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신음을 듣자마자 튀었어야 했는데.
나는 텅 빈 하얀색 공간에 누워서 그렇게 생각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질적인 느낌의 공간이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나는 잽싸게 일어나 내 몸을 훑었다.
사지 멀쩡히 다 있고, 상태도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퓨가 없는 것만 빼면.
나는 볼을 세게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아프다, 아파.
현실인가? 싶었는데, 눈앞에 있는 나무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뭐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갖가지 색의 나뭇잎을 가진 커다란 나무였다.
마치 ‘나 컬러링북 할 건데 내 48색 색연필 다 쓸 거임.’ 하고 열심히 색칠한 것 같달까.
그 와중에 검은색은 하나도 없는 게, 이 세계 고증 완벽하네.
“…….”
공간을 한 바퀴 둘러봤다.
나무 말고 별다른 건 없고…….
“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나무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님.”
지금 내 모습이 나무에 말 거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장소엔 나밖에 없는 데다가, 뭔가 촉이 오는 게 있었단 말이지.
‘범상치 않아.’
나는 눈매를 좁혔다.
하늘에서 성스러운 음악이라도 흘러나올 법한 저 나무의 자태.
조금 전까지 ‘한겨울밤의 공포체험’ 같은 걸 경험하던 나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우리 폐하 외모에 어울릴 법한 이런 홀리한 장소에 있다니.
이건 꿈이거나, 내가 죽었거나, 정신만 다른 공간으로 왔거나.
셋 중 하나지 않을까.
그리고 ‘성녀’인 내가 이런 상황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존재는.
“세이칸 님?”
촤아아아-.
그러자 나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색색의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스치며 소리를 냈다.
정말로……?
내 찍기가 맞는 날이 오다니.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와. 그 나무가 화신체 그런 거예요?”
이 세계에 온 지 대략 9개월.
드디어 말로만 듣던 세이칸 영접하나……!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걸음을 몇 발자국 앞으로 옮겼다.
나무는 이제 내 코앞에 있었다.
“세이칸 님이구나. 와…….”
퍼억.
나는 있는 힘껏 발로 나무를 걷어찼다.
무슨 마을 어귀에 있는 몇백 년 된 은행나무 크기라 꿈쩍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촤아아아아-.
놀란 모양인지 나무는 세이칸이라 불렸을 때보다 몸을 더 크게 떨었다.
으. 나도 아프다.
발로 찼는데 허벅지 뼛속까지 진동이 오네.
“저한테 한 번 맞아도 할 말 없으신 건 알죠?”
사실은 신성력을 써보려고 했는데, 여기선 안 되는 것 같았다.
아쉽게 됐지.
“아니, 뭐. 폐하 만나게 해준 건 고마운데 말이에요.”
내가 이전 생활에 미련이 없고, 지금 젠달 생활에 만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간 맘고생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사전에 설명을 듣고 던져지는 거랑, 아무것도 모른 채 던져지는 거랑.
주어지는 환경이 같더라도 그 차이는 크다니까.
나무는 아무 반응 없었지만, 나는 대나무 숲에 이야기하듯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소연에, 인생 상담에, 연애 상담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대나무 숲을 알차게 써먹은 뒤, 최종적으로 진짜 묻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절 여기 데려온 이유나 좀 알자고요.”
내 인생 목표는 꾸준하고 긴 폐하의 덕질이었지만.
그렇게 덕질만 하라고 이 세계로 보낸 건 아닐 테고.
하지만 목적이 있다기엔 세이칸이 날 대하는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방치였다.
“왜 날 성녀로 택한 거예요? 동의 없이 데리고 왔으면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줘야죠.”
촤아아아-.
나무가 다시 흔들렸다.
……의사소통. 이게 최선입니까.
세이칸 님, 안타깝게도 제가 인간이지 드루이드가 아니거든요.
나뭇잎 소리로는……. 하나도 못 알아들어…….
