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벽난로,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러그, 그 위에 놓인 푹신한 쿠션들.
나는 숄을 두른 채 따뜻한 실내에서 눈앞에 펼쳐진 바다 전망을 바라봤다.
가리는 것 하나 없는 통유리 창은 마치 내가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우리 폐하…….’
부자시라더니.
개인 해변에 개인 별장까지 있을 줄이야.
나들이를 가자는 폐하의 제안이 있고 며칠 뒤, 주말.
우리는 마차로 세 시간가량을 달려 이곳에 왔다.
“날이 좀 더 따뜻했으면 바닷가를 거니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폐하는 직접 티 세트를 담은 쟁반을 들고 와 내 근처에 앉았다.
호위 기사들과 같이 온 사용인들은 별장 곳곳에 배치되었고, 이 방에는 폐하와 나뿐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뭔들 못해 드리겠는가.
‘이젠 체념했다고……!’
지난 며칠간 폐하의 다정함과 외모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동반 출근길은 이제 일상이었고, 시간이 나실 때마다 찾아오셔서는 다정하게 구시는데-!
왜 이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폐하 하고 싶은 거 다 하십쇼…….
“그런데 저 지금 최후의 여행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죠?”
사형수도 죽기 직전엔 소원 들어주고 그런다는데.
혹시 그런 의미로 잘해주시는 건가!
정신 조작당하신 건 아니라 하니, 그쪽이 더 신빙성이…….
“무슨 소리야.”
폐하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가, 세상 다정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연인과 함께 온 나들이에.”
으. 으윽.
으으윽!
얼굴 근육이 또 제멋대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쿠션에 얼굴을 푹 박았다.
귓가에 폐하가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저건 분명히 놀리는 건데!
근데 태도는 왜 이러시냐고! 진짜 연인처럼!
“……폐하, 저 꼬시는 거죠.”
“꼬셔?”
“네.”
“……그건 아닌데.”
익. 이거 봐!
들이댈 대로 다 들이대 놓고!
막판에 발 빼는 거 봐!
“그럼 왜 이러시는 건데요……! 제가 어? 폐하한테 더 반해서! 수심 10,000M 정도 되는 매력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꼬르륵 잠기는 꼴을 보고 싶으신 거냐고요……!”
솔직히 말해서 이미 빠진 거 같다.
나는 글렀다고……!
쿠션에 얼굴을 묻은 채 심호흡하고 있는 와중, 폐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까지 내 매력이 깊은 줄 몰랐군.”
‘그러니 성녀가 나한테 빠지는 것도 당연해.’ 같은 뉘앙스의 말일 게 분명한데.
묘하게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하시는 느낌이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5번 조항 ‘평소처럼 지내기’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음. 내가 심했네. 미안.”
“앗, 사과하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최애가 사과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가만 생각해 보니 또 급발진해서 ‘내가 폐하한테 반하다 못해 허덕이고 있다’라고 고백한 꼴이었다.
뺨이 후끈후끈한 게, 또 얼굴이 붉어져 있을 게 뻔했지.
후후……. 내가 폐하 앞에서 하루 이틀 이러나.
‘에잇, 몰라.’
나는 폐하가 가져온 쿠키를 집어 먹으며 바다를 바라봤다.
이렇게 멀리까지 그냥 놀러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
‘이런 것도 괜찮다.’
왜들 그렇게 물멍, 불멍 하나 싶었는데.
마음의 안정감이랄까……!
그동안 일하고 공부하고 훈련하고.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던 내 백수 본능이 꿈틀거린다.
데르아치만 해결되면 돈 많은 백수 노릇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폐하는 노후 계획 같은 거 있으세요?”
“……딱히 없는 거 같은데.”
“전 어렸을 때 나이 들면 바닷가에서 살고 싶었어요.”
“바닷가?”
“제 로망이었거든요. 바닷가에 평화로운 집 한 채,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면서 무릎에 고양이를 올려놓는……!”
“퓨!”
아, 방에 폐하랑 나 말고 퓨도 있었지.
지금껏 인형처럼 얌전히 있던 퓨는 내 과거 로망에 질투하듯 성을 냈다.
내가 있는데 누굴 무릎 위에 올려놓느냐는 소리 같았지만.
걱정하지 마, 퓨.
고양이는……. 나 안 좋아하거든. 흑흑.
“그러고 싶어?”
“한때 그랬다는 거죠. 어렸을 때요.”
폐하가 황궁에 계신 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폐하 눈이 바다고 하늘이고 어깨가 태평양인데-!
내 시력 평생 지켜.
청력은 정상인 범주로 떨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시력은 안 된다고……!
그런 뒤 폐하와 나 사이에 아늑한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는 잔잔한 바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도중 폐하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러다 말할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봄이 끝날 때쯤에 성녀가 니세포르엘 신전에 가서 몇 달 지내야 할지도 몰라.”
전쟁 때문이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황궁에 있을 줄 알았는데, 니세포르엘 신전 행인가?
