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말도 해!
그것도 완전 우수에 찬 얼굴로!
“어……? 말…….”
등신대가 아니라 진짜 폐하였다.
‘폐하가 왜 내 방문 앞에……?’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사방을 경계했다.
주, 주변에 사람은 없나! 목격자는! 장작은!
다행히 텅 빈 복도였다.
나는 복도의 카디얀과 시선을 교환한 뒤, 폐하의 소맷단을 잡아당겼다.
“……아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네. 한겨울인데.”
그리곤 내가 언제 비명을 질렀냐는 듯 자연스럽게 폐하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폐하를 등지고 문을 닫는데, 카디얀과 눈이 마주쳤다.
카디얀, 흐뭇한 미소. 제발. 소문 거짓말인 거 알잖아요. 흑흑.
“뭐 하는 거야.”
“폐하랑 제가 같이 있는 걸 누가 보면 안 되거든요. 카디얀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편이니까.”
“편?”
“그런 게 있…….”
나는 몸을 돌렸다가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뒤 소맷단을 놓고 후다닥 폐하와 거리를 벌렸다.
‘왜 미간에도 후광이 나는 건데!’
후폭풍이다. 후폭풍이 찾아온 게 분명했다.
‘위험해!’
그간의 경험으로 보건대,
후폭풍이 왔을 때의 폐하는 내가 아무리 내공을 쌓았다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상책이란 말이지……!
“신아리.”
“으아아아. 다가오지 마세요-!”
나는 폐하를 향해 양팔로 엑스자를 만들며 방어했다.
가까워지던 폐하의 발소리가 멎고, 대신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처받은 건가?”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눈을 굴렸다.
폐하의 후광에 내 각막이 상처받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
“……내 탓이야.”
폐하는 각막의 안부를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책까지 하셨다.
크흡. 제 각막 걱정을 이 정도로……!
“미안해.”
엥?
거기까지 들은 나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우리 폐하가 내 각막 좀 다치게 했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실 분이 아닌데.
‘내(가 너무 잘난) 탓이야. 다음부턴 성녀가 조심해.’라 말하셨으면 몰라도!
……아, 혹시.
“폐하도 소문 들으셨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폐하가 이렇게 진지한 분위기를 자아낼 일이 우리 사이에 뭐가 더 있겠는가.
그 낯부끄러운 소문을 폐하도 들어버린 게 분명했다.
“들었어.”라는 폐하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감돌았다.
후후. 민망하다.
폐하도 그러시겠지.
‘그런 엄한 소문이 난 상대방이랑 같은 공간에 있게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폐하를 방으로 끌고 들어왔으니까.
우리 폐하, 뻘쭘해지시면 안 돼…….
그래서 민망하시지 않게 열심히 떠들었는데, 그만 너무 떠들어버렸지.
“……다들 막 이상한 소리만 한다니깐요. 폐하가 막 침대에서 엄청나시다거나…….”
헙. 나는 뒤늦게 내가 뱉은 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왜 하필이면 초비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버린 건데……!
바닥을 보고 있어서 폐하의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흐르고 있는 공기는 어색함이 분명했다.
이대로는 안 돼.
나는 했던 말을 수습한다고 입을 다시 열었다.
“그, 그런데! 좋은 거 아니겠어요. 건강하다느…….”
“성녀.”
“네, 넵.”
횡설수설하던 나는 훅 들어온 폐하의 음성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왼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른손의 손바닥을 내 쪽으로 들어 올린 폐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만해.”
폐하의 커다란 손에 이목구비가 다 가려진 덕분에, 나는 폐하를 똑바로 볼 수 있었는데.
핏대가 돋아난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폐하, 왜 그러세…….”
“……그 침대에서 소리…….”
폐하가 손에서 얼굴을 슬쩍 뗐다.
사르르 흩어지는 결 좋은 금발, 붉어진 볼,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푸른 눈.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씀하신 폐하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 눈을 피하셨다.
아아…….
저 오늘 여기서 눈 감습니다.
***
희미한 연기가 달리는 마차의 창밖으로 흘러나왔다.
마차 안에 있는 랑데트 후작이 피우는 시가의 연기였다.
“…….”
성녀와 황제의 열애설이 황궁 밖 귀족들에게 퍼진 건 어젯밤이었다.
마담 레더의 독서 모임에서 한 귀족이 대단한 얘기를 들었다며 말한 것이 발단.
급속도로 소문은 퍼졌다.
랑데트 후작도 빠르게 소문을 접했다.
그와 뜻을 같이한 귀족이, 그 독서 모임에 참석했다가 혼비백산하며 랑데트 후작에게 달려온 탓이었다.
‘성녀를 갖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젠달의 성녀’와 ‘황제의 연인인 성녀’가 갖는 의미는 명백히 달랐다.
데르아치 대공의 계획대로라면 모든 일이 끝나면 황제는 죽게 될 터.
‘연인의 복수…….’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랑데트 후작 본인이 더 잘 알았다.
게다가.
이제 일의 성공만을 말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성녀가 황제의 연인이 된 이상, 그녀는 황제의 편이 되어줄 텐데.
