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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80화 (80/150)

80화

“아니, 그렇긴 한데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실 줄은 몰랐죠……!

저는 우리가 연애한다는 소문을 데르아치한테 들려주고 싶었던 거라고요……!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왜 과하지?”

우리는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다.

이쪽을 보는 듯한 헨켈 대장과 듄의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네?”

“연인들이라면 원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잖아.”

“폐, 폐하. 5번 조항 잊으셨어요? ‘소문을 부인하지 않는 대신에 평소처럼 지낸다.’”

‘평소처럼 지낸다.’라는 말은 내가 꺼낸 것이었다.

애초에 소문까지가 내 목적이라서, 위장 연애에 관한 폐하의 부담을 좀 덜어 드릴까 하고 낸 의견이었는데.

‘내가 먼저 방어용으로 말할 줄은 몰랐지.’

폐하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래서 평소대로 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평소대로예요……!”

폐하는 이 상황이 재밌으실지 몰라도 나는 미치고 팔짝 뛰겠다.

“성녀께선…….”

나, 이 목소리 알지.

절대 보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내가 지금 다시는 못 보리라 생각하던 최애의 희귀 장면을 볼 기회를 접했는데…….

참을 수 있을까……!

‘못 참지, 나는…!’

홀린 듯 내 시선이 폐하의 얼굴로 돌아갔다.

아래로 늘어진 눈썹,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푸른색 유리구슬 같은 눈망울.

우수에 젖은 얼굴로 씁쓸하게 짓는 미소까지.

상처받은 강아지 같은 저 모습은……!

“저와 함께 아침 시간을 보내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시는군요.”

뭐지. 나 오늘 복권 1등 당첨될 운이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랑 맞바꿨나.

아찔함에 캄캄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진짜……!

***

황제의 집무실.

알렌드는 책상에 앉아 오전의 일을 회상했다.

“으아아…….”

예배당에 가서도 제 외모와 연기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니, 성녀는 결국 질겁하며 저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얼굴이었지.’

알렌드는 피식 웃었다.

헨켈이 그런 황제의 모습을 보고 말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

“네. 성녀님과 함께하시는 게 폐하께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알렌드의 입매가 어색하게 굳었다.

믿을 수 있는 충신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고민하던 알렌드는, 꾸며내지 않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즐겁긴 하군.”

“그렇습니까.”

헨켈은 주인의 연애 소식에 마음 한구석에 뿌듯함을 느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 호위 기사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알렌드는 책상 위의 우편물들을 집어 들었다.

일정 신분 이상이거나 황제의 언질이 따로 있는 이들의 우편만 황제에게 전달되었는데,

“…….”

알렌드는 한 우편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비소를 머금었다.

헨켈은 그런 황제에게서 심상치 않음을 읽었다.

그는 황제의 손에 들린 우편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밀랍에 찍힌 인장 모양이 꽤 익숙했다.

데르아치 대공가의 문양.

“폐하.”

“무슨 소리를 써놨는지나 볼까.”

부욱.

알렌드의 손에서 겉봉투가 두 동강이 나 갈라졌다.

속지도 반쯤 찢겼지만, 무슨 상관인가.

무심한 눈길로 찢긴 속지를 훑어보았다.

“내용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헨켈의 물음에 알렌드는 너덜너덜해진 우편을 넘겼다.

깍지를 낀 알렌드의 입에서 냉소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초대장이라니. 데르아치 대공이 꽤 할 일이 없나 보군.”

***

충격적인 아침을 보낸 그 날 오후.

나는 빈 회의실에서 에본 재상님에게 수업받는 중이었다.

왜 회의실이냐면,

노는 공간 중에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을 만한 곳이 여기뿐이기 때문이지.

에본 재상님과 나는 여섯 개의 빈 좌석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재상님, 사람이 갑자기 변하게 되는 계기가 뭘까요.”

수업의 마무리, 질문 시간이 찾아오자 나는 냉큼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폐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계약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내켜 하지 않는 듯하시더니.

오늘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나타나셔서 적극적인 연인 행세를……!

덕분에 희귀한 모습 많이 봐서 좋긴 한데……!

감당할 수 없어 너무 힘들다.

나는 이제 폐하를 순수한 덕심으로만 볼 수 없으니까……. 흑흑.

한 달이 뭐야.

이대로라면 내 심장은 일주일도 못 버틸 게 분명했다.

‘저녁에도 물약 마셔둬야겠어…….’

약발에라도 기대야지.

“사람이 변하는 계기요?”

“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뭐가 있을까요?”

물론 폐하가 일반적인 계기로 변하신 건 아니겠지만.

괜히 자세하게 물어봤다가 폐하인 거 재상님한테 들킬라.

“사람이 잘 변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변하게 된다면.”

“그러면요?”

“살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가문에서 어린 시절부터 받은 학대가 쌓여 터졌다든가, 지키고 싶었던 소중한 걸 눈앞에서 잃었다거나.”

에본 재상님은 굳은 눈빛으로 말했다.

묘하게 구체적인 게, 경험담 갖기도 하고…….

“……그렇게 거창한 계기는 아닌 거 같긴 한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폐하가 하루아침에 달라지실 이유는 그 위장 연애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그게 이렇게까지 달라지실 일인가……!

