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빚 두 개.”
“…….”
“공장에서 아이들이 목숨을 구해줬다지. 그러니 왕녀가 내게 진 빚이 두 개군.”
허, 샤를은 알렌드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죽일 듯 쳐다보다 꺼내는 말이 빚이라니.
“그래서, 갚으라고?”
“두 번 갚으란 소리는 안 하지. 한 번으로 끝내.”
“……뭘 원하는데?”
“보니아 왕국이 보관하고 있는 초대 성녀의 기록 열람.”
역모를 일으킨다는 데르아치의 정보를 원하리라 예상했는데.
초대 성녀의 기록을 달라니.
예상을 제대로 비껴간 그의 말에 샤를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왕실 금고에 있어서 빼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
“그 역사소설을 얘기하는 게 아닌데.”
움찔.
알렌드를 바라보는 샤를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마, 저 남자가 지하 미궁에 숨겨진 역사책의 존재를 알고 있나?
‘어디서 주워들은 내용을 떠보듯 말하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샤를의 생각이 무색하게, 알렌드는 확언했다.
“칸드리얀을 보호하는 지하 미궁. 거기에 보관된 역사책. 내가 열람하고 싶은 건 그 책이야.”
“……칸드리얀이라니. 당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어? 그건 그냥 세이칸 신의 창조 설화에 나오는 전설 속 나무잖아. 나는 모르는 이야기야.”
“그럼 내가 직접 찾지. 그쪽은 옆에서 돕고. 빚은 그걸로 갚아.”
저런 자신 있는 목소리라니. 누가 들으면 미궁이 있는 정확한 위치라도 아는 줄 알겠네.
“어디서 찾겠다는 건데?”
“보니아 왕궁, 로즈벨 후원의 분수대 아래.”
알잖아.
샤를은 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못 도와주겠다면?”
“역시. 왕녀는 알고 있었군.”
“…….”
샤를은 침묵했다.
이제 대놓고 저를 왕녀라 칭하면서도, 남자는 그에 걸맞은 예를 보여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렌드의 서늘한 손이 샤를의 가녀린 목 근처를 맴돌았다.
“그럼 저울질해 봐. 왕녀의 목숨과 초대 성녀의 기록. 무엇이 더 값진지.”
제 목숨을 언제라도 끊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하는 황제.
샤를은 그런 그가 몹시도 못마땅했다.
우위에 서 있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세이칸 신이 보낸 ‘성녀’에 관한 정보는 이쪽이 더 많으니까.
“하나만 알려줄까?”
샤를은 알렌드를 향해 비소를 머금었다.
일방적으로 만든 빚 두 개.
그걸 갚으란 억지를 쓰면서까지 제게 역사책을 보여달라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야…….’
이 남자가 필사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정보가 역사책에 있으니까.
“보니아가 왜 초대 성녀를 위한 신전을 짓고 거기에 성녀를 뒀을 거 같아?”
과거 보니아 왕국은 화려한 신전을 짓고 초대 성녀를 일평생 그곳에서 보내게 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성녀를 감금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란 비난을 종종 받고 있지만.
당시 보니아 왕국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보니아 왕가의 피가 성녀를 원했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만, 오로지 소유욕 때문은 아니었다.
샤를은 황제의 냉랭한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성녀의 신성력…….”
아는 사람은 저와 델칸뿐인 귀중한 정보였지만, 이 남자한테는 알려줘야겠지.
그래야 나중에 성녀를 무사히 데려올 수 있을 테니까.
제 말을 듣고 서서히 일그러지는 황제의 얼굴을 보는 건 그 이유와 상관없는 작은 유희긴 했지만.
***
폐하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니.
갑자기 무슨 자의식 과잉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었다.
내가 그간 시력보다 등한시했던 청력이 제대로 일을 해줬지 뭐야.
“……폐하랑 저랑 평생을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면 어떨까 하는…….”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폐하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빨리 뛰었단 말이지.
그전에도 종종 내가 치대는 말을 하면 화나신 듯 심장박동이 빨라져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때가 100 bpm이라면 어제는 130 bpm정도였달까……!
하지만 그걸로는 긴가민가했다.
가족이라는 말에 화가 많이 나신 걸 수도 있고.
‘확인해볼까……?’
강하게 오는 촉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확인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란 촉!
그래서 폐하가 나가시기 전, 냅다 질렀다.
“폐하, 제가 많이 좋아해요.”
쿵.
폐하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연애 감정으로요.”
쿵쾅(쿵), 쿵쾅(쿵), 쿵쾅(쿵).
터질 것 같이 뛰는 내 심장박동에 맞춰서 더블링을 입히는 이 소리는-!
물론 더 터질 것 같이 뛰는 건 내 심장이었지만, 폐하 심장도 만만치 않았다 이거지.
그게 화난 사람의 심장 소리면 내가 폐하 덕질 관둔다.
“으으. 갭 차이 뭔데…….”
그 세상 무관심한 잘생긴 얼굴 아래, 심장이 그렇게 뛰고 있다는 걸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 떠나서 나라면 벌써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난리가 났을 텐데.
폐하 연기력은 인정해 드려야 한다.
어떻게 그걸 숨기실 수 있담.
어떻게 그걸…….
“후……. 후후…….”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폐하가…….
나를…….
나를!
“나를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어떻게 하지, 진짜!”
“퓨우, 퓨!”
퓨가 깜짝 놀라 소파를 데구르르 굴렀다.
나는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 방을 이리저리 누볐다.
도저히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쌍방이었어!’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니!
으으. 생각만 해도 심장에 무리가.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근처 티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나 이제부터 어쩌지.
