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데.”
이번에도 헛다리를 제대로 짚었다.
“그러면 심경의 변화 같은 건 없으신 거예요?”
“변화?”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지신 것처럼 보여서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 했죠.”
“별일은 없고, 그냥.”
폐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머리를 살짝 흩트렸다.
“다정하게 대하면 성녀가 정신을 못 차리겠다며.”
그러니까 내가 폐하의 매력에 허우적거릴 걸 염려해서 성격 나쁜 폐하를 연기해주셨다는 건가.
후후……. 거참, 사려 깊은 배려에 눈물이 다 나네.
“그것참……. 감사한 일이네요.”
부들거리고 있자니 폐하 입매가 슬쩍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래, 폐하가 즐거우면 됐어…….
다 노셨는지, 폐하는 뒤늦게 방문 목적을 말했다.
“삼일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거야.”
“헛, 왜요?”
“지방 시찰이 있어서.”
데르아치 때문인가?
그동안 폐하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검지로 폐하 옷깃의 브로치를 가리켰다.
“폐하, 브로치 꼭 하고 가세요.”
“성녀도. 반지 빼지 말고.”
“반지요? 이건 죽을 때까지 안 빠진다는데요.”
라는 내용이 시아나가 읽은 황궁 역사서에 있었다고 했다.
주인으로 택한 사람의 몸에서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그랬지.
전 주인인 이사벨라 황후님도 평생을 끼고 다녔다 했고.
마지막엔 “저도 반지처럼 살아보고 싶네요.”라고 말하는 시아나의 눈이 조금 무서웠다.
“잘됐네.”
폐하는 반지가 빠지지 않는다는 게 만족스러운지 슬쩍 웃으셨다.
그리곤 우려 섞인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동안 호위 기사들 몰래 돌아다니지 말고.”
“네.”
“밥도 잘 챙겨 먹고.”
“네? 네.”
“모르는 사람이 잘생겼다고 따라가지 말고.”
“……얼마나 잘생겼는데요?”
“……신아리.”
“농담이죠, 농담! 저한테는 폐하 얼굴밖에 없는걸요. 절대 안 따라갈게요.”
순간 낮아진 폐하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분위기를 수습했다.
농담 한 번 했다가 또 성격 나쁜 폐하 볼 뻔.
그나저나 이러다 차 조심, 길 조심까지 나오게 생겼는데.
“황궁 밖으로 안 나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나갈 일이 있으면 마차도 조심하고.”
“폐하.”
나는 대답 대신 손바닥을 내밀었다.
“저 신분증 발급 좀 해주세요.”
“그건 왜?”
“제 이름 뒤에 레오디우스라고 붙여져 있나 확인 좀 해보게요. 저 아무래도 입양된 거 같거든요.”
자식만 혼자 두고 어디 출장이라도 가는 부모님 같았다니까.
그런 나한테 폐하는 실없는 소리를 한다며 무시할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폐하의 웃음 포인트를 저격해버린 모양이었다.
소리 내어 가볍게 웃으시는데 순간 여름철에 부는 시원한 바람인 줄.
이 청량감. 나 지금 잘하면……! 가슴속에 묻어놨던 염원을 이룰 수 있을지도!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못 봤던 그 웃음……!’
나는 기대감에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머리를 핑핑 돌렸다.
웃음 포인트, 내가 잡는다.
“폐하, 방금 신고 당하셨어요.”
“내가 신고를 당했다고?”
“제 마음의 혼인 신고.”
“…….”
크흡. 평소에 주접 좀 그만 떨었어야 했는데.
이런 드립밖에 생각 안 나다니.
청량한 웃음은 무슨. 돌아온 건 폐하의 침묵이었다.
게다가 이 반응. 내가 한 말을 농담이라 생각하지도 않으시는 게 분명하다.
‘폐하가 농담인 걸 모르면 그냥 프러포즈잖아-!’
속에서 절규가 흘러나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소 잃은 외양간이었다.
폐하, 여기 혼자 계세요. 저 좀 나가 있고 싶으니까…….
“……위장 연애 다음엔 위장 결혼인가?”
“아, 아니요. 농담이었는데요.”
“농담?”
“그-.”
실패한 드립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것도 없지.
나는 빠르게, 그리고 적당한 이유로 댈 수 있는 말을 찾아 내뱉었다.
“그러니까 가족 없는 폐하랑 저랑 평생을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 나온…….”
으아아아.
진짜 프러포즈 하냐고-! 신아리……!!
“…….”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결심했어. 오늘 내 주둥아리에 지퍼 단다. 이렇게 되는 대로 말하는 걸 막으려면 그 방법밖엔 없어.
폐하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하, 그렇죠?”
***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퓨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긴히 상담에 들어갔다.
“퓨, 나 어떻게 하지.”
“퓨우?”
큰일이다.
정말로.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 거 아는데.”
아는데 말이지……!
으으. 또 진정이 안 된다.
나는 쿠션을 힘껏 쥐어 안았다가 진정이 될 때쯤 내려놓았다.
“있잖아. 퓨.”
“퓨?”
“폐하가 날 좋아하는 거 같아.”
***
젠달의 작은 마을, 쿠카.
‘목걸이?’
아이들한테 잡혀 이곳까지 온 샤를은 방에서 목걸이 하나를 주웠다.
잡화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평범한 로켓 목걸이였다.
‘누가 흘리고 갔나 보네.’
딸깍.
샤를은 로켓을 열었다. 홈에 끼운 유리판이 보였고 그 속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어있었다.
‘이건…….’
샤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익숙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녀가 아는 사람의…….
“아, 여기 있었네. 아줌마가 갖고 있었어요?”