솔직히 예배당 퇴근하고 여기까지 오면서도 쫄았다.

갑자기 나타난 폐하한테 외모 공격받을까 봐……!

폐하가 바쁘신 몸이라 다행이었지.

‘정말 위장 연애 말고 무슨 일이 생기셨나?’

에본 재상님 말대로 커다란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성녀님께 도움이 될 만한 답은 아니었나 보군요.”

“아, 아니에요. 완전 도움 됐는걸요!”

별 소득은 없었지만, 우리 선생님을 시무룩하게 만들 수는 없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주제를 초콜릿으로 돌렸다.

지난 수업 때 드셔 보라고 가져왔는데, 먹고 조용히 감탄하다 나한테 들키셨다.

“맛있어요? 재상님?”

“……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재상님이 좋아하시는 맛이에요?”

“…….”

더 놀리고 싶었지만 참고 그만했다.

하여튼 그때 감상을 듣다가 젠달의 특산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말이 나와서,

최근엔 구체화 방안에 대해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창 초콜릿 대화를 하던 중, 에본 재상님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부터 수업 하나를 더 들으시는군요.”

“어, 제가요?”

“네. 황제 폐하와 함께…….”

헉. 설마 아침 강의 다시 시작하는 건가.

내 방 침대 아래에 숨겨둔 진도 못 나간 자료들을 생각하며 잠깐 두근거렸는데,

“춤 수업을 들으신다고.”

에본 재상님의 말에 잠시 숨이 멈췄다.

잘못 들었나?

나는 검지로 날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제가?”

“네. 성녀님께서.”

“춤을?”

“네. 춤 수업을.”

“추, 춤…….”

춤 수업이라니-?!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막아냈다.

***

“성녀님께선 들으신 게 없다고요……? 아마……. 교양 과목이니……. 전 다음 업무가 있어서 이만…….”

에본 재상님을 붙잡고 추궁해봤지만, 재상님은 내가 좁힌 거리를 다시 슬금슬금 벌린 뒤 자리를 떴다.

‘아무리 교양 과목이라도 그렇지!’

내 인생에 춤은, 춤은 안 된다……!

삐걱거림만 남았던 무도회 ‘첫 춤’의 악몽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여기 와서 춤 수업 한 번 안 받아봤겠는가!

‘배워도…… 안 됐다고…….’

회의실에 남은 나는 그 길로 곧장 폐하에게 달려갔다.

집무실의 책상에 앉은 폐하는, 생글거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날 맞이했다.

“성녀, 또 뵙는군요.”

윽. 저 상큼한 미소 뭐지.

잠시 주춤했지만 춤만큼은 안 됐다.

나는 폐하의 책상을 두 손으로 짚고 서서 진지하게 건의했다.

“춤 수업, 반대합니다.”

“성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리해야죠. 알겠습니다.”

“네?”

이렇게 쉽게 알겠다고 하신다고?

우, 우리 폐하가 이럴 분이 아닌데!

고개를 좀 더 숙여 힐끔 뒤쪽을 바라보니 헨켈 대장과 슬린 경이 보였다.

나는 목소리를 내는 대신 손가락으로 책상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내가 폐하의 맞은편에 서 있어서 방향이 안 맞긴 했지만, 폐하의 동체 시력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뛰어날 테니까……!

[왜요? 정말 저 춤 수업 안 들어도 돼요?]

날 놀리려는 생각으로 이번 일을 꾸미신 거라 확신했는데.

이렇게 곱게 물러나시다니.

춤출 일이 없어지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의아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폐하는 내가 적은 글자를 알아봤는지, 대답을 술술 하셨다.

“생각해 보니 성녀의 의사를 못 들었더군요.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죠.”

진짜 무슨 심각한 일 있나 봐. 우리 폐하……!

예전 같았으면 춤 수업 들으라고 외모 공격이 들어오고도 남았을 타이밍인데!

이쯤 되니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폐하 어제 머리라도 세게 부딪히신 건]

걱정되는 마음에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시야 안에 들어온 폐하의 수려한 손가락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성녀, 이렇게 하실 말씀이 많다니. 혹시 춤 수업에 미련이 남으신 건 아닌지.”

“아, 안 남았는데요!”

헙. 나 지금 내 무덤 파고 있었나!

나는 후다닥 책상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했다.

그리곤 폐하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두뇌를 핑핑 돌렸다.

하지만.

‘도저히 모르겠다. 이런 폐하 처음이라고……!’

설마 게임의 스킬 각성처럼 다정 버전을 각성해오신 건 아니겠지.

감당 못 할 미래가 그려지는 거 같기도 하고…….

걱정하는 사이, 폐하가 입술을 움직였다.

“정 아쉬우시면 둘이서 나들이라도 가시겠습니까?”

내 두뇌. 예측하랬더니 환청을 만들고 있네.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폐하에게 말했다.

“앗, 제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어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같이 나들이를 가자고 말했죠.”

이게 왜 진짜…….

천연 벌꿀 100%보다도 더 달콤한 폐하의 목소리에 나는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왜, 왜요?”

“글쎄요. 연애 중이니까?”

후후…….

……신성력에 정신 조작당한 사람 구분법이 입문서에 적혀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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