‘꼬실까.’
라니, 무슨 그런 배짱 넘치는 소리냐고……! 이미 몇 번 차인 주제에!
으아아아.
내 손에서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처럼 머릿속도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아니 근데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 지금 폐하랑 위장 연애 중 아닌가? 이거 절호의 찬스, 일생일대의 기회, 뭐 그런 거 아니야?
게다가 쌍방인데!
잘 되려는 시도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나!
“인생은 타이밍 이랬는데.”
평생 폐하 짝사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둘이 행복해질 기회 아닌가.
폐하가 꼬신다고 싫은데 억지로 사귈 사람도 아니고.
맘껏 부딪혀봐도 괜찮지 않을까.
꼬셔도 좋지 않을까.
꼬셔볼까……!
“폐하.”
나는 시야 안에 들어온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윙크했다.
“저희 사귈까요?”
***
“안 돼.”
쇼웬은 들고 있던 포크로 허공에 엑스자(X)를 그었다.
“리리, 정말 나들이 일정을 이렇게 짠다고? 선주님한테 한 소리 들을 일 있냐.”
쇼웬과 내가 있는 곳은 광장의 한 노천카페.
어제 온종일 폐하를 꼬실지 말지 삽질을 하던 중, 리리 앞으로 우편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쇼웬.
한턱낼 테니 언제 시간 되느냐는 내용이었다.
얼씨구나 잘됐다 싶어 당장 만나자 했지.
“왜? 완벽하지 않아?”
뭐, 폐하한테 당장 사귀어 달라 들이댈 건 아니었고.
사전에 잡아놓은 데이트부터 성공적으로 끝내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그래서 쇼웬한테 내가 짠 데이트 일정을 좀 봐달라고 했는데.
“완벽은 무슨. 새벽부터 자정까지 쉴 틈이 없는데. 일출 보면서 소원 빌기, 도시락 싸서 아침 소풍, 연극 보고 카페, 쇼핑, 레스토랑에서 점심, 승마, 간식, 호숫가 산책, 노을 보며……. 야, 선주님 도망간다.”
신랄하게 까이는 중이었다.
이렇게 들으니 당일치기로 끝내는 패키지여행 같기도 하고.
그래, 인정하자. 욕심이 과했다.
언제 니세포르엘 신전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폐하의 하루를 알차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쇼웬은 손에 들고 있던 내 계획서를 돌려줬다.
“여기서 반의반만 추려서 일정 짜면 괜찮겠네.”
“오오, 역시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구.”
“넌 왜 친구가 나밖에 없냐.”
그렇게 말하는 쇼웬은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내가 원래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말이지…….
내가 성녀인 걸 알고 떠났지 뭐야. 흑흑.
‘쇼웬도 내가 성녀인 걸 모르잖아.’
쇼웬도 알면 나랑 거리를 두려고 하려나.
나는 괜히 애꿎은 빨대로 음료를 휘저으며 별일 아닌 척 말을 건넸다.
“쇼웬, 나 사실은 성녀다.”
“뭐래. 그럼 나도 사실은 황제다.”
……이게?
“넌 아니거든?”
“너야말로 아니거든.”
울컥해서 내뱉은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를 사칭범 취급하며 사소한 언쟁을 벌였다.
나는 그렇다 치고, 쇼웬은 왜 이렇게 열을 올리나 했더니.
“……어디에 가입했다고?”
“성녀교.”
사랑의 묘약 소동 때 알게 됐던 그 수상쩍은 단체 이름을 쇼웬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못 본 사이, 쇼웬은 덕후가 돼 있었다. 아니, 덕질하는 건 좋은데 상대가 나인 건 좀 아니지 않나……!
나는 쇼웬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쩌다 그런…….”
“너도 놀랍지? 나도 놀랍다니까. 거기 들어가기 엄청 힘든데 내가 들어가다니.”
왜 이렇게 뿌듯해하는 건데…….
맘에 드는 나무막대기 주워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시고르자브종 강아지 같았다.
그런 쇼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나. 손뼉이나 쳐주자.
“어, 어……. 축하해. 쇼웬.”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어디 가서 성녀님이라고 사칭하고 다니지 마. 그러다 큰일 나.”
“왜?”
“왜냐니. 여기 사람들 성녀님한테 진심이잖아.”
쇼웬은 “다들 성녀님한테 미쳤어.”라고 혼잣말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곤 내 눈치를 한 번 보고,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처럼 의자 등받이에 기대던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밸런타인 초콜릿이라고 알아?”
덕밍아웃을 한 쇼웬은 고삐 풀린 한 마리의 덕후가 되어 밸런타인 초콜릿 원정담을 풀어놓았다.
이젠 증정을 끝낸 밸런타인 초콜릿이 성녀 굿즈로 유행을 탄 모양인데,
어디 대장간에서 평생 소장이 가능하도록 신성석을 단 보관함까지 만들어 팔고 있더라나 뭐라나.
쇼웬도 그걸 사느라 친척 집에서 알선해준 일자리의 급여를 털어 넣었다고…….
“죽을 때 내 무덤에 같이 넣어달라고 할 거야.”
글렀다. 쟤 머릿속엔 이제 나밖에 없어.
나는 민망함에 홧홧해진 목구멍을 오렌지 주스로 달랬다.
“쇼웬, 너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그리고 언젠간 안타까운 미래를 맞이할 쇼웬에게 유감을 표했다.
비록 쇼웬은 “뭐래.”하고 콧방귀를 꼈지만.
“……난 말했다.”
내가 성녀라고, 난 말했어. 쇼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