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경계 밖, 카디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쉬익-.
뒤이어 카디얀이 던진 검이 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검 끝이 향한 곳은 8시 방향의 사각지대.
소리 없이 내 쪽으로 접근하던 변절자가 있었다.
몇 발자국만 더 걸어왔으면 눈빛 교환도 가능할 뻔.
아, 쟤들은 눈이 없지. 방금 생각한 거 취소다.
“……끄어…….”
카디얀의 검은 정확히 변절자의 몸에 닿았지만, 공격이 통한 것은 아니었다.
검은 변절자에게 닿자마자 검게 부식되어 조각조각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두 마리에 이어 세 번째 변절자라니.
“이렇게 계속 나오는 건 아니겠지……?”
순간 영화에서 봤던 좀비 떼가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저것부터 가둬놔야 했다.
지금까지 별문제 없었으니 하나 정도는 더 가둘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한테 다가오는 변절자를 향해 반지를 살짝 기울였는데.
“으-ㄱ.”
깨질듯한 두통과 참기 힘든 구역감이 내 몸을 덮쳤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
아, 이거 알지. 알아.
청력이랑 시력 오랫동안 풀가동했을 때 오는 부작용이잖아.
마차에서 지금껏 쭉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펑펑 쓴 거라 할 말은 없긴 한데, 그래도 진짜 타이밍…….’
새로운 구속 결계를 만들기 위해 반지에 옅게 모였던 신성력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땅이 하늘에 있고 하늘이 땅에 있는 듯, 방향 감각마저 엉망으로 만드는 어지러움.
머릿속 혈관이 욱신거리며 뛰는 소리가 고막을 메웠다.
퍼억.
잠시 휘청이는 사이, 거리를 좁힌 세 번째 변절자가 내 보호 결계 위에 목탄 같은 손을 얹었다.
“으어…….”
이렇게 코앞에서 보고 싶진 않았는데.
진짜 대낮이어서 다행이지, 완전 무섭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내 시야 속, 입만 뚫린 검정 달걀귀신이 울었다.
***
“지독한 자식!”
젠달 제국 제2 기사단의 단장, 카펜터는 잘린 머리가 재생되는 변절자를 보며 고함을 질렀다.
20여 분 전.
히펜 광장에 변절자가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마침 대기 중이던 제2 기사단의 신성 기사들이 황궁에서 출발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으나, 광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이 묶였다.
원인은 검은 땅.
변절자는 광장과 이어진 대로를 죽음으로 물들이며 나타났다.
“이놈은 내가 맡겠다. 너희는 광장으로 가!”
카펜터는 부하들을 광장으로 보내려 했지만, 변절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넷…….
황도 한복판에 변절자가 무려 넷이나 나타나다니.
상대하기 벅찬 수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사역마였다.
지난번처럼 사역마를 부리는 놈이 있어, 이곳에서 사역마를 소환하기라도 한다면.
자신들이 손쓸 새도 없이, 수많은 제국민의 목숨이 하루살이처럼 사라질 게 분명했다.
전력을 다해 눈앞에 보이는 놈들부터 신속하게 없애야 했다.
카펜터는 자신과 함께 온 아홉 명의 부하에게 외쳤다.
“영혼석의 위치를 찾기 까다로운 녀석들이다! 탐색이 힘들면 잘게 자르든, 폭파를 시키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파괴해!”
“알겠습니다!”
제2 기사단의 신성 기사들은 3명씩 조를 이뤄 빠르게 변절자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변절자들의 몸은 재생됐고, 기사들의 마음은 조급해져 갔다.
사역마와 계약한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광장에 나타난 변절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길을 막고 있는 한 놈만이라도…….’
기사들은 카펜터가 홀로 상대하고 있는 변절자를 한 번씩 힐끔거렸다.
“끄어…….”
“이 냄새 나는 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와서는.”
카펜터는 대치 중인 변절자를 향해 신성력으로 날카롭게 간 검을 세웠다.
그 또한 광장을 생각하며 초조해지긴 마찬가지였지만,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조금 전, 제국민들의 피신을 돕던 경비병 하나가 광장의 상황을 그에게 알려준 덕이었다.
평민 복장을 한 젊은 여인이 혼자서 변절자 둘을 구속 결계에 가둬놓고 있다고.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상당한 실력가다.’
변절자를 가둘 정도로 강력한 구속 결계.
그런 것을 한 번에 두 개나 다룰 수 있는 이는 니세포르엘 신전 출신의 신관들 정도였다.
젊은 여인이라니 니세포르엘 출신은 아닌 듯하고.
만약 소속된 곳이 없다면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당장 제 기사단으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인재였다.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군.’
설마 변절자를 상대한 적 없는 초심자인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카펜터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초심자가 어떻게 변절자를 가둔단 말인가.
‘그래도 서둘러야 한다.’
하나 그렇게 대단한 실력가라고 한들, 혼자서 둘을 상대하기엔 한계가 있을 터였다.
절망을 찬란한 금빛으로 비추는 그분이 아니고서야…….
“조금만 더…….”
눈앞의 이놈만 처리하면 부하 몇을 광장으로 보낼 틈이 생긴다.