“이 세계에 성녀가 소환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까.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후후. 그렇게 이유를 만들어내셔도 저 다 아는데요.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요?”
“……갔으면 좋겠어.”
진심이 묻어나오는 폐하의 목소리가 애절했다.
으으으. 나 버림받은 강아지 연기하는 폐하보다 지금 폐하가 더 좋을지도……!
후욱후욱.
나는 차올라오는 덕심을 누르며 폐하에게 물었다.
“제가 신전으로 가면 몇 달 뒤엔 저 데리러 오실 거예요?”
“그래.”
“폐하가 직접 데리러 오신다고 약속해주세요.”
몸 다치지 말고 오시란 의미였다.
“내가 직접 갈게.”
폐하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가라 하시면 가 있을게요.”
내 손으로 직접 데르아치의 뒤통수를 때려주면 좋겠지만.
제일 우선시 돼야 할 건 ‘걸리적거리지 말기’였다.
도움이 되고 말고는 이후의 문제고.
‘으. 전쟁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화가 최고라니까.
“폐하, 그리고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내 말에 폐하가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들이 한 번 더 가요.”
“그래. 숲도 좋으면 엔치라에 성이 하나 있는데-.”
“아뇨.”
부자는 역시 다르다.
다른 지역에 성 갖고 있단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번 나들이 계획은 제가 맡을래요.”
신전 가면 몇 달 동안 폐하 못 본다는 건데, 사심 좀 채워도 되지 않을까-!
안 채우고 신전 들어가면 나…….
병 걸릴지도…….
“그러니까 폐하는 제 계획대로 따라와 주세요.”
***
타닥. 탁.
고요한 방을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알렌드는 러그에 앉아 상당히 오래돼 보이는 낡은 일기장을 펼쳐 읽고 있었다.
“…….”
일기장의 페이지를 세 번째 넘겼을 때,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역사책을 읽다가 잠들어버린 아리가 있었다.
“……매력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꼬르륵 잠기는 꼴을 보고 싶으신 거냐고요……!”
성녀는 알까.
그때 제가 ‘보고 싶다’라고 대답할 뻔한 것을.
‘저만 봐줬으면 좋겠다’던가 ‘저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던가.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을.
하지만.
“그럴 자격이 없어. 나는.”
알렌드는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아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거……. 폐하한테 줄…….”
피식.
알렌드는 아리의 잠꼬대에 미소를 지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숄을 올려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아리.”
그리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아리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나도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
“침입자다!”
데르아치 공국. ‘공장’의 본사.
백에 가까운 숫자의 직원들이 거대한 공장 내부를 분주히 뛰어다니며 침입자를 수색하고 있었다.
공장장실에 들어온 침입자가 ‘도면’을 훔쳤다.
“공장장님! 보이지 않습니다!”
“더 찾아봐라, 더! 아직 내부에 있을 테니까!”
공장장 파크의 고함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게 어떤 것인데……!’
데르아치 공국의 중심이 되는 세 개의 공장.
그 공장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것이 ‘도면’이었다.
각 층에 있는 방의 개수와 크기, 그 역할, 배치 인원…….
그뿐이랴.
비밀통로, 금고, 무기고 등 보안과 전투력에 직결되는 민감한 정보마저 담겨 있었다.
‘데르아치 대공님께서 날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파크는 온몸에 오한이 들고 식은땀이 흘렀다.
대공이 얼마나 자비가 없는 자인지는, 대공의 하인부터 시작해 공장장의 자리에 오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대공에게 인정받기 위해 저도 무자비함을 일삼았지만, 언제나 대공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원장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게 살려달라 무릎 꿇고 애원하던 보육원의 어린아이.
파크는 제가 쥔 검이 그 여린 살을 벤 감각을 십수 년이 흐른 지금에도 잊을 수 없었다.
보육원을 불태우고 저항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베었다.
고작 아이 하나를 신전의 후보로 보내기 위해 영주였던 데르아치가 꾸민 일이었다.
그런 대공이, 도면을 도둑맞고 침입자를 찾지도 못했다는 보고를 들으면…….
“공장장님! 이쪽입니다! 지하 수로와 이어진 곳으로 빠져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알았다! 내가 가겠다!”
마음이 급해진 파크가 직원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휑해진 복도.
천장의 작동을 멈춘 환풍구 안에서, 가림막 틈 사이로 아래의 동향을 살피는 이가 있었다.
“…….”
어깨 위 기장의 블론드 머리카락.
매혹적인 헤이즐넛 색 눈동자.
기품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외모.
‘귀찮게 걸렸네.’
은신 복장을 한 샤를은 속으로 혀를 찼다.
미끼가 먹힌 모양이지만 공장 밖으로 몰래 나가려면 장애물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것도 무척 애를 써야만 나갈 수 있는.
‘이제 어쩐다…….’
드물게 곤란한 낯을 지은 그녀의 품엔 둘둘 말린 도면이 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