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되는 일이 없네.”
샤를은 모래 속에 가라앉으며 욕설을 지껄였다.
도면을 따라 바깥으로 나가는 비밀통로를 찾고 함정들을 피한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잘못 밟은 발판에 바닥이 열리기 전까지는.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바닥 아래로 추락했다.
그녀를 맞이한 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거대한 모래 늪.
이제는 천장이 된 바닥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져온 신성석은 이미 다 써버렸고, 샤를의 신성력은 지금으로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추적계열이었다.
“…….”
허리 아래까지 모래에 잠겼다.
샤를은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려 호흡마저 조절하며 고민했다.
이대로라면 둘 중 하나겠지.
빠져 죽거나, 이 꼴로 잡히거나.
기왕이면 후자가 낫다.
제 오라비와 붙어 자신을 농락한 그 늙은 뱀의 대가리를 잘라버리기 전이니까.
저벅, 저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갈라진 천장에서 빼꼼 나타난 얼굴이 샤를을 내려다봤다.
11~13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
어깨에 보이는 멜빵, 녹색 머리에 쓴 챙 달린 베레모.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인가.
“찾았다.”
소년의 손에서 나온 하얀색의 신성력이 샤를의 사지를 붙잡아 두둥실 공중으로 띄웠다.
수호 결계를 응용한 결박술.
신관 정도의 수준은 돼야 사용할 수 있는 건데, 이렇게 어린애가.
샤를이 놀라는 사이, 소년은 제 앞에 온 샤를의 품에서 도면을 빼갔다.
“너……!”
“필요한 건 이것뿐이라서요.”
소년의 레몬색 눈동자가 당황한 샤를을 무관심하게 바라봤다.
샤를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소년은 그녀를 다시 모래 늪으로 빠트리려는 게 분명했다.
샤를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너희 공장장이 침입자를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니? 내가 그 침입자란다.”
“흥미 없어요.”
“그러면 돈은 어때? 바닥에 내려주기만 하면 100골드를 줄게.”
100골드.
젠달에서 일하는 생산직 종업원의 일 년 치 봉급이었다.
그것도 성인 봉급 기준이니, 저 나이대의 아이들은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는 금액인데.
“귀찮은 아줌마네.”
“아줌…….”
소년의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실려있었다. 아주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더욱이 아줌마라니.
샤를은 난생처음 듣는 단어가 황당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허공에 뜬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모래 늪이 보였다.
도면도 뺏기고 다시 저 아래로 떨어질 운명이라.
‘어쩐다.’
어린애를 상대하는 취미는 없는데.
샤를은 고민했지만, 그녀가 채 다음 행동을 결정할 새도 없이 결박이 느슨해졌다.
훅하고 몸이 떨어지는 감각에 샤를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ㄲ…….”
“기다려. 렉스.”
꽈악.
결박은 다시 샤를의 몸을 붙들었지만, 샤를 때문이 아니었다.
렉스의 등 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여자아이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분이야.”
“누군데?”
“보니아 왕국의 왕녀님.”
그 말에 샤를은 안색을 달리하며 소녀를 살폈다.
소년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외모에 같은 옷차림.
똑 부러지고 당찰 것 같은 인상이었다.
처음 보는 아이인 듯싶은데, 날 안다고?
가만 보니 모자 아래에 양 갈래로 딴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조금 낯익었다.
“안녕하세요. 왕녀님.”
자신의 정체를 아는 소녀와 신성력을 다루는 범상치 않은 소년.
누구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아이들일지도 모른다.
샤를은 입을 잠시 다물고 상황을 살폈다.
“포인, 이 사람 데려갈 거야?”
렉스라 불린 소년이 투덜거렸다.
포인. 그제야 샤를은 제 사냥터 근처에서 심부름해주던 여자아이를 생각해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성녀가 새장을 부수고 도망친 직후였나.
저주받은 아이라 어딘가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응. 데려가야 해.”
죽기는커녕, 이제는 제 목숨줄을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렉스가 귀찮은 듯 떫은 얼굴을 했다. 포인이 말했다.
“대장이 필요하다고 했어.”
“정말 필요하대? 그냥 두고 가면 안 되나? 짐만 될 거 같은데.”
“안 돼.”
“알겠어.”
포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렉스는 시무룩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듣던 샤를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어린애들한테 귀찮은 짐짝 취급이나 당하다니.
“너희-.”
“조용히 하세요. 들키니까.”
렉스가 신성력을 움직여 샤를의 입을 막았다.
‘어이없네.’
지금까지 떠든 게 누군데.
샤를의 어이가 있거나 말거나 렉스는 신성력으로 샤를을 공중에 띄웠다.
“…….”
아이들의 옆에서 둥둥 떠다니는 꼴이, 짐짝보다 더한 유원지 풍선 취급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렉스.”
“응.”
***
‘날씨 좋다.’
나는 응접실 소파에 기대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런 날이 놀러 가기엔 딱인데.
‘나들이…….’
다음 나들이는 나한테 맡기라 큰 소리를 낸 지도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
바쁜 폐하의 시간을 하루 빼달라 한 것이니 알차게 써먹어야 했지만.
‘커플들이 어떻게 데이트하는지 알아야 일정을 짜지……!’
얼굴 밝히면 연애를 못 한다고.
