 인지하고 나니 숨이 가빠 올랐다.

여기서 콧김, 입김이라도 내면 폐하가 이마를 뗄지도……!

그래서 전력 질주로 지옥철에 탄 사람처럼 천천히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조만간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역시나. 폐하의 입에서 나온 건 썩 반가운 소리가 아니었다.

이게 다 망할 변절자 때문이다.

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신전행이라니……. 흑흑.

***

“이상한 일입니다. 변절자가 황도까지 왔다면 출발한 곳에서부터 검은 땅을 끌고 왔을 텐데, 히펜 광장과 주변의 대로 한 곳 외에는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치 변절자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황제의 집무실.

제2 기사단 단장, 카펜터는 오늘 낮에 있었던 사고조사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책상에 앉은 황제는 앞에 선 카펜터를 향해 질문했다.

“최초 목격자는 찾았는가?”

“히펜 광장의 환경미화부입니다. 16번 골목에서 나오는 놈을 보고 정신없이 도망쳤다더군요.”

“……그랬군.”

황도의 중심 광장인 히펜 광장은 다른 구역과 이어진 골목이 많았다.

그중 16번 골목은 가장 길고 미로처럼 얽혀있어 유입경로를 특정하기 힘들었다.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쥐새끼 같군.’

범인을 특정한 알렌드의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그와 달리 카펜터는 들뜬 기운을 흘리며 근질거리는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나서주시지 않으셨다면 히펜 광장과 주변 주거지는 검은 땅이 돼버렸을 겁니다.”

“……그렇지.”

알렌드는 카펜터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리가 위험한 상황이었으니 알렌드에겐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히펜 광장의 절반과 대로의 일부분.

황도 한가운데 변절자가 일곱이나 나타났는데 피해가 그 정도로 그친 데에는, 성녀의 공이 컸다.

카펜터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짧게 말을 덧붙였다.

“변절자를 둘이나 잡아뒀다길래 평범한 분은 아니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광장의 그 엄청난 인물이 성녀님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카펜터는 머리끝까지 오른 전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홀로 변절자와 맞선 그분이 성녀님이셨다니.

카펜터가 남몰래 성녀를 향한 충성심을 다지는 사이, 황제의 질문이 들어왔다.

“신관들은 결계를 설치하는 중인가?”

“네. 오늘 오후면 모든 검은 땅의 경계를 결계로 에워쌀 수 있을 거라 합니다.”

“정화 기간은 어느 정도로 예상한다던가.”

“하루에 신관 열 명을 투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완전히 정화하는데 9년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한다고 합니다.”

9년.

변절자가 대지를 죽음으로 물들이는 건 한순간이었지만, 그 땅을 정화 데에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신성력이 필요했다.

또한, 땅이 정화될 때까지는 검은 땅을 결계로 덮어 모든 이의 출입을 금하는 것이 중요했다.

“수고했네. 황궁에 대기하는 신성 기사들의 수를 두 배로 늘리고, 황도 순찰 빈도를 세 배로 높이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펜터가 돌아가자, 집무실엔 알렌드와 에본과 헨켈이 남았다.

에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성녀님께서 신성력을 갖고 계셔서.”

성녀께서 변절자와 맞섰다는 소식에 제국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다행히 황제께서 때맞춰 도착하신 덕분에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게 되었다.

더욱 놀랄만한 일은, 신성력이 없는 줄로만 알았던 성녀께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미 사용할 줄 알고 있었던 점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헨켈도 이번 사건을 꽤 걱정했었는지, 에본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드만타 측정기는 왜 그런 측정값을 보였던 걸까요?”

에본이 학자로서 제일 의문을 품는 부분이었다.

[-]란 측정값을 단순한 오류로 생각하기엔, 역사상 이드만타 측정기가 신성력을 잘못 측정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알렌드는 한동안 꺼지지 않았던 이드만타 측정기를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짐의 추측이지만, 성녀께서 갖고 계신 신성력이 측정기가 측정 가능한 수치를 훨씬 웃돌았던 듯하네.”

“그런…….”

이드만타는 신 세이칸이 인간들에게 직접 하사한 광물이었다.

신의 광물인 이드만타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신성력이, 인간의 몸에 담겨있다니.

에본은 반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측정 불가한 이가 세이칸 신께서 보내신 성녀님이 아닌가.

