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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77화 (77/150)

77화

“이건 뭐야?”

샤를은 제 앞으로 온 서류를 처리하다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면담 신청서가 왜 여기에 있지?”

그녀의 전속부관인 레콩드가 종이를 보다가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제 정박한 배에서 면담 신청을 했거든요.”

“내 서류가 아니잖아. 가져가.”

“아, 함장님 서류입니다.”

샤를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나한테 일을 떠넘기는 거냐며 의심하는듯한 눈초리에 레콩드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함장님과 아는 사이라고, 읽어보시면 아실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지난번 랑데트 후작 건의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였다.

상사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걸 느낀 레콩드가 입을 열었다.

“선주가 ‘알렌’이라는 자라는데요.”

“그래서?”

“모, 모르십니까?”

“몰라.”

레콩드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제가 메모한 내용을 확인했다.

맞는데. 알렌.

하지만 시큰둥한 샤를의 얼굴을 보아하니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게, 함장님. 개인사를 여쭙는 거 같아 실례지만……. 채무 관계가 있으십니까?”

“채무 관계? 내가 누구한테 돈을 빌려줬던가?”

“아니요. 함장님께서…….”

돈을 빌리셨다거나.

샤를은 어이가 없다는 듯 레콩드를 바라봤다.

“나 돈 많아.”

“아, 압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너무 당당하게 말을 해서요. 왕녀님께서 자기네 선주에게 빚을 졌다고.”

내가 빚을 졌다고?

샤를은 눈살을 찌푸리며 면담 요청서를 확인했다.

사유란에 ‘빚’이라고만 적힌 것이 꽤 거슬렸다.

보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지는 걸 보니 기억에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레콩드. 선주 이름이 뭐라고?”

“알렌입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샤를은 코웃음을 쳤다.

녹스담 해역, 다 부서진 범선, 결박된 해적들, 갑판에 박힌 볼프만의 검, 그리고 검 손잡이의 손수건.

‘감각이라곤 없는 예명은 어디서.’

무도회에서 저와 춤을 췄던 금발의 미남.

“아시는 분 맞습니까?”

“아니.”

샤를은 신청서를 반으로 접어 책상 한쪽에 던졌다.

그리곤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런 쪼잔한 자를 내가 어떻게 알아.”

***

“오해예요, 오해!”

성녀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던 지난밤.

둘 다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헤이즐 총장님이 그랬거든요. 폐하는 외로움을 많이 타신다고.”

“……내가?”

“폐하께서 비 오는 날에 베개를 들고 총장님께 찾아왔다던데요?”

“…….”

분명 그가 헤이즐의 방에 찾아갔던 적은 있었다.

여덟 살. 신전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은 방을 사용하던 열 살 케일라가 비 오는 날이면 겁에 질려 부모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알렌드, 총장님한테 갈래. 총장님한테 집으로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볼래.”

“울어도 해결되는 건 없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알렌드는 매정해!”

총장에게 같이 가달라고 밤새 빼액 우는데, 제 고막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케일라를 처리해달라고 한밤중에 헤이즐을 찾아갔던 게 전부였다.

그 인간. 그걸 그렇게 각색해서 성녀에게 말할 줄이야.

게다가.

“……내 소장품을 가지고 있다고?”

“네. 요만한 나무함에. 그런데 폐하 동의를 못 얻어서 열어보지는 못했어요. 저 나중에 몇 개만 꺼내서 보여주시면 안 돼요?”

어린 시절의 소장품이라니.

평소 그의 수집품들을 생각한다면 멀쩡한 것들은 손에 꼽을 게 분명했다.

‘조만간 헤이즐을 찾아가 봐야겠군.’

헤이즐의 소장품을 세상에 남길지 말지는 그때 결정하기로 했다.

알렌드는 질서 정연한 회의실을 바라봤다.

“그러면 대신들의 의견을…….”

수많은 대신이 모인 자리에 랑데트 후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어 불참하겠다고 했나.

곳곳에 빈자리는 그처럼 당일 불참 소식을 전한 귀족들의 자리였다.

‘조사해보라 해야겠군.’

다른 귀족들도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지금쯤이면 개판이 됐을 회의실 안이 조용했다.

드디어 철들이 들었나.

“오늘 회의는 이만 마무리하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끝났다.

알렌드는 에본, 헨켈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알렌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리가 예배당에서 일을 끝내고 제 얼굴을 보겠다고 근처를 서성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없군.’

하지만 3일째.

밤을 지새우고 아리를 프로딘타 궁으로 데려다준 그 날 이후, 아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신변에 별일이 없다는 건 매일 보고를 받아 알고는 있지만.

저한테만 자취를 감춘 것 같아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중이었다.

그런 황제의 시선을 따라 에본과 헨켈이 주변을 훑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폐하, 무슨 일이라도?”

“아닐세.”

에본의 물음에 대답한 알렌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뒤따라오는 에본에게 말을 걸었다.

“……재상, 성녀께선 수업을 계속 받고 계시는가?”

“네. 어제도 받으셨습니다. 워낙 열심이신지라, 습득하시는 게 빠르십니다. 그날 배운 건 꼭 머릿속에 남기시더군요.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따로 공부하셨다가 다음 수업 때 그게 맞는지 여쭤보시곤 합니다.”

에본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처음에는 성녀와 같은 공간에서 수업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성녀가 열정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하니, 이제는 제가 가르치는 데에 재미를 붙여버렸다.

“그렇군.”