카펜터는 이를 악물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가면을 쓴 가녀린 체구의 젊은 평민 여성.
당장 그녀를 도우러 가지 못하는 답답함에 변절자를 상대하는 카펜터의 검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조금만 더 버텨주게…….”
***
“이게 뭐람…….”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위를 바라봤다.
세 번째 변절자는 내 보호 결계를 뚫진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눈치 없이 찾아온 두통 때문에 기존에 펼쳤던 구속 결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턱. 턱. 터업.
결국 결계가 풀려 자유의 몸이 된 변절자 두 마리마저 이쪽으로 걸어와 내 보호 결계에 몸을 얹었다.
“으어…….”
“……우어어…….”
“끄어어…….”
“아……. 진짜 좀…….”
구 모양의 투명한 결계에 변절자 세 마리가 찰싹 붙어서 소리를 내는 꼴이 꽤 우습게 됐다.
이것들아…….
내가! 너희들 구경하라고 인간 탱탱볼 신세가 돼 있는 줄 아냐!
숯덩이가 된 이목구비에서 눈과 코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고, 입 구멍만 뚫려 괴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저 모습 때문에 더 토 나올 거 같아. 우웩.
“아, 죽을 거 같다.”
변절자들한테 너무 얼굴 붙이지 말라고 한마디씩 해주려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 있을 수가 없네.
머릿속이 망치로 철근을 때리는 것처럼 깡깡 울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가만 보니 저것들이 손가락 끝으로 결계를 깍깍 긁고 있는데, 그래서 더 골이 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쩌저적.
설상가상으로 들려오는 이 불길한 결계에 금가는 소리.
“죽어라!”
옛날에 윅인가 윙인가 하는 끈기 넘치던 아저씨가 생각나고 그러네.
그때처럼 결계가 깨지면 바로 검은 땅에 발 닿는 건가.
아니, 그 전에 힘껏 몸을 밀고 있는 쟤네한테 깔릴지도.
아래는 검은 땅, 위에는 변절자.
그 가운데 눌린 난 새카맣게 탄 패티 신세가 되는 건가……!
‘패티처럼 형태라도 남으면 다행이지.’
카디얀의 검처럼 부식돼 산산조각이 나거나, 검정 슬라임처럼 녹아 땅에 스며들지도 몰랐다.
크흡. 그렇게 죽으면 영혼은 남나! 황궁 지박령은 할 수 있나!
혹시 모르지. 간절히 원하면 될지도.
‘세이칸 신님, 영혼은 황궁에 좀 남겨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이 두통만 좀 멎어도 결계를 다시…….
신성 기사들은 언제 오는 걸까.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자, 폐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
나는 가면을 이마 위로 올리고, 허리춤에 퓨를 매단 매듭을 풀었다.
퓨가 내 두 손바닥 안에서 파들파들 떨었다.
나는 그런 퓨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퓨, 너는 어둠이니까 쟤네한테 안 먹히겠지? 그러면 나중에 폐하한테 말 좀 전해줘라.”
“퓨우우-!”
“아니, 듣기 싫다고 하지 말고. 그냥 내가 폐하 많이 좋아했다고 전해주-.”
“그런 건 직접 말하지그래.”
고막이 녹을 듯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매섭게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단단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났다.
결계를 에워싼 변절자들이 검은 먼지처럼 흩어지고, 나타난 검을 들고 선 폐하의 모습.
마치 개기일식이 끝나고 나타난 찬란한 태양 같달까.
윽. 너무 눈부셔.
“폐하?”
나는 손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며 결계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가 검을 집어넣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괜찮나? 이상한 유언은 함부로 남기지 마.”
“유언 아니었는데요?”
“뭐?”
나는 폐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폐하 얼굴 생각하니까 딱! 하고 폐하 목소리가 들리더라니까요. 오셨구나 싶어서 연기 좀 해봤죠.”
“……상당한 연기력이군.”
“그런데 저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가면 때문에 모르셨을 거 같은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자가 성녀 말고 더 있겠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듯했지만, 폐하의 낯빛은 새하얗게 질려 말이 아니었다.
나도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지.
때마침 금이 간 내 보호 결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폐하는 급히 날 안아 들었다.
“으악!?”
이게 무슨 일이지……!
나 지금 폐하한테 고, 고, 공주님 안기……!
당황해 몸을 버둥거리자 폐하가 올라간 가면을 내 얼굴에 씌워주며 말했다.
“발버둥치는 건 나중에 안전한 곳에서 하고. 지금은 땅에 닿지 않게 가만히 있어.”
맞는 소리였다.
이승이 코앞인데, 이러다 발이라도 닿으면 그대로 황천길이다.
나는 폐하에게 안긴 채 몸을 굳혔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라 눈을 굴려봤는데, 폐하의 온몸에서 신성력이 은은하게 빛나는 게.
폐하 천사 맞나 봐.
어깻죽지에 잘린 날개 흉터 있을 게 분명하다니까.
“……신아리.”
“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폐하는 내 어깨에 살짝 이마를 기대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순간 폐하가 기댄 게 내 어깨가 아니라 심장인가 싶었지.
쿵쾅거리고 난리가 났다니까.
이, 이러다 폐하 귀에 심장 소리 들리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