제 상식을 벗어난 일이지만, 신의 일이라면 가능할지도.

더욱이 놀라운 점은.

‘성녀님의 측정값과 달리, 황제 폐하의 신성력은 측정 가능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

에본과 헨켈은 속으로 경탄했다.

인간의 경지를 넘었다고 여겨지는 자신들의 황제보다 더한 신성력이라니.

도저히 그럴 분으로 보이지 않았건만, 범상치 않은 분이셨다.

“폐하 얼굴 최고…….”

이해할 수 없던 평상시 행동도 다 이유가 있는 귀재의 행동으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침묵 속에서, 잠자코 있던 알렌드가 입을 열었다.

“이번 변절자는 데르아치 쪽에서 보낸 걸세.”

“데, 데르아치가……?!”

“……!”

놀란 에본이 말을 더듬으며 채 잇질 못했고, 헨켈도 경악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헨켈이 질문했다.

“그자가 변절자를 조종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변절자를 우리에 잡아 가둔다는군. 그걸 골목에 풀었겠지.”

“변절자를 잡는다니…….”

헨켈의 눈썹 사이가 혼란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에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그자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작정이랍니까……!”

“미친 작자지.”

평소와 달리 황제의 말이 거칠었지만, 둘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데르아치가 벌인 일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도 한복판에 변절자를 풀다니.

그 전에, 황도가 아니더라도. 변절자를 잡아 푼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본이 물었다.

“역모에 가담한 귀족들은 알까요?”

“글쎄. 귀족 중에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모를 일이지.”

이제는 데르아치 편에 선 귀족들에게 연민이 들 지경이었다.

‘변절자’란 존재 하나가 끼어든 순간부터, 미래는 그들이 꿈꿨던 대로 흘러가지 않을 터였다.

만에 하나 역모가 성공해 승리를 거머쥔다 해도, 남은 삶을 언제 내려질지 모르는 세이칸 신의 저주에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테니.

어쩌면 승리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부귀영화가 아닌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땅일지도 몰랐다.

“데르아치 대공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검은 땅으로 뒤덮인 멸망한 제국의 황좌에 오를 작정이기라도 한 건지.

에본의 말에 알렌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적어도 오늘 의도는 뚜렷했네. 제국민들에게 ‘세이칸 신의 저주’를 체감하게 했으니.”

상황을 짐작한 에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오늘 폐하께서 제국민들 앞에서 성녀님의 정체를 밝히신 건…….”

“세이칸 신이 황도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면 제국민들의 원성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향하겠는가.”

“성녀님이겠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헨켈의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알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드는 팔꿈치를 책상에 세워 양손으로 깍지 꼈다. 그의 싸늘한 벽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감히.’

누굴 노린단 말인가.

샤를 왕녀가 말한 대로 데르아치는 변절자를 잡아다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성녀가 다쳤더라면, 변절자들이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게 했다면.

알렌드는 지금까지 계획해온 모든 것을 버리고 데르아치의 목을 치러 갈 작정이었다.

“서명 다 했어.”

쿠카 마을에서, 알렌드와 샤를은 일시적 동맹 계약을 맺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으니 계약 위반 시 발동하는 제약을 믿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동맹을 맺고, 샤를이 보니아 왕국으로 떠나기 직전.

샤를은 뜬금없이 성녀를 언급했다.

“그쪽, 정말로 성녀랑 연애해?”

“계약에 하나 더 추가하지. 왕녀 입에서 성녀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 걸로.”

“하, 너무 쪼잔해서 말이 안 나오네.”

“잘만 말하는데.”

“됐어.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으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니까. 경고 좀 해두려고.”

“왕녀가 경고라.”

가당찮다는 듯 자신을 보는 그에게, 샤를은 웃으며 응수했다.

“우리 집 첫째 놈이랑 그 냄새 나는 뱀을 처리하고 나면, 보니아도 꽤 안정될 거 같거든. 그때 그쪽이 헤어졌으면 성녀는 내가 데려가려고. 내 외모도 성녀한테 꽤 효과 있는 거 알아?”

하필이면 알렌드가 신경 쓰는 부분을 마지막에 건드리며.

그래서 왕녀가 더 다른 하이에나 같은 놈들보다 거슬리는 것이다.

성녀가 왕녀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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