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서, 성녀님. 이 꽃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헬리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보조 주방 건물 근처에 피어있던데요……?”
“그렇군요. 흔한 꽃이라……. 당장 뽑아버려야 겠…….”
“네?”
“아아, 죄송합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그, 혹시……. 제게 보여주신 걸 다른 이에게 드리셨습니까? 아니면 받으셨다거나.”
그렇게 말하는 헬리의 표정이 딱딱했다.
내가 고개라도 끄덕이면 당장에라도 그 다른 이가 큰일 날 듯한 얼굴이었다.
‘역시…….’
뭔가가 잘못됐어.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한테도 안 주고 안 받았어요.”
헬리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꽃은……. 그, 젊은이들이 호감을 품은 상대방을 꾈 때 사용하는 꽃이온데, 의미가…….”
싸하다.
초콜릿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꽃이 문제였나.
작업용 꽃이라는 말에 등줄기가 쭈뼛 섰는데, 이어진 헬리의 말은 더 끔찍했다.
“당신과 오늘 밤을 함께 지내고 싶다는…….”
허허. 설마 내가 아는 그렇고 그런 짓을 한다는 뜻인가.
라울 신관님 웃음으로 평정심을 찾아보려 했지만.
…….
“그, 그, 그게! ‘손만 잡고 잘게.’……는 아니죠?”
“그, 그렇겠죠?”
민망한 주제를 나눈 헬리와 나는, 급히 시선을 피했다.
둘 다 잘 익은 토마토가 따로 없었다.
밤을 함께 지내고…….
그런 꽂을 그것도 폐하 얼굴을 새긴 초콜릿 옆에…….
“서, 성녀님!”
망연자실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조리대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가 그릴 수 있는 폐하와의 신체접촉 최대치는 끽해봤자 손잡고 돌아다니는 정도라고……!
밤이라니. 도대체 몇 단계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폐하랑! 폐하랑!
머릿속이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캄캄했다.
“그런, 그런…….”
“서, 성녀님? 성녀님!”
나는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내 정신이 문장을 만들어 내뱉을 수 없었지.
‘그런 게 가능하겠냐고-!’
어쩐지 한겨울에 꽃이 핀 게 이상하다 했어…….
후후. 뭣보다 가능한 걸 떠나서 말이지.
“네, 당연히 알고 있죠!”
아까부터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폐하한테 대체 무슨 짓을……!’
자괴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나 이제 폐하 못 본다아아아…….
***
“창밖에 보실 만한 거라도 있습니까?”
데르아치 저택의 응접실.
델칸은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다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해쓱한 얼굴의 대변인이 티 트롤리를 끌고 들어오고 있었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러죠.”
델칸이 티 테이블 앞 소파에 앉자, 대변인도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빵집에 연락책을 심을 계획이었는데, 손님이 없어서 흐지부지됐습니다.”
전에도 들은 이야기였다.
황도에 빵집을 열었다 했나.
하지만 황도의 제과점이 자리를 잘 잡아놨는지, 손님을 빼 오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손님이 없으면 출입하는 사람을 특정하기 쉬우니까요. 황제가 냄새라도 맡는 날엔 들키기 딱 좋죠.”
“그랬군요.”
델칸은 형식적으로 반응했다.
몇 주 째, 하는 일 없이 저택에만 있는 저가 불쌍해 보였는지 대변인은 종종 데르아치가 꾸미는 일에 관해 말해주었다.
이제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가.
하지만 결정한 건 샤를이었고, 자신은 그저 그녀의 선택 때문에 여기 있을 뿐이었다.
델칸의 의사는 없었다.
“저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합니까?”
“정확히 답해 드리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대변인은 가져온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말했다.
“왕녀님께서 저희와 뜻을 함께해주신다는 증표로 몬드리아 님을 이곳에 두신 것이니. 왕녀님과의 일이 끝날 때쯤이면 돌아가실 수 있지 않을까요?”
샤를이 병력을 지원해줄 때까지 저를 볼모로 잡아둔다는 소리였다.
역모 가담이라니.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여차하면 샤를이 허튼짓하기 전에 내가…….’
델칸은 대변인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혈색이라곤 없는 창백하고 깡마른 목덜미.
저들이 가져간 제 검이 없어도 악력만으로도 쉽게 부러트릴 수 있을 듯했다.
“그때까진 무료하시겠네요.”
대변인은 제 목을 노리는 살기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몬드리아 님께서 즐기실 만한 소일거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여긴 그런 게 없는 적적한 곳이라서 말입니다.”
대변인의 말대로 저택 내부는 주변 경치만큼이나 삭막했다.
몇 주 동안 델칸이 마주친 사람은 존재감이 옅은 사용인 네다섯.
그리고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대변인 하나가 전부였다.
데르아치 대공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저택을 지키는 기사 하나 없는 이런 곳 따위.
델칸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나갈 수 있었다.
조금 더 실력을 발휘하면 데르아치의 암살까지도 가능할 터였다.
그런데.
“저와 종종 차라도 드시면서 시간을 보내시죠.”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가 싫을까.
대변인의 말대로 차나 마시면서 가만히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델칸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막 따른 찻물에서 올라오는 더운 김이 델칸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몬드리아 님의 삶은 그동안 고단하셨지 않습니까.”