극복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에 좌절하고 있을 때쯤.
나뭇잎 스치는 소리 사이로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미성이 흘러나왔다.
[아직 일러]
“세이칸……?”
[돌아가]
***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푹신한 침대 위.
낯설고 호화로운 천장이 보였다.
‘여긴 어디…….’
나는 눈을 끔뻑였다.
처음 보는 광경인데도 어딘지 익숙한 이 기분.
왜 이렇게 데자뷔 같은 느낌이 드나 생각해 봤는데,
이거 그거잖아.
소설에서 많이 보던 거……!
(김여주, 2x 세) [다른 세계의 신을 만나고 정신을 차려보니까, 생판 남한테 빙의 되어 있더라고요. (웃음)]
비현실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현실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와서인가.
불길함이 온몸을 감쌌다.
‘나 아까 나무에 대고 뭐라 말했지?’
한때 내 꿈이 재벌집 막내가 되는 거였다든가,
다른 세계로 가는 일이 생긴다면 돈 많은 백수가 될 줄 알았다던가.
그런 소리 했던 거 같은데.
설마 세이칸이 이제 와 그 꿈을 이뤄준 건…….
“아, 안 돼!”
그건, 그건 안 된다아아-!
나는 지금이 딱 좋다고……!!
뇌리를 가득 채운 폐하의 얼굴에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당장 거울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고개 숙인 내 시야에 검은 머리칼이 들어왔다.
‘검은색!’
이 익숙한 흑발이 정말 내 머리카락일까!
확인이 필요했다.
다급히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눈앞에 가져갔다.
눈을 부릅떠 뚫어지라 보고, 코를 박고 냄새도 맡고.
반지 낀 손도 이리저리 돌려본 뒤, 마지막 확인 절차로 내 양 볼을 세게 꼬집었는데.
‘아프다!’
흐허헝. 내 몸이다! 내 몸!
“잠깐, 또 주변에 이상한 나무가 있으면 현실이 아닐ㅈ…….”
“…….”
나는 볼때기를 쥐어 잡은 채, 주변을 돌아보다 몸을 굳혔다.
저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투명한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
침대와 좀 떨어진 소파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놀란 얼굴로 날 보고 있는…….
‘왜, 거기서 폐하가……!’
……크흡. 어쩐지 조명도 없는데 방이 환하더라니.
나는 볼을 잡은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처음부터.”
폐하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착석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오두방정을 못 본 척해주셔도 부끄러운 건 매한가지만……!
배려는 감사합니다.
“퓨! 퓨우!”
폐하 옆에서 퓨가 폴짝폴짝 뛰며 아는 척을 했다.
그러고 보니 방이 참 휘황찬란하다.
어딘가의 돈 많은 임금님 방 같네.
“……여기 혹시 폐하 방이에요……?”
“그래.”
그래서 침대가 넓고 좋았…….
잠깐, 그러면 지금 내가 앉아있는 곳이…….
‘폐, 폐, 하 침……대…….’
이불 위에 올린 손이 벌벌 떨렸다.
‘다, 당장 침대 밖으로 나가야……!’
정신이 어질어질했지만, 폐하의 침대를 내가 더럽힐 수는-!
없는데!
‘익. 나가, 나가라고!’
내 몸이 부동자세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어떻게 이렇게 내 몸은……!
“……괜찮나? 아직 몸이 안 좋은 거 같으면 누워있어.”
……저렇게 말씀해주시는데 조금만 더 있어도 될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폐하 침대……. 완전 좋아.’
바깥은 저렇게 비가 오는데 꿉꿉한 냄새 하나 없이 향기롭고 난리다.
아까 누워있을 때 심호흡 좀 크게 해볼걸……!
지금은 코랑 이불이 너무 멀다고. 흑흑.
“어? 그런데 왜 제가 폐하 방에 있어요?”
분명 인적없는 곳에서 쓰러졌는데.
왜 폐하의 방에 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길에서 주웠어.”