문을 요란스럽게 열어젖힌 렉스가 샤를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했다.
샤를이 고개를 들어 렉스를 바라봤다.
“네 거니?”
“아뇨. 포인 거요.”
렉스는 거침없이 걸어와 샤를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왜 다른 사람 걸 들고 있어요? 포인 그거 잃어버린 줄 알고 울고 있다고요.”
이 꼬맹이가.
제가 머무르는 방 안에서 주웠다. 그러면 잘못은 잃어버린 사람에게 있지 않은가.
샤를은 녹색의 작은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걸 참으며 목걸이를 건넸다.
그리곤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안에 머리카락, 검은색이네?”
“남색인데요. 색맹인가 봐.”
“…….”
메롱.
렉스는 혀를 내밀고 샤를을 약 올린 후, 방을 빠져나갔다.
도둑놈 취급에 색맹 취급까지.
샤를의 주먹이 바들 떨렸다.
도면을 되찾고 여기서 나가기 전에 저 머리통을 한 번 쥐어박아야 속이 후련할 거 같은데.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샤를은 손가락 관절을 풀며 등장할 녹색 머리통을 기다렸다.
“실례하지.”
하지만 듣기 좋은 중저음과 함께 나타난 건 조각상 같은 남자였다.
장대하고 훤칠한 몸, 빼어난 외모.
은발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 눈밭 같았고, 푸른 눈동자는 맑은 샘을 담아 놓은 듯했다.
겨울을 의인화한다면 이 남자 같지 않을까.
‘……델칸보다 잘생긴 거 같은데.’
샤를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있어 미남의 기준은 제 이복동생인 델칸의 외모였다.
그리고 그런 샤를에게 델칸보다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게 한 남자는 그녀의 인생에서 단 두 명.
한 명은 미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젠달의 황제였고, 다른 한 명은 눈앞의 이 남자였다.
그 정도의 미모.
그녀가 박색을 좋아하는 취미는 없으니, 남자의 외모에 호감이 생길 만도 한데.
“누구시죠?”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누구냐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못 알아보는군.”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왜 진 듯한 기분이 드는지.
“누구시냐고 물었는데.”
“알렌이다.”
그 말에 샤를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설마.
동명이인이야 세상에 얼마든 있지만, 저 정도의 외모는 흔치 않지.
머리 색, 눈 색, 이목구비마저 달라 보였으나 그 정도 바꾸는 것쯤이야.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남자에겐 아무런 일도 아닌 것들이었다.
“데이데른 호의 선주?”
“면담 요청엔 답을 안 줬더군.”
맞네. 젠달의 황제.
무뚝뚝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이 눈 서릿발을 걷는 듯했다.
사람 좋은 듯하던 그 황제가 맞나 싶었지만, 제게 경고하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이쪽이 원래 성격인가?’
샤를은 가볍게 코웃음 쳤다.
신분을 숨긴 황제한테 예를 차릴 필요는 없겠지.
자신이나 저 남자나,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어도.
“알렌이란 이름, 그쪽한텐 안 어울려.”
“성녀께서 하사하신 이름이지.”
“…….”
되지도 않는 가명을 사용하는 황제를 놀려줄 심산이었는데, 돌아온 건 과시였다.
샤를은 나중에 갚아 주겠노라 생각하며 알렌드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쪽이 여기 대장? 마을에 아이들뿐이던데. 신분을 숨기고 골목대장 노릇이라도 하나 봐?”
샤를이 쿠카에서 지낸 지 이틀째.
마을은 여느 시골의 작은 마을처럼 보였지만, 주민들의 연령대가 10대에 그쳤다.
그 마을에서 처음 등장한 성인이 이 남자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렌드는 샤를의 의문엔 관심 없다는 듯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공장엔 왜 잠입했지?”
“궁금해?”
“그다지. 데르아치가 보니아의 제1 왕자인 힐리스 애팅거와 손을 잡았다니, 그것과 연관이 있겠지.”
“……그걸 알아? 정보망이 무섭네.”
젠달 황제의 말이 맞았다.
지병으로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나 있던 힐리스가 젠달의 데르아치란 자와 꽤 오래전부터 연을 맺고 있었다.
힐리스의 목적은 왕위 찬탈.
각자의 나라에서 역모를 꾀하는 두 세력이 끼리끼리 모인 것이다.
랑데트 후작이 샤를을 찾았을 때, 샤를은 이미 그 정보를 입수한 뒤였다.
뒤통수칠 것을 뻔히 아는데, 역모를 도와달라니. 사람을 바보로 보는 건가?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잘만 이용한다면 왕위와 성녀를 얻고, 거슬리는 것들을 한 번에 치우게 될 테니까.
그래서 욕심껏 행동했는데 변절자라는 변수가 있었다. 델칸이 인질로 잡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정보망이면 그쪽 제국 대공의 포부가 대단한 것도 알겠네. 황제가 어지간히 위엄이 없나 봐?”
“그런가 보군. 타국의 왕녀도 그 포부에 가담한 걸 보면.”
알렌드의 말에 샤를은 뜨끔했다.
자신이 데르아치의 역모에 가담한 것까지 알고 있다니.
그녀는 살짝 작아진 목소리 변명했다.
“……이쪽은 사정이 있었어.”
“관심 없군.”
샤를은 눈을 흘겼다.
“지금이 원래 성격이야? 성녀는 알고 계시고?”
그 말에 황제의 안광이 매서운 빛을 띠었다.
제 것을 탐내지 말라는 소유욕 가득한 저 눈빛.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기에 샤를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경고하듯 샤를을 바라보던 알렌드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