델칸의 지난날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변인이 말했다.
‘그랬지. 내 삶은 고단했어.’
꼿꼿하던 델칸의 등허리는 어느새 푹신한 소파의 등받이에 푹 기대있었다.
옅은 안개가 끼기 시작한 머릿속에 밝은 검은색이 아른거렸다.
그리움과 격한 갈망이 일었다.
형태가 채 갖춰지지 않은 잔상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찰나.
이내 무기력하게 흘러가는 델칸의 의식에서, 검은색은 신기루처럼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델칸의 초점 없는 눈에 공허한 휴식이 찾아왔다.
대변인의 기침 소리가 조용한 응접실을 울렸다.
“이 저택에선 모든 걸 잊고 쉬셨으면 좋겠군요.”
***
“……꽃말은 꽃말일 뿐. 오해하지 말자.”
초비의 지하 연구실에서 뜀박질을 몇십 바퀴.
방으로 돌아와서 돌을 수십 개 깎고.
그 뒤에 쿠션 하나를 터트리고 나서야, 나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현실 도피 백날 해봤자 뭣하나.
“내가 해명해야 하는걸.”
폐하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내가 작정하고 폐하를 꼬, 꼬시려 한다고 여기신 게 분명했다.
이런 남사스러운 얘기, 어디 가서 말도 못 하셨을 테니.
누가 듣고 폐하한테 ‘성녀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라고 말해줄 리도 없고-!
오해는 내가 풀어야 했다.
제 초콜릿에는 결코 그런 흑심이 단 한 스푼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때면 몰라도 이번에는 정말 결백하다고……!
“눈물이 앞을 가리네……. 흑흑.”
“퓨?”
나는 망토를 뒤집어쓴 채 터벅터벅 황궁을 걸었다.
해가 지긴 했지만, 시간은 늦은 저녁 정도였다.
야간 경비를 도는 사람들 외에도 황궁 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조심히 다녀야지. 발만 걸어 다니는 갈색 부츠 괴담 같은 거 나올라.’
그럴 수는 없었기에, 청력을 최대한 집중하며 사람 없는 곳을 골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겨울에 비라니.
오늘은 꽃도 보고, 비도 보고.
이상한 날인 게 분명했다.
“퓨,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굵어지는 빗줄기에 나는 퓨를 주머니에 넣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빙 돌아오느라 본궁까지 가려면 아직 거리가 남았다.
“일단 비부터 피하자.”
마침 근처에 지붕이 있는 야외 복도가 있었다.
나는 후다닥 거기로 뛰어들어갔다.
우르르릉. 쾅.
“으아아. 천둥까지 치네.”
솨아아아아-.
뒤이어, 좀 전의 빗줄기는 예고편이었다는 듯, 사정없이 비가 쏟아졌다.
폭우다. 폭우.
한겨울에 비가 이렇게 내릴 정도면 세이칸 신이 물청소라도 하는 거 아닐까.
‘으. 비 그칠 때까지 움직이긴 무리일 거 같은데.’
아무래도 폐하한테 가는 건 내일 새벽에 서재로 가는 게 나을 듯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딜까?”
“퓨?”
밤이라 사방이 어두운 데다가, 평소 잘 와보지 않던 길이었다.
건물도 낯설고.
“……좀 무서운데, 주변이라도 밝히고 있을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곤 반지 위로 내 신성력을 피워 올렸다.
망토 틈으로 새어 나오는 오팔 색의 신성력은 주변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빛났다.
“막 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퓨우.”
“하…….”
바, 방금 소리 하나 더 들리지 않았나.
정수리까지 오싹한 기분에 주변을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긴장돼서 청력이 올라갔었나?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저 멀리 어느 평화로운 건물 안에 있는 사람 목소리를 들은 거지-!
내 주변이 아니라……!
“그래, 잘못 들은 모양-.”
“으……ㄱ…….”
“……옹.”
움찔.
뭐, 뭔데-! 이 신음!
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잔뜩 몸을 굳혔다.
“퓨, 나 어쩌지.”
정말 알고 싶지 않았는데, 어디서 들리는지 알아버렸다.
바로 내 뒤에 있는 이 건물…….
야외 복도랑 연결된 닫힌 문 너머 어딘가에서 나는 소리였다.
녹슨 철문, 무성한 잡초, 거미줄…….
한눈에 봐도 방치된 건물이라는 느낌이 팍팍 든단 말이지.
오컬트 진짜 싫은데-!
“……흐……으……ㄱ…….”
원한이 깊은 영혼이 봉인돼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신음이었다.
……몇백 년이나 된 황궁인데, 그런 영혼 하나 정도는 있을지도.
‘튀자.’
그래, 여기서 튀자. 튀는 거야.
괜히 근처에 있다가 저주라도 받으면……!
아직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저 고통에 찬 신음 외에는 들리는 인기척이 없었다.
‘우산 대용으로 결계를 펼치고 가야겠다.’
목격자 걱정도 덜었겠다.
막 결계를 친 찰나,
[성녀…… 와……ㅆ……어.]
“으아아-ㄱ!”
문 너머에서 갑자기 성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나도 모르게 반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이잉-.
내 감정에 민감한 반지가 노란빛을 쏘자, 굳게 닫힌 철문은 걸레짝처럼 펑펑 날아갔고.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