“저를요?”
“사람 다리가 보이길래 황궁에서 토막살인이라도 난 줄 알고 근처로 가봤지. 연구소장의 망토를 쓴 성녀였더군.”
으. 상상하니까 무서운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본 폐하도 대단하다.
그러고 보니 내 외투랑 망토는 어디에 있지.
슬쩍 눈을 돌리니 침대 옆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는 익숙한 내 옷이 보였다.
비를 먹고 축 늘어진 외투와 달리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뽀송한 게.
옷감이 좋으면 방수도 잘되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아 급한 대로 내 방으로 데려왔어.”
그렇게 말하는 폐하는 본인의 방에 있는데도 여전히 외출복 차림이었다.
게다가 비도 맞으셨는지 채 마르지 않은 머리가 반쯤 젖어있었다.
“치료 신관을 부르려 했는데, 이게 도움이 됐지.”
폐하는 손에 쥔 걸 흔들어 보였다.
내가 선물한 브로치였다.
중앙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치료 계열의 신성석.
“헐. 제가 개시했어요?!”
내가 그러려고 선물해 드린 게 아닌데-!
낙담하는 내 모습에 폐하는 피식 웃었다.
“성능이 좋던데.”
“으……. 저는 폐하한테만 사용하시길 바랐죠. 이번 일로 효과 떨어지면 안 되는데. ……폐하, 브로치 빌려주세요. 제가 충전해 올게요!”
같은 계열 신성력 보유자면 신성석에 신성력 주입이 가능했다.
황궁에 출입하는 귀족 중에서도 적이 있다는데!
풀충전한 신성석을 갖고 다니셔야 내 마음이 좀 놓이지!
그래서 소파에 앉은 폐하를 향해 손을 척 뻗었는데,
“됐어.”
거절당했다.
나중에 몰래 충전해 드려야지.
“아, 폐하. 저 주우실 때 건물 문 파손되지 않았어요? 마지막 기억이 그거였는데.”
“그런 건 성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역시 부셨군.
에본 재상님한테 이실직고할 게 마차 말고 하나 더 생겼네.
이번 달 지출이 많았으니 변상 날짜를 다음 달로 미뤄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던 중.
폐하와 눈이 마주쳤다.
저희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마주치면 안 될까요.
심장 떨려……!
“왜, 왜요?”
“요즘 몸이 안 좋은가?”
“아뇨? 완전 멀쩡한데요?”
“멀쩡한 사람이 길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가 어디에 있어. 바로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폐하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헉. 화나셨나.
나는 서둘러 폐하의 말을 반박했다.
“그게,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거든요!”
“놀라서?”
“폐하, 저 아까…….”
또 생각하니 가슴이 벌렁거린다.
“유령 목소리를 들었어요.”
“유령?”
나는 심각한 얼굴로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깐요. 와. 머리끝까지 소름이 확 돋는 게! 그래서 기절한 거 같아요.”
“…….”
그랬는데도 폐하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못 믿으시는 거예요? 폐하는 무서운 게 없어서 잘 모르시겠지…….”
우르르릉.
콰광-.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천둥소리였다.
나는 말을 도중에 멈췄는데,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전에 들었던 헤이즐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천둥 번개가 치는 밤엔 혼자 있기를 힘들어하셨죠.”
베개를 들고 헤이즐에게 찾아갔던 어린 폐하.
“……신아리?”
크흡. 얼마나 천둥 번개가 무서우셨으면……!
밤이고, 비는 내리고, 천둥은 치고, 폐하한테서 어린 폐하가 겹쳐 보이고.
[총장님……. 저 무서워서 그러는데……. 같이 자주시면 안 돼요……?]
과몰입하기 딱 좋은 분위기에 내 주둥아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폐하, 오늘 밤에 제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
“…….”
그러자 폐하가 몸을 슬쩍 뒤로 빼셨는데.
아, 맞다.
꽃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