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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85화 (85/150)

85화

쇼웬과 헤어진 후, 마차에 오른 직후였다.

‘델칸?’

저 멀리 보이는 인파 속에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자세히 보려고 했는데, 금세 다른 건물 뒤로 사라졌다.

‘잘못 본 거겠지?’

시선을 뺏길 만큼 잘생긴 뒷모습이긴 했지만……!

델칸이 왜 여기 있겠어.

보니아 왕국에 있겠지.

“리리 님? 저쪽에 뭐가 있습니까?”

마차 바깥에서 문을 닫으려던 카디얀이 물었다.

“음, 아뇨. 잘못 본 거 같아요.”

“그럼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네. 좋아요.”

문이 닫히고, 마차는 황궁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섰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나는 창문을 살짝 열고 마부석에 앉은 카디얀에게 물었다.

“카디얀, 무슨 일이에요?”

“아, 다른 마차가 끼어들어서요. 곧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카디얀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도 마차 앞의 상황을 보고 싶었는데, 카디얀과 마부의 등에 시야가 가려졌다.

뭐, 별일 아니겠지. 라는 생각에 창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마부석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우회하지.”

“네.”

비장함이 감도는 분위기.

마차가 끼어든 것 말고 다른 일이 있나? 창문을 다시 열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절자다! 변절자가 나타났다!”

“어째서 이곳에, 죽음이……!”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비명이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마부석의 대화를 자세히 들으려 청력을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거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지금 내 위치에서 몇 블록 떨어진 장소에서 벌어진 상황.

‘변절자라니.’

마치 재난 영화를 소리로만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리에 심장이 덜커덩 멎는 기분이 들고 피부에 쭈뼛 소름이 돋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란 생각이 들어서겠지.

‘내 신성력으로 막을 수 있을까……?’

검지에 낀 반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변절자는 땅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존재입니다. 죽음에 먹힌 검은 땅 위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생물체는 없죠.”

“마주쳤을 때 대처법은요?”

“무조건 도망치세요. 최대한 멀어지는 게 답입니다.”

에본 재상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변절자는 위험한 존재였다.

더욱이 변절자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기사들뿐.

‘……내가 섣불리 움직이면 폐하가 곤란할 거야.’

변절자와 맞서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중 누군가는 내 얼굴이 성녀와 닮았다는 의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난 변절자랑 싸우는 법도 모르잖아.

괜히 갔다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경비병! 신성 기사들은 언제 오는 건가!”

“지금쯤 황궁에서 출발하셨을 겁니다! 일단 피신을!”

그래, 얌전히 있자. 신아리. 기사들은 빠르니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내가 나서지 않아도 돼.

나는 들썩이는 몸을 애써 의자에 붙이며 자기 합리화에 들어갔다.

그런데 귀가 따가웠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저것들이 걷고 있네. 걷고 있단 말일세!”

“죽음이다, 죽음이야!”

“아아……. 저것들이 우리의 터전을 저주로 물들이고 있어…….”

“세이칸 신이여, 우리를 벌하시는 겁니까!”

“누가 좀, 누가 도와줘……!”

그것도 무척.

“살려주세요! 제 아이가 아직 집 안에!”

……내가 싸우진 못하지만, 신성력으로 잡아둘 순 있지 않을까?

변절자는 움직이기만 해도 재앙이라던데, 신성 기사들이 올 때까지 발을 묶어둘 수 있다면…….

반지가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다시금 진동했다.

“……좋아.”

어느새 방향을 튼 마차는 속도를 붙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마차에서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내렸다.

“서, 리리 님!!”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는 방향을 향해 질주하는 내 뒤로 카디얀의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렸다.

***

“……헉……헉.”

거리에 도망치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들어간 곳은 광장이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참상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내가 쇼웬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시덕거렸던 장소.

‘여기가 정말 아까 거기라고?’

내가 알던 곳이라 믿기 힘들었다.

잉크에 물들듯 검게 변하는 땅,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건물.

도망가는 사람들의 비명,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 겁에 질린 울음소리, 먼저 살겠다며 다른 사람에게 내뱉는 욕설…….

갖갖의 소리와 코를 찌르는 악취가 광장에 들끓었다.

“으……. 어으…….”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변절자.

나는 검게 타버린 인간의 형상을 닮은 ‘그것’이 서 있는 광장의 중앙을 바라봤다.

입에서 나오는 ‘으으’거리는 소리는 괴로워하는 신음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광장의 절반이 녹아내린 타이어처럼 찐득하고 검게 변해버린 걸 보면 그런 동정심은 싹 사그라졌다.

왜 죽음의 땅이라 하는지 알겠다. 지옥이 따로 없네.

‘이제 어쩌면 좋지?’

변절자를 결계로 잡아넣을 생각으로 무작정 달려오기는 했는데.

내가 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상상했던 것보다 더한 참상에 한 번 멈춘 발은 쉽게 다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도, 도와주세요!”

움직이는 걸 망설이는 사이 한 여자의 다급한 절규가 들려왔다.

검은 땅에서 붕괴한 건물을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쓰러진 건물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안개처럼 일어난 흙먼지 속을 좀 더 집중해 바라보니, 여자의 앞, 건물 잔해에 하반신이 깔려 옴짝달싹 못 하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몇몇 사람이 잔해 들어 올리는 것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변절자가 점점 앞으로 걸어 나오자 그대로 손을 떼고 도망쳤다.