이전 세계에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애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이상형들은 모두 액정 너머에 있었다.
현실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만 높아졌다 이 말이지.
크흡. 노트북이랑 핸드폰에 거울을 달았어야 했는데.
미인들 한 번 보고 내 얼굴 한 번 보고.
아니면 검은 화면 속에서 실실 쪼개는 내 얼굴을 봤을 때라도 현실을 직시했었어야……!
어쨌든 내 연애 경험치로는 데이트 풀코스 일정 짜는 건 무리다, 무리.
“인터넷……. 인터넷이 필요해…….”
“인터넷?”
어디서 천사가 말하고 있나.
나는 소파 등받이에 대고 있던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이상하네.
내 최애가 왜 내 눈앞에 있지.
지금은 오후 회의에 참석하고 계실 시간인데.
나는 소파 뒤에 선 천사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아.”
짝사랑이 깊어지면 환각도 보고 그런다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벌써 폐하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분명해. 나.
하지만 허상 웰컴. 이렇게 생생한 허상일 때 얼굴 실컷 봐둬야지.
진짜 폐하 만나봤자 미간밖에 못 보니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지. 우리 폐하 미모는 사람 아니야. 진짜.
“…….”
“…….”
두근. 두근. 두근.
그런데 나 지금 심장 너무 빨리 뛰는데. 허상 폐하에 과호흡 오고 막 그러는 건-!
“신아리.”
“으아아아-ㅅ!?”
뭐야! 진짜였잖아!
나는 후다닥 소파에서 일어나 맞은편 소파 뒤로 도망쳤다.
“폐, 폐하?”
폐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제가 성녀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요.”
“그게 아니라-.”
제가 잡아먹을까 봐 그러는 거거든요!
“어쩐 일이세요?”
“성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들렸지요.”
오늘도 나왔다.
청정지역 1급수 계곡물 같은 저 맑은, 위장 연인 전용 웃음.
위험해……! 단둘이 있으면 위험하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옹기종기 모여 슬금슬금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하녀들과 듄이 보였다.
그러다 하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가지 마……!]
[성녀님,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연인의 꽁냥거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
방문까지 닫아준 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시아나가 헬리한테 가지 않고 이 자리에 있었으면 내 눈빛을 읽어줬을까.
하지만 나도 내공이 좀 생겼지.
이제 폐하랑 단둘이 방에 있다고 막 이성을 잃고 그러진 않을 거라고……!
“……소파 등받이는 왜 꽉 붙들고 있지?”
“아, 몸이 찌뿌둥해서 운동 좀 하려고요. 이러면 몸이 펴진다고 그래서.”
나는 괜히 발꿈치를 들었다 올렸다 하며 어디선가 봤던 스트레칭 동작을 흉내 냈다.
“가,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말했잖아. 보고 싶어서.”
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보여줄 사람도, 들려줄 사람도 없는데, “발길이 절로 이쪽으로 향했어. 네가 보고 싶어서.” 같은 말씀을 하신다고……!
꽈악. 소파 등받이의 나무 장식을 붙잡은 내 손이 부들 떨렸다.
“5, 5번 조항……. 평상시처럼…….”
“알지, 평상시.”
폐하는 어느새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얹은 팔에 턱을 기댔다.
올라간 입꼬리에서 보이는 여유.
나른한 맹수가 놀잇감을 찾는 듯한 저 위험한 분위기를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거잖아?”
“이건……!”
몇 달 전 평상시잖아요!
성격 나쁜 이중인격자 미남 시절……!
나는 나도 모르게 두어 걸음을 뒷걸음질했다.
이 모습의 폐하한테는 심리적으로 지고 들어간다니까…….
“…….”
또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가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번뜩이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폐하, 혹시…….”
휙휙 모드가 바뀌시는 게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익숙하다.
마치 폐하 앞에서 내 행동이 휙휙 바뀌는 거랑 비슷하단 말이지.
그래, 이건……!
“좋아하는 사람 생기셨어요?”
크흡.
내 말에 내가 데미지를 제대로 받았다.
생각보다 속이 아주 쓰리더라니까.
‘안 돼…….’
내 덕심이 이렇게 약할 리 없을 텐데! 내 감정보다 폐하의 행복을 빌어 드려야 하는데……!
이러면 내가 폐하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며 언젠간 맞게 될 폐하의 결혼생활을 축하해 드릴 수 있을까-!
“황후님, 국이 좀 짜네요.”이러면서 시어머니 짓을 해버리는 건 아니냔 말이지……!
그러다 끝이 좋지 않게 황궁에서 쫓겨나서는,
리리 할머니의 디저트 가게나 하면서 화려한 솔로 라이프나 즐기게 생겼다.
그래, 고급 마차를 뽑자.
엠블럼도 달아야지. 아우X나 비엠X 중에 뭘 달면 좋을까!
바보 같긴. 그냥 마차를 두 대 뽑으면 되잖아? 난 부자니까.
하하. 웃기다. 사실 안 웃겨.
“아, 그러면 계약은…….”
양심상 취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헤어졌다고 공표하는 건 데르아치 소탕 후가 되겠지만.
위장 연인 행세는 앞으로 펼쳐질 폐하의 행복한 연애에 별로 좋지 못한 영향을……!
앗, 폐하랑 눈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