이기리라 자부했던 지난날이 오만한 것이었나.
“할아버지.”
제가 잘못되면 신전에 있는 손자는 어떻게 하지.
시가를 깊이 빨아들이는 그의 입매가 부르르 떨렸다.
“대공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랑데트 후작은 뒷말을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독한 연기와 함께 삼켰다.
덜컹.
“후작님.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데르아치 대공의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랑데트 후작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다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가 있자니, 데르아치의 대변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이, 이보게!”
앉지도 못하고 서성이던 랑데트 후작이 대변인에게 달려들었다.
“성녀께서 황제의 연인이 되셨네!”
“…….”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해결책은 있는가!”
그 기세에 대변인의 얇은 몸이 휘청였다.
그는 근처 장식장을 붙들고, 랑데트 후작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안타깝게 됐군요.”
순간 랑데트 후작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이 자가 지금 웃은 것인가.
“자네 지금 웃음이 나오나? 얼마나 많은 이가 대공의 말을 믿고 여기에 가담했는지 알아!”
초조해진 랑데트 후작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공을 만나 봬야겠네.”
랑데트 후작은 대변인을 제쳤다.
응접실을 나가 대공의 방을 찾아가려 했지만, 대변인에게 팔이 잡혔다.
“대공께 가서 무얼 하시려고요?”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해결책을 여쭙고……! 해결책이 없다면 일을 무산시켜야…….”
아직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된 것은 아니니, 모든 걸 수포로 돌리면 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면 자신들의 모의는 없던 일이 되지 않겠는가.
랑데트 후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산이라. 후작님께선 정말 그러길 원하십니까?”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면 그리해야 하지 않겠나. 성녀께서 황제의 편에 서신다면 우린 승산이 없으니.”
“랑데트 후작님…….”
콜록. 콜록.
대변인은 오늘도 몸이 좋지 않은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응접실을 울리는 그의 기침 소리에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먹을까?]
[아니, 기다려.]
[먹고 싶은데.]
잘못 들었다기엔 너무나도 선명했다.
누구를 먹겠다는 건가. 설마 자신을 먹겠다는 건가.
“자, 자네……. 지금 이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랑데트 후작은 주춤 뒷걸음질했다.
“다들 닥쳐.”
대변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흘러나오자, 목소리들이 조용해졌다.
기침을 멈춘 그가 퀭한 얼굴을 들었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랑데트 후작은 그게 무척 소름 돋았다.
마치 죽어가는 이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후작님, 대공님께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아닐세.”
벗어나야 한다.
랑데트 후작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홀렸던 게 분명했다.
이런 괴물 같은 것과 손을 잡다니.
“돌아가겠네. 대공께선 몸이 불편하시지 않은가. 내가 다음에 오도록 하겠네.”
마차가 아직 밖에 있던가.
마부에게 당장 출발하자고 명령한 다음 몸을 실어야지.
저택에 도착하고. 그다음엔.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대변인이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미소 지었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대변인은 랑데트 후작에게 손을 뻗었다.
먹힌다.
제 얼굴을 덮쳐 오는 손을 보며 랑데트 후작은 겁에 질렸다.
하지만 대변인이 노린 것은 그가 쓴 단안경이었다.
지난번, 샤를과의 협상 장소에 후작이 가져간.
“차라리 잊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무엇을-!”
정신 조작계 신성석.
랑데트 후작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생존본능이 단말마적 비명으로 변해 튀어나왔다.
“잡아먹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후작님은 아직 쓸 곳이 많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대변인의 기침 소리에 후작을 비웃는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
소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후, 폐하도 나도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책상에, 폐하는 소파에 앉아 각자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을 보냈지.
적막 속에서 먼저 움직인 사람은 폐하였다.
“……내가 수습하지.”
“앗. 폐하, 잠시만요.”
나는 몸을 일으킨 폐하를 말로 붙잡았다.
“수습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공표해야지. 헛소문이라고.”
폐하의 입에서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모습을 보니 벌써 마음을 정하신 것 같은데,
“폐하, 그래도 소문은 사그라지지 않을 걸요?”
연애설이 터지고, 당사자들이 며칠 뒤에 ‘사실 저흰 연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해봤자.
“믿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고요.”
이미 엎질러버린 물이라니까.
공표하는 게 오히려 소문을 들쑤시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잊으라 명하면 돼.”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워요? 사람들 머릿속에서 기억을 지우면 몰라도.”
“…….”
그 말에 폐하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헉. 지금 진짜 그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하셨죠.”
“성녀도 때론 좋은 의견을 내는군.”
“아, 안 돼요-!”
진담이신가.
밖으로 나가려는 폐하는 당장에라도 만나는 사람들의 기억을 지울 기세였다.
나는 서둘러 폐하를 말렸다.
“그것보다는 저한테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데.”
“어떤 방법?”
그게, 어떤 방법이냐면요…….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딱딱한 의자 등받이에 이마를 박은 채 잠시 고민했다.
‘으, 말해?! 말해도 되나!?’
그래, 말한다. 질러보는 거지.
신아리. 눈 딱 감고……!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저랑 위장 연애……. 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