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젠달의 겨울, 어느 날.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땅이 축축하게 젖은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황제의 궁에서 두 인영이 밖으로 나왔다.
“프로딘타 궁까지 데려다 준다니까.”
“저 혼자 충분히 갈 수 있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잖아요.”
“그래도. 어젯밤처럼 정신을 잃을까 봐 불안해서 그렇지. 가는 길에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해.”
“익……. 어제는 제가 허약해서가 아니었다니깐요.”
알렌드의 표정에서 짓궂음을 발견한 아리가 툴툴거렸다.
“그리고 몰래 나왔는데 폐하랑 같이 들어가면 카디얀 경 놀라요.”
알렌드는 못마땅한 듯 혀를 짧게 찼다.
“……호위 기사를 왜 붙였는지 모르겠군.”
그 말에 아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 그러면 저 아침부터 저녁까지만 호위 받아도 돼요? 폐하도 밤에는 호위 안 받으시니까, 저도 기사님들의 워라밸을…….”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안 돼.”
알렌드는 단호했다.
이성 간의 감정 문제, 혹은 행복해지라는 거나, 이상한 수업을 들으라거나 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성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줄 수 있었지만, 호위는 다른 문제였다.
데르아치가 성녀에게 침입자를 보낸 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후로 정체가 밝혀진 것만 셋.
자결한 침입자 중에도 데르아치가 보낸 이들이 있을 것이고.
굳이 데르아치가 아니더라도 성녀를 노리는 것들은 많았다.
“안 되면 말고요.”
알렌드는 제 앞에서 아쉬운 얼굴을 하는 아리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어제는 얼마나 놀랐던가.
정신을 잃은 성녀를 안아 달리고, 성녀의 숨이 잠든 사람의 호흡과 같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몸속에서 날뛰는 제 거대한 신성력의 통제마저 힘겨워질 정도로.
그런 후, 혹 제 신성력에 성녀가 다칠까, 멀찍이 떨어져 침대 위에 누운 성녀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안 되겠군.’
제가 안 되겠다.
혼자서 돌아갈 아리를 생각하니 불안이 요동쳤다.
그녀의 말대로 매일 다니는 길을 평소처럼 돌아가겠다는 건데.
왜 이리 초조해지는지.
알렌드는 아리에게 망토를 씌우며 말했다.
“근처까지만 데려다 줄게. 이렇게 하면 아무도 성녀인 줄 모르겠군.”
“대신 황궁에 걸어 다니는 부츠 괴담이 나올걸요.”
아리는 투명해지는 제 몸을 보며 걱정했다.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 몇몇은 있을 터였다.
봐도 봐도 계속 보고 싶은 게 황제의 외모인데.
경비병이든, 이른 아침을 여는 다른 이들이든.
황제에게 눈을 떼지 못할 거고, 그 옆에 걸어 다니는 부츠 또한 목격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 저주받은 부츠가 폐하한테 붙었다고 소문이 나면-.”
“……성녀, 사실 그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끔찍한데요.”
그런 것치곤 사고가 계속 그쪽으로 도는 거 같은데.
알렌드는 가볍게 웃었다.
“그런 소문이 나면 저주받은 게 아니라 진귀한 부츠라 정정해야지. 스스로 움직이는 신발이라니. 탐을 내는 사람이 제법 되겠어. 어디 숨겨놔야 하나.”
“……으. 농담하지 마세요.”
망토로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 능청맞은 소리도 절 놀리려고 하는 게 분명한데.
붉어진 뺨 아래, 자제가 안 되는 입꼬리가 제멋대로 씰룩거리고 있었으니.
‘저게 꼬시는 게 아니면-!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폐하!’
데려다주겠다, 혼자 가겠다.
두 사람이 벌인 실랑이는 알렌드의 승리로 끝났다.
황제의 궁을 떠나는 둘의 발걸음이 들리지 않을 때쯤.
귀족 하나가 근처 화단의 덤불 사이에서 기어 나왔다.
“…….”
지방 귀족인 그는 오늘 황궁을 떠날 예정이었다.
몇 달을 머물던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오다니.
어수선해진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부터 황궁을 거닐었다.
그러다 존경하는 황제가 거주하는 궁이 보여 잠시 멈춰 섰다가,
궁 밖으로 나오는 두 사람을 목격하고 놀라 바로 옆 덤불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고 있던 것이었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듯했지만, 들으면 안 되는 것을 들은 듯도 했다.
젖은 흙이 몸 이곳저곳에 묻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세, 세이칸 신이시여.”
귀족은 감격한 얼굴로 신의 이름을 불렀다.
***
“…….”
이상하다.
황궁 분위기가.
“성녀님이시다.”
“성녀님이셔.”
예배당 출근길.
평소에도 저런 소리야 종종 들리긴 했는데.
오늘처럼 엄청난 소문의 주인공이 된 기분은 든 적이 없었거든.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봐도 “성녀님”, “행복하세요”, “세이칸의 영광이 젠달에게” 같은 소리만 들렸다.
게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흐뭇하게 웃거나, 얼굴을 붉히며 피하거나, 울상을 짓거나.
아니, 무슨 일인데요.
같이 좀 알면 안 되나요.
어쨌든.
‘부담스러워…….’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의 관심이 숨 쉴 때마다 들어오는 폐하 같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안 보인다. 안 들린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 아아아-.’
나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예배당으로 갔다.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정감에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네.’라고 생각했지만.
“허허. 드디어. 축하드립니다.”
“……제가 축하받을 일이 있어요?”
“허허허.”
라울 신관님의 뜬금없는 축하와,
“축하……드립니다. 성녀님.”
“허퍼슨, 왜 울어요?”
“보니아의 기사보다는…….”
울먹이는 허퍼슨까지.
