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다행히 폐하는 내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언급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숨 쉬는 게 이렇게 매력적이고 예쁠 일인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 미쳤어.
“걱정하셨어요?”
“그래.”
겉으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폐하의 심장은 평상시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누가 우리 폐하 이렇게 놀라게 했나!
……나지.
계기야 어찌 됐든, 실제로 세이칸 신 보러 가는 건 아닐까 생각도 했었고.
내 신성력으로 일이 잘 풀릴 거라 여긴 안일함 때문에 그런 상황에 부닥친 것이기도 했으니.
“죄송해요.”
“내가 사과받을 건 아니지. ……하지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신 없었으면 좋겠군.”
폐하는 고개를 올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붉고 아름다운 입술 사이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녀의 목숨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마.”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푸른 눈동자.
확답해 주길 바라는 그 눈빛에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지.”
그제야 폐하는 한 손으로 겉옷을 벗어 내 어깨를 감싼 뒤, 검은 땅을 걸었다.
목적지는 광장의 가장자리.
피해를 보지 않은 그 땅 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검은 땅의 경계에 다다르기 직전, 나는 폐하에게 속삭였다.
“폐하, 저 이제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부터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광장이 들썩일 정도의 커다란 환호성에 내 뒷말이 묻혔다.
“와아아아-!”
“저 소녀가 우리를 구했어!”
“본인 몸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우리를 구한 거야!”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니, 흡사 월드 스타라도 된 기분이었다.
폐하가 앞으로 걸어나가자, 인파가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쫙 갈라졌다.
그러자 신속하게 움직인 경비병들과 기사들이 맨 앞 열을 통제해 길을 만들었다.
폭 2m 정도 되는 일직선의 길은 화려한 황궁 마차와 이어져 있었다.
“젠달의 영웅!”
“영웅이다!”
폐하는 길을 걷고, 나는 그 품에 안기고, 양옆에선 열광한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나오고.
오오, 알았다.
이건 월드스타가 아니라 금메달을 3개쯤 따고 고국으로 금의환향한 스포츠 스타구나!
‘대박. 진짜 창피해……!’
다들 변절자들한테 구경감 신세가 됐던 내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있다가 폐하한테 구해진 게 다인데!
이렇게 나한테 쏠린 환대, 너무 부담스럽다 이거지……!
물론 폐하를 찬양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영웅이라 말하는 소리가 더 컸다.
가면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새빨개진 내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을 테니까.
여러분, 환호성은 제가 아니라 폐하한테 부탁합니다.
여기 계신 천사님이 절 구해줬다니깐요!
“황제 폐하, 그 은인은 누구십니까!”
마차까지 가는 길의 중간쯤에 왔을 때.
커다란 목청과 배짱을 가진 누군가가 폐하에게 직접 질문했다.
그러자 다들 내심 내 정체가 궁금했는지, 그 수많은 사람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폐하는 겉옷을 올려 내 머리끝까지 덮은 뒤, 나를 품에 단단히 가두고 입을 열었다.
“……성녀이시다.”
사방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적막이 감돌았다.
커다란 충격에 빠진 듯도 했다.
뭐, 뭐지. 성녀가 생각보다 약해빠져서 실망했나.
아니, 그보다 나 지금 갈색 머리잖아……?
‘검정 머리 버프도 없는데……! 가짜 성녀라고 몰리면 어떻게 하지!’
일단은 더 가려보자.
서둘러 후드처럼 쓴 폐하의 겉옷을 내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는데.
향수 뭐 쓰시지. 냄새 완전 좋아. ……가 아니라.
‘정신 차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나는 어느새 마차 안에 앉혀졌다.
폐하가 남은 거리를 단숨에 걸어온 덕이었다.
마차 문이 닫힐 때까지도 사방이 고요했다.
가면을 벗은 나는 맞은편에 앉은 폐하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잘못한 거 있어요?”
“잘못?”
“제가 성녀라니까 너무 조용해ㅅ…….”
와아아아아아아!
“으악!?”
나는 깜짝 놀라 창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함성이었다.
황도 전체가 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차 안에서도 땅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성녀님 만세!”
“만세, 만세!”
감격, 환희, 행복, …….
사람들의 함성에, 온갖 감정이 뒤섞인 열기가 고스란히 담겨 나왔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제국민들이 성녀한테 찬사를 보내는 중이지.”
“가짜 성녀 취급당할 줄 알았는데…….”
“가짜?”
“광장도 못 지키고……. 지금 전 갈색 머리니깐요?”
지금이라도 염색약의 효과를 중화시키는 약을 먹어두고 검은 머리로 다시 모습을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나중에 누군가 성녀님인데 왜 갈색 머리였냐는 의문을 품으면 어떻게 해!
폐하가 거짓말쟁이란 소문이 돌 수도 있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꼴은 못 보지!
심각한 고민을 하던 중, 폐하의 황당하다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광장을 못 지켜? 정말 성녀는 본인이 무슨 일을 한 건지 모르는 모양이군.”
“네?”
“아니야. 아무것도.”
그렇게 말한 폐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검정 머리가 아니라고, 누가 성녀를 가짜라 의심하지?”
“네?”
“내가 직접 성녀이시라 말했는데.”
어디 감히 황제의 말을 믿지 못하는 자가 있냐는 듯한 저 자신감 넘치는 말투.
