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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79화 (79/150)

79화

말했다.

‘말해버렸어……!’

후끈한 기운이 꼬리뼈에서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갔다.

모르긴 해도 지금 나한테 찬물을 끼얹으면 수증기가 확 하고 올라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고막도 쿵쿵 울리고 있었고.

‘사심처럼 보일까? 그래 보이겠지?’

차마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침묵. 무섭다. 흑흑.

“아, 아니.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이미 소문은 나버렸고, 해명한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 같고.”

“……그래서?”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거 위장 연애 한번 해보자는 거죠.”

나는 잘 봐달란 의미로 슬쩍 고개를 들어 헤헤 웃었다.

“성녀. ……난 잘 모르겠는데. 그게 왜 그런 결론에 도출되지?”

단호하시군.

뭐, 내 제안을 폐하가 ‘그래. 그렇게 해보자.’라며 덥석 물 거란 기대도 없었지만.

‘이걸 어떻게 포장해야 하냐아아.’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솔직하게 ‘좀 전에 든 생각인데요, 제가 폐하랑 사귄다고 하면 데르아치가 꽁무니 빼고 도망갈 거 같아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게, 그러니까…….”

으-.

상상 속의 나는 벌써 훌륭한 계략을 펼쳐 폐하와 이런저런 합의까지 봤는데.

현실은 말 한마디 제대로 떼지 못했다.

……사실 예상했어.

‘위장이래도 내가 폐하한테 연애하자고 꼬시는 거잖아-!’

지금도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 손가락 끝까지 덜덜 떨리는데!

용케도 “위장 연애하실래요?”까지 물어봤다 싶다.

……계략은 무슨.

내 인생이 언제 내 생각대로 착착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그냥 밀고 나가자.

폐하가 좀 더 안전해질 수 있는 장치가 늘었으면 하니까……!

“성녀?”

“좋아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이번 소문으로 아주 곤란해졌거든요.”

“……알아. 그러니까 성녀에게 더는 피해가 안 가도록-.”

“폐하.”

내가 폐하 지켜본 날이 몇 달인데.

이제 폐하가 날 어떻게 대하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단 말이지.

성녀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며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내게 하는 둥, 검은 머리일 땐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둥.

폐하는, 젠달의 성녀 이미지를 지키고 싶어 하신다고……!

“그거 아세요?”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여배우를 떠올리며 시선을 내렸다.

“전 이제 시집도 못 가요.”

주르륵.

누가 듣고 있었으면 아마 마시던 주스를 흘리지 않았을까.

이런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대사가 내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지만.

하여튼.

폐하한테 꽤 잘 먹힌 모양이었다.

“이미 소문이 이렇게 나버렸는걸요……! 아니라고 해명해도, 누가 그걸 믿겠어요……! 전, 전 이제 시집은 글러 먹었어요-!”

“그, 런…….”

저렇게 말까지 제대로 못 내뱉으며 당황하는 폐하는 처음이란 말이지!

폐하는 마른 세수를 두어 번 하더니 결연한 얼굴로 소파를 벗어났다.

그 와중에 한숨 쉬는 얼굴 왜 이렇게 잘생기셨냐…….

“역시 기억을 다 없애는 게 좋겠어. 시간은 걸리더라도, 내가 직접-.”

“익. 그거 정신 조작이잖아요. 잘못하면 백치가 되는……!”

“내가 하면 정신에 무리가 안 갈 정도로 할 수 있어. 신아리, 몇 달만 기다려.”

몇 달은 무슨!

폐하, 몇 달 뒤에 전쟁할지도 모른다면서요!

전쟁이라니까 또 걱정된다.

나는 구구절절하게 폐하를 설득했다.

“그것보다는 그냥 연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낫잖아요. 그리고 위장이라니까요? 저 손도 안 잡고 아무것도 안 할게요!”

“그러면 더더욱 안 돼. 그런 거짓된 관계보다는 진실한-.”

“그러면 더 문제가 없는데요. 저 폐하 좋아하니까.”

“……성녀는 나보단 좋은-.”

“폐하보다 좋은 사람 만나라고요?”

허구한 날 들어대는 통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지겨워 진짜.”

“……뭐?”

폐하는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로 되물었다.

충격받은 듯한 모습에 조금 쫄았는데, 내가 요즘 배짱이 늘었단 말이지.

폐하가 많이 봐주셔서 그런 거겠지만.

그런 김에 나는 좀 더 배짱을 부려보기로 했다.

“매번 이런 식이잖아요. 폐하는 본인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하시고, 저는 폐하보다 좋은 사람을 못 찾겠고.”

좋은 사람 조건에 외모 포함이란 말은 생략하자.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실랑이하느니, 이번 기회에 직접 겪어보는 건 어때요?”

“…….”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말도 있잖아요. 폐하가 본인을 좋은 사람이라 느끼실 수도 있고, 제가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깐요.”

폐하는 가만히 듣고만 계셨는데, 오히려 잘 됐다.

선전포고하듯 말할 수 있었으니까.

“소문이야, 나중에 아니라고 공표해도 좋잖아요. 그러니까 딱 한 달.”

나는 검지를 세워 폐하한테 들이밀었다.

“한 달만 연애 한 번 해봅시다.”

한 달이면 데르아치한테도 성녀가 젠달의 황제를 좋아한다는 말이 들어가고도 남겠지?

“그래서 폐하가 제 이상과 달리 정말로 좋은 사람이 아니면 제가 포기할게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아무리 이상을 높게 잡아봤자 폐하 외모 앞에서는 다 부질없더라니까.