“흐허헝-. 엄마……! 세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같은 광경을 보며 울부짖는 아이가 있었다.

아홉 살 정도 됐을까.

양손에 쥐고 있는 건 가판대에서 파는 가면과 사탕.

가족과 함께 나온 나들이에서 이런 참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저기 건물에 깔린 애, 네 동생이야?”

“끅, 끄윽…….”

아이는 숨넘어갈 듯 꺽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사람들을 비집고 나타난 카디얀이 내 옆에 섰다.

“리리 님, 여긴 위험합니다! 돌아가 주세요. 제발.”

“카디얀 경.”

나는 급히 카디얀의 복장을 훑었다.

신분 위장을 위해 입은 평민 복장.

아무리 봐도 그 안에 신성석이 박힌 갑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카디얀의 신성력은 치료계…….’

검은 땅으로 들어가려면 필요한 건 수호계의 신성력이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변절자는 아이 엄마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기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몇 분만 시간을 벌어주면 돼.

나는 우는 아이의 손에 들린 가면을 가져가며 말했다.

“이것 좀 빌릴게.”

“리리 님, 설마 들어가실 생각은……!”

“카디얀 경은 이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리리 님만 두고, 제가 어찌!”

카디얀이 그럴 수 없다는 듯 분통을 터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날 말리려 손을 뻗는 카디얀에게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방금 한 말, 명령이에요.”

그리곤 아이한테 빌린 가면을 얼굴에 쓰고 변절자를 향해 달려갔다.

나 오늘 달리는 날인가 보네.

***

“성녀님이다…….”

“성녀님이잖아.”

귓가에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건 내 정체를 들켜서가 아니었다.

‘으아아. 하필이면 이 가면이라니.’

요즘 젠달에서 인기 있는 연극, <성녀님이 세상을 구원하신다>.

데이트 코스에 넣어볼까 하고 줄거리를 조사해봤는데.

갈색 머리 성녀님이 괴물을 물리치고 탑에 갇힌 왕자님을 구하는 아주 전형적인 히어로물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성녀님이 매번 가면을 쓰고 활약한다는 설정이 있었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게 그 ‘성녀님’이 애용하는 가면이었다.

“……괜찮겠지?”

달리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다.

성녀님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사실 진짜 성녀였다는 생각을 누가 하겠어.

그보다는.

나는 반지에서 나오는 하얀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으어…….”

“어으어…….”

2m 정도 떨어진 거리, 시계방향으로 치자면 11시와 2시 방향.

변질자 두 마리가 내가 발동한 구속 결계에 각각 잡혀 있었다.

‘마리’라 해도 괜찮으려나. 그렇다고 ‘명’이라 하기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생김새였다.

“일이 잘 풀린 거 같긴 한데…….”

나는 문에 가로막힌 좀비처럼 결계에 몸을 툭툭 부딪치는 변절자를 보며 혼잣말했다.

조금 전.

반지에서 나온 신성력은 구 모양의 보호 결계가 되어 내 몸을 감쌌다.

나는 그대로 검은 땅에 들어가 변절자 앞에 선 뒤, 황궁 도서관에서 빌린 신성력 훈련서(중급)에 나온 구속 결계를 발동시켰다.

그렇게 한 마리를 결계에 가두고 있자니 뒤이어 광장으로 이어진 골목에서 변절자 한 마리가 더 등장했다.

예상외의 상황에 잠시 놀랐던 것만 빼면 별다른 무리 없이 결계를 하나 더 발동시켜 변절자를 잡았다.

잔해에 깔렸던 아이도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구출해 데려갔으니, 모든 게 순탄한데.

“뭔가 찝찝하단 말이야…….”

중고 거래 쿨 거래했다고 좋아했는데, 사자마자 판매자 게시글이 사라진 기분이랄까.

“으어…….”

원래 변절자 잡아두는 게 이렇게 기어가는 달팽이를 종이컵으로 잡는 것만큼 쉬운 일인가?

미처 광장 밖으로 도망가지 못한, 이제는 구경꾼이 된 사람들이 광장 가장자리에서 웅성거렸다.

“저 사람 누구야?”

“평범한 여자애 같은데 혼자서 구속 결계를 두 개나 발동하고 있어. 저게 가능해?”

“갈색 머리 성녀님이야. 성녀님이 가면을 쓰고 괴물을 물리치는 거라고!”

“그건 연극 내용……. 에잇, 뭐가 됐든. 구원자다! 영웅이라고!”

아니면 어려운 일인데 내 신성력이 꽤 쓸만하다거나!

‘후후…….’

이렇게 뿌듯할 수가.

나 지금 좀 멋지지 않나……!

마냥 좋아하기엔 검게 변한 풍경이 지옥 같았지만, 피해가 더 번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듯했다.

기사들도 곧 올 테고, 오늘 돌아가면 책이나 내야겠다.

제목은 변절자 잡아두는 게 제일 쉬웠-.

“퓨우우!”

허리춤에 부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퓨가 몸을 떨고 털을 곤두세워 몸집을 부풀렸다.

“퓨? 왜 그…….”

“……니임!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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