태연한 목소리로 답하는 알렌드의 눈썹이 남모르게 들썩였다.

어제도 수업을 받았다.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저를 보는 일과만 빠졌나.

순간 ‘아침 수업을…….’까지 생각하던 알렌드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거울의 충격이 아직 잊히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때는 두어 번 있었지만.

쓰러졌던 날 이후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내일 성녀에게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렌드의 뒤를 쫓아온 자가 있었다.

“황제 폐하.”

“프라단 후작?”

시아나의 아비, 프라단 후작이었다.

황제파 귀족의 수장 격인 인물.

대대로 황제를 섬기는 명문가, 프라단 가(家)는 신성력이 세상에서 제일이라 여기는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프라단 후작이 황제에게 뜬금없는 흐뭇한 미소를 날린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황제의 뒤를 쫓아와 말을 건 적은 없었다.

무슨 일이길래.

헨켈의 녹안과 에본의 자안이 날카롭게 후작을 살폈다.

“폐하, 제가 너무 늦게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그렇게 말하는 프라단 후작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알렌드는 영문을 몰라 그저 후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프라단 후작은 마주한 황제의 아름다운 용모에 더욱 들떠 입을 놀렸다.

“그 많은 혼담을 죄다 거절하시길래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으신가 했더니, 과연. 보통 인물로는 성에 차지 않으셨던 게지요.”

젊은 놈들이 소문을 숨긴다고 했지만, 그게 숨겨질 일인가.

황제와 성녀의 만남은 어제오늘, 황궁 밖 귀족들에게 빠르게 퍼졌다.

성녀께서 황제와 열애하고 계신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귀족파 놈들이 벌벌 떠는 통에 종전의 회의도 황제파의 의견대로 쉽게 끝났다.

이 세계에서 신성력이 가장 강한 성녀와, 젠달에서 신성력이 가장 강한 황제.

이렇게 완벽한 한 쌍이 어디에 있을까.

프라단 후작은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함께 아침을 맞으시는 깊은 사이시라면, 이참에 약혼식을 올리시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짐이 누구와 약혼식을 올린다는 건가?”

혼담이니 뭐니.

그것만으로도 달갑지 않은데.

제가 모르는 소문이, 후작의 입에서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오고 있다니.

알렌드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프라단 후작은 그런 황제를 보며 능글맞은 티를 냈다.

“당연히 성녀님 아니겠습니까.”

“성녀?”

뜻밖의 대답에 놀란 알렌드가 되물었다.

여기서 왜 성녀가 언급된단 말인가.

“그래서 말인데…….”

프라단 후작은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귀족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약혼식을 진행하시게 되면 저희 프라단 가문에서 후원을 드려도 괜찮을는지요?”

성녀님께 프라단 가를 제대로 알릴 기회였다.

프라단 후작은 속으로 기대를 부풀렸다.

황제는 그런 저를 보고 싱긋 웃었는데,

과연 성녀님의 마음을 빼앗은 남자라고 해야 할지.

탄성을 절로 부르는 외모였다.

그럼, 제가 모시는 폐하는 이렇게…….

“후작.”

이렇게…….

매서운 기운을 뿜어내는 분이셨나.

제가 무슨 말을 잘못한 걸까 싶어, 프라단은 황제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 얘기, 좀 더 자세히 해보게.”

황제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

‘남사스러워-!’

열애설이라니!

절륜한 폐하랑 밤마다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내는 사이라니!

얼굴이 홧홧해져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크흡. 결국 완벽한 폐하의 인생에 나라는 오점을 남겨버렸다.

‘남기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낯부끄러운 일을 폐하한테 상담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다행히 듄이 소속된 단체에서 소문을 가라앉히는 걸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니 나는 최대한 조용히 있기로 한 거지.

‘폐하 얼굴 보러 가는 것도 당분간 자제하고.’

괜히 폐하 얼굴 보러 갔다가 목격담이라도 나오면.

마른 장작처럼 넣어져 꺼져가는 소문도 활활 불탈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폐하 얼굴 안 보는 건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있다아…….”

나는 책상에 고이 올려둔 포토 카드들을 보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오늘이 벌써 며칠 째더라.

폐하 금단 증상 온 거 같아…….

“포토 카드 만들어두길 잘했지.”

이것마저 없었으면 벌써 본궁 다녀왔다.

“3번이 제일 잘 뽑혔단 말이야.”

대관식 착장. 미쳤다.

이 포토 카드는 천재 조각사 코아루가 나랑 잘 맞을 거 같다며 소개해준 화가, 셰엘의 실력이었는데.

“고객님, 저도 진심입니다. 황제 폐하의 외모에.”

안목마저 뛰어났다.

셰엘의 덕심과 천재적인 실력, 그리고 앙뜨완 제과점의 빵빵한 자금이 만난 결과물은 상당했다.

판화임에도 한 선, 한 선 붓으로 그린 듯한 이 섬세함!

동네 사람들, 다들 와서 폐하 초상화 좀 구경하세요…….

잠시만.

“……셰엘한테 등신대 만들어 달라고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몸을 일으켜 문으로 걸어갔다.

왜 진작 생각을 못 했지!

“당장 셰엘한테 제작 의뢰를…….”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가 그대로 몸을 멈췄다.

……나 설마 무의식중에 등신대 만들어달라고 했나?

그런데……. 역시 천재 화가…….

“이렇게 완벽한 등신대가 세상에 어디…….”

“성녀.”

“으아아-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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