책상 의자에 앉은 나는 저 멀리 소파에 있는 폐하를 향해 에어 악수를 청했다.

“딜?”

***

늦은 밤, 알렌드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손에 든 종이 한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할 문제였다.’

결국 성녀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성녀의 말처럼, 물레방아 돌리듯 같은 문제로 실랑이를 반복하며 살 순 없었다.

언젠가는 매듭을 지었어야 할 문제.

알렌드는 내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성녀가 저한테 줬던 마음을 접는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이렇듯 가슴이 답답한 건 여전히 죄책감이 남아서일 터였다.

치료 신관도 딱히 몸에 이상은 없다고 했으니.

성녀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라질 증상이라, 알렌드는 생각했다.

“계약서도 하나 작성해요.”

알렌드가 손에 쥔 것은 연애 계약서였다.

진짜 연애는 아니니 서로 지켜줬으면 하는 것들을 사항으로 만들어 계약서를 작성하자 했다.

“음, 첫 번째는요-. 일부러 나쁜 사람인 척 행동하지 말기.”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주겠다는 제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성녀는 가장 먼저 그런 조건을 제시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알겠다고 했다.

그리곤 서로 희망하는 것들을 주고받은 뒤, 상대방이 동의하면 계약서에 채워 넣었다.

“아, 기한도 넣어요. 한 달 뒤에 이 관계는 끝낸다.”

알렌드는 계약서의 아랫단을 응시했다.

한 달이라는 기한과 두 개의 서명.

둘만 아는 계약이 체결됐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성녀가 저를 싫어하게 될까.

“이,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그러고 보니 성녀는 잘해주는 걸 곤욕스러워했지.

제 얼굴에 넘어가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줄 때는 ‘성격 정말 나쁘다.’라며 치를 떨지 않았는가.

“…….”

고민하던 알렌드의 눈이 짓궂은 빛을 띠었다.

***

뭐, 뭐지.

예배당으로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궁 밖으로 나간 지 3초 만에 궁 안으로 뛰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아-!’

방금 뭘 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세상이 아닌 천상계에서 볼 법한 미모였는데.

‘잘못 본 거야. 잘못 본 거.’

나는 슬며시 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내가 본 것을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폐하가 헨켈 대장을 대동하고 프로딘타 궁 문 앞에 서 있었다.

게다가 평상시보다 각이 잡힌 제복에, 포마드로 자연스럽게 올려 얼굴을 살리는 헤어 스타일에.

소매의 사파이어 커프스단추와 옷깃의 브로치까지.

나와 눈이 마주친 폐하가 싱긋 웃었다.

“성녀. 지난밤은 잘 지내셨습니까.”

악. 내, 내 눈.

나 지금 꿈속에서 출근 준비 끝내고 나오는 길인가.

현실의 내 몸은 아직 이불 속에 있는 게 분명했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

“꿈……!”

“현실입니다.”

꿈이 아니라신다.

나는 거대한 문틀 뒤에 숨어 얼굴만 반쯤 내놓은 채 폐하에게 물었다.

“왜, 왜 아침부터 여기 계세요……?”

“황실 예배당에 기도하러 가는 길에 들렸습니다. 성녀께서 이 시간쯤 예배당으로 가시는 게 기억이 나서.”

폐하는 기도 안 하시잖아요……!

내가 출근하는 몇 달 동안 폐하가 예배당에 오신 건 세 번 정도 될까.

라울 신관님이 이렇게 편한 직장은 또 없을 거라며 즐거워하셨다.

어쨌든, 뭔데요. 이거.

다정 버전 왜 갑자기 되살아난 건데요……!

“그, 그, 그래서요?”

아침부터 폐하 얼굴을 봐서 기분 좋은 것보다, 무서운 감정이 앞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기분.

“성녀는……. 보고 있으면 재밌어.”

똘마니 시절에 보던 성격 나쁜 폐하잖아.

나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폐하를 바라봤다.

그런데 오늘따라 미모가 빛이 나시네.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도자기 같은 피부, 의느님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며 두 손 들 것만 같은 콧대, 그림자가 질만큼 기다란 속눈썹, 딱 보기 좋을 만큼의 붉은 입술에…….

“같이 가실까요?”

“네.”

…….

으아아. 안 돼. 내 몸! 또 홀린 거지! 왜 배신하는데!

경계하자는 좀전의 마음가짐은 어디로 갔는지, 내 몸은 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까지 해버리곤 폐하 앞으로 걸어갔다.

“기쁘군요. 성녀와 아침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세상에.

내가 잊고 있었는데, 우리 폐하 연기 천재였지.

나, 나, 나-!

‘나 이제 어떻게 하지……!’

왜 갑자기 다정한 황제 연기를 하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어제 계약서 때문인가.

뒷장에 나도 모르는 말이 적혀있었다거나.

‘계약서 서명할 때는 뒷장까지 확인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당장 내방으로 올라가서 계약서를 확인해보고 싶은 맘이었지만, 내 몸이 도통 도와주질 않았다.

폐하 옆에서 삐걱거리며 걷고 있으라 바빴거든.

예배당 출근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저, 저기 봐……! 성녀님이랑 황제 폐하가 함께 계셔……!”

“세이칸 신께서 사랑받는 두 분이 한 쌍이시라니. 그냥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살아있길 잘했어.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폐하랑 나랑 연애한다는 소문을 널리 퍼트리자는 내 계획대로 돼가는 거 같긴 한데.

왜 이렇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거지……!

“폐, 폐하.”

결국 나는 뒤쪽에서 쫓아오는 헨켈 대장과 듄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자 폐하도 나한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성녀가 한 달 동안 해보자며.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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