나는 내 뒤에 선 듄에게 물었다.
“……듄 경. 뭐 아는 거 있어요?”
“실력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듄은 왜 갑자기 땅굴 파는 건데요.
청소 도중에도 시선들이 날 콕콕 찌르더란 말이지.
그래서 곧장 황궁 연구소로 갔다.
방에 들렸다가 몰래 나갈까 했는데, 오늘따라 듄이 눈에 불을 켜고 호위를 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듄을 대동했지만, 오늘 내 목적은 신성력 훈련이 아니라 대피니까!
‘그래, 여기라면……!’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 있지 않아도 되겠지!
“오, 성녀님.”
지하 실험실에서 나오는 초비가 아는 척을 했다.
웬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는데.
귀족가의 사랑받는 도련님 같은, 덩치 큰 풋풋한 느낌의 남자였다.
초비와 같은 가운을 입은 걸 보니 이곳의 연구원인 듯했다.
오오. 나 여기 직원 처음 봐.
“실험실 사용하러 오셨어요?”
“겸사겸사요. 옆에 계신 분은 직원분이세요?”
“아, 얘는요-.”
“아,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영광입니다!”
연구원은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허리를 꾸벅 숙이며 우렁차게 인사했다.
옆에 선 초비가 훅 들어온 고막 테러에 인상을 쓰고 귀를 매만졌다.
“야, 병아리. 이름도 말씀 안 드리고 영광이라고 하면 성녀님께서 아시냐?”
“론데이만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
“오, 맞다. 성녀님.”
론데이만의 인사를 잘라먹은 초비가 히죽 웃으며 내게 말했다.
“황제 폐하랑…….”
“아, 아-! 소장님!”
“……연구소장님.”
론데이만과 듄이 달려들어 손으로 초비의 입을 막았다.
“왜들 그래요?”
“연구소장님께서 할 말을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네, 네! 저희 소장님이 할 말을……!”
듄은 침착하게 말했고, 론데이만은 듄의 말을 거들다 초비와 눈이 마주치자 사색이 됐다.
그런데 님들.
“~~!!”
……초비 욕하는 거 같은데요.
하여튼 나한테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여러분.”
내 말에 세 쌍의 눈이 나를 바라봤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분위기를 진지하게 잡아서인지, 듄과 론데이만이 움찔거리며 손을 스르르 내려놓았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서, 성녀님?”
꿀꺽.
긴장한 세 사람의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다른 하나는…….”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말을 하다가 마는 거죠.”
“둘 다 같은…….”
둘 다 같은 말인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
라고 론데이만은 말하려는 듯했지만, 이번에는 초비와 듄이 그의 입을 막았다.
“멍청아, 지금 화나셨다는 거잖아.”
초비는 론데이만에게 복화술로 속삭이곤,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하하. 성녀님, 화나셨어요?”
“앗,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가, 느슨해지려는 분위기에 긴장감을 더했다.
“아직 안 났어요.”
아직이라는 말에 세 사람이 급히 시선을 교환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제 물어보면 답해주겠지?
나는 진지한 척을 유지한 채, 셋에게 물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 다음은 뭔데요?”
***
그리고.
초비가 필터 없이 전해주는 날것의 소문에 내 정신은 실시간으로 나갔다가 들어오길 반복하는 중이었다.
“황제 폐하의 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나오셨다던데요?”
그건 맞지.
“매일 밤 호위 기사들을 따돌리고 황제 폐하의 궁에 다녀가신다고.”
오늘 듄이 이상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아니, 그런데 밤은 아닌데?
새벽에 멀리서 폐하 얼굴만 잠깐 보고 오는 거였다고!
“두 분끼리만 있으실 땐 연인들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씀하신다면서요?”
그거야, 폐하가 본모습을 둘이 있을 때만 드러내시니까……!
애초에 연인도 아니라고요…….
“그래서 오전에 소문이 쫙 났죠. 성녀님과 황제 폐하가 매일 밤 열렬한-!”
“으아, 으아아……!”
차마 더 듣지 못할 것 같아 손으로 초비의 입을 막았다.
나는,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란 말이야……!
나는 침대에서! 폐하는 소파에서!
각자의 구역을 지키면서 밤을 지새웠단 말이지…….
내가 소파로 가려고 했는데 절대 안 바꿔주셨다.
‘폐하가 이런 추문에 휩싸이다니……! 그것도 나랑 엮여서!’
손수건을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속상한데, 티는 못 내겠고.
밸런타인 초콜릿 오해를 풀었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들 그렇게 입 밖에도 내면 안 되는 것처럼 군 거예요?”
초비는 분홍색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곤 내 뒤쪽에 멀찍이 선 듄과 론데이만을 가리켰다.
초비가 소문의 내용을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뒷걸음질을 치던 둘은, 더 갈 곳을 찾지 못해 벽에 딱 붙어 있는 중이었다.
“듄 경이랑 론데이만이요?”
둘은 고개를 돌린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딴청을 부렸다.
“즈네 드리(쟤네 둘이).”
아, 내 손.
곧바로 초비한테서 손을 떼자, 선명해진 목소리가 이어 흘러나왔다.
“속해있는 단체가 워낙 극성이라서요. 퍼질 대로 퍼진 소문 단속한다고 소문에 관해선 입도 뻥긋하지 말라 그러더라니까요.”
“단체요?”
“뭐, 좋아하는 걸 지키는…….”
그러자 듄과 론데이만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초비는 그런 두 사람이 지겹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꼬리를 흐렸다.
뭐지. 무슨 동아리 같은 걸 하나.
건전한 황궁 문화를 추구하는…….
“그런데 성녀님.”
단체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초비가 날 불렀다.
그리곤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는데,
“폐하 말인데요……. 침대에서 정신까지 잃을 정도예요?”
“…….”
으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