그런 폐하의 자신감처럼, 움직이는 마차를 쫓아오는 사람들의 함성은 전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젠달의 영웅이라던데.”
“으…….”
크흡. 사람들이 폐하의 말을 믿으면 믿는 대로 문제였다.
이제 소문 다 나겠지!
성녀님이 성녀님 가면 쓰고 영웅놀이 했다고……!
우연히 그렇게 된 거지만, 남한테 밝힐 수 없는 취미생활을 들킨 낯 뜨거운 심정이랄까.
폐하는 얼굴이 잔뜩 빨개진 날 보고 피식 웃었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지 그래. 아예 축제 때 쓰는 지붕 없는 마차를 준비할 걸 그랬나?”
“놀리지 마세요…….”
제발 가면 쓴 성녀 이야기가 황궁까지 안 퍼져야 할 텐데.
라고 바라봤자 부질없는 일이겠지.
오늘 안에나 안 퍼지면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동안 마차 안에서 폐하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억울할 건 아니었고, 내 소소한 말대꾸가 초래한 일이었달까.
“그래도 세 번째 변절자만 안 나타났으면 제가 잡아둘 수 있었다니깐요.”
위기의식 없는 내 발언에 폐하가 참고 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그 안으로 들어갔느냐, 왜 신성 기사들을 기다리지 않았느냐, 목숨이 위험하지 않았냐…….
나 아직 두통도 안 가라앉았는데 쉴 새 없이 말씀하시다니.
크흐. 너무 좋아…….
웬만한 두통약보다 폐하 목소리가 더 효과 있는 거 같은데.
게다가 잔소리는 거의 처음 아닌가!
괜히 좋아하는 티 냈다가 상 준다 생각하시고 입 다무실라.
나는 일부러 듣기 싫은 척 눈을 감고 미간을 구겼다.
“……앞으로 신성력은 사용하지 마.”
“네?”
아차, 너무 구겼나.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괘씸죄로 신성력 사용금지 처분이 내려진 건가……!
나는 눈빛에 억울함과 애처로움을 담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지 사용 금지예요?”
“반지는 괜찮아. 보호 결계 역할밖에 못 하니까. 하지만 성녀의 신성력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
“헉. 저 신성력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시아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아, 초비한테도 신성력 있다고 말했나? 하여튼.
어쩐지 반지로 공격계 신성력 사용해도 아무 말 안 하시더라니.
‘역시, 폐하.’라며 감탄하고 있었는데, 폐하의 입매가 불만스러운 듯 아주 살짝 비틀려 있었다.
최근에 발견한 나만 아는 폐하의 버릇이랄까.
역시 덕질은 파도 파도 끝이 없…….
“……왜 시아나 프라단한테만 말했지?”
나 지금 두통 싹 다 날아갔다.
폐하 입에서 방금 나온 말, 질투지? 질투 맞지……!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려고 했지만, 참아라. 신아리.
아직은 내가 폐하 마음을 알고 있단 티를 내면 안 되거든……!
또 급발진으로 내 앞길을 막을 순 없지.
폐하와 나의 찬란한……!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요.”
“……뭐?”
“……라고 시아나가 본인 친척 언니의 결혼 계획을 물어봤는데, 그때 여차여차해서 신성력이 있단 걸 말하게 됐지 뭐예요.”
와씨. 놀라라.
나 지금 자연스럽게 넘어갔지?
사실은 보니아 왕국에 돌아온 직후, 반지에 왜 공격 기능이 있는지 상담하다 시아나가 알게 된 거지만.
진짜 이놈의 주둥아리……!
지퍼 하나 달아놔야 한다니까.
“프라단 후작가의 친척이 결혼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어, 음. 계획이니깐요! 계획! 먼 미래에 할지도! ……안 할지도!”
크흡. 끌어들여서 미안, 시아나.
이따가 시아나한테 폐하한테 이런 헛소리를 했다고 말해놔야겠다…….
폐하의 눈빛이 미심쩍다는 빛을 띠었지만, 증거도 없으니 시치미나 떼자.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구경하는 척했다.
황궁을 에워싼 작은 숲으로 들어왔는데도 마차를 쫓아오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런데.”
폐하는 살짝 튼 내 옆모습을 바라보다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위, 위험하게 왜……!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신경은 폐하 쪽으로 쏠리고 난리가 났지.
동공 지진이 일어난 건 말할 것도 없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무, 무슨 대답요?”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대답.”
“어…….”
나는 말꼬리를 늘렸다.
폐하가 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동안 신성력을 유용하게 써먹었던 일들이 많아, 쉽사리 그러겠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있잖아요, 폐하. 저 신성력 나름 세거든요. 쓸모도 많고. 그러니까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보단 조금은 사용할 수 있는 편이 낫지 않을…….”
“신아리.”
세상에. 지금 내 어깨에 닿은 거 폐하 이마냐. 내 어깨 오늘 무슨 일이야.
게다가 내 얼굴 옆에 있는 건 폐하 정수리고?
혹시나 누가 보고 오해할까 하는 소리인데,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
얼굴각도 조절도 뭐고 안 했는데 내 코 옆에 폐하 정수리가 있더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후각은 내 의지로 막고 어쩌고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냥 맡을 수밖에 없지…….
“흐, 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척하며 숨을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