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은발의 남자.
데이데른 호의 주인이자 리리의 남편.
‘……맞지?’
솔직히 얼굴 생김새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엄청난 미남에, 은발에, 옆에 리리마저 있었으니 알렌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겠다 싶었다.
쇼웬은 그가 껄끄러웠다.
지금에야, 한때 리리한테 가졌던 그 감정은 싹 사라졌지만.
저 남자에게 제 순정을 무참히 짓밟혔던 기억이 남아있던 탓이었다.
‘온다.’
리리와 알렌이 제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쇼웬은 앞에 있는 길거리 매대 주인에게 말을 걸며 딴청을 부렸다.
“아, 주인장. 이거 참 맛있게 생겼네.”
“오호, 차림새를 보아하니 뱃사람인가? 잘생긴 젊은이가 먹을 걸 보는 눈도 있구먼! 2 실버일세.”
“…….”
고객 맞춤형 웃음을 지은 매대 주인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주머니를 털어봤자 먼지밖에 안 나오는 제게 2 실버가 있을 리가.
애들도 용돈으로 들고 다니는 2 실버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민망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게…….”
“뭐야, 돈이 없소? 이 젊은이……. 그렇게 안 봤는데, 돈이 없으면-.”
“있어요! 세 개 주세요.”
쇼웬의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머리가 매대 주인에게 돈을 건넸다.
리리였다.
그녀는 꼬치에 꽂아 구운 옥수수 세 개를 받아들고 하나는 쇼웬을, 하나는 같이 온 알렌에게 건넸다.
“쇼웬! 여기서 뭐 해?”
“오랜만이다. 친척이 여기 살아서 신세 좀 지러 왔어.”
“오. 그러면 앞으로 젠달에서 지내는 거야? 얼마나?”
“한 달 정도.”
쇼웬은 옥수수 꼬치를 쥐고 리리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봤다고 반갑긴 하네.
슬쩍 미소를 짓던 쇼웬은 맑은 바닷물을 닮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리리의 뒤쪽, 귀티 나는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옥수수 꼬치를 들고 있는 알렌이었다.
표정이 냉랭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배에 있었을 땐 좀 더 유한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안녕……하십니까. 선주님.”
“…….”
떨떠름하게 인사를 건넸더니,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리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저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자네는 날 어떻게 알아봤지?”
“리리 옆에 있으니까…….”
솔직히 선주 얼굴을 제가 알게 뭔가.
리리가 없으면 이렇게 우연히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인 줄 알고 스쳐 지나갈 게 뻔했다.
‘……용케도 알아봤다고 시비를 거는 건가?’
시비를 받았으면 돌려줘야지.
뱃사람에게 의리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이었다.
쇼웬은 슬쩍 빈정거렸다.
“선주님께선 리리랑 요즘도 사이가 좋으신가 봅니다?”
“좋지. 그리고 자네, 내 아내 이름을 그렇게 쉽게 입에 담지 않으면 좋겠네만.”
제가 남편이 있는 사람한테 집적거리는 불한당이라도 된다는 건가.
쇼웬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미안한 일이지만, 리리는 제 친구기도 해서요. 선주님께선 부인을 구속하는 성향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러다 리리가 선주님한테 질려서 권태기라도 오면 어쩌시려고.”
이번엔 알렌드의 눈썹이 들썩였다.
“글쎄. 권태기가 올 정도로 서로에게 마음이 식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서.”
알렌드와 쇼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길 한복판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두 남자를 보며 아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또 무슨 설정이 추가된 거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남편과 재결합한 모양이었다.
제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는 그렇게 빼다가, 이런 상황이 오면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처럼 구는 게.
‘가만 보면 폐하, 역할극에 진심이라니까. 배우 했으면…….’
완전 연예계 씹어 드셨겠다.
아리는 뒤쪽에 헨켈과 카디얀이 있는 방향을 힐끔 보고, 다시 알렌드와 쇼웬을 봤다.
“쇼웬, 혹시 오늘 다른 일정 있어?”
“……없어.”
쇼웬은 고개를 저었다.
일정뿐이겠는가. 돈도 없고, 갈 곳도 없다.
……배도 고프고.
그런 쇼웬에게 아리는 제 가방에서 꺼낸 상품권을 흔들었다.
“잘 됐다! 나 아는 분이 레스토랑 식사권 주셨거든. 같이 먹으러 가자.”
어른이다.
제 친구는 몇 달 못 본 사이에 경제력 있는 어른이 된 모양이었다.
쇼웬은 감격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다.
***
올리비아에게 받은 식사권은 다섯 장이었다.
두 장은 헨켈 대장과 카디얀에게 주고, 남은 세 장은 우리가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폐하와 쇼웬과 함께 안내받은 레스토랑의 방으로 들어왔는데.
자리가 좀 애매했다.
“자리가…….”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금 예약석 외에 안내해드릴 수 있는 자리가 여기밖에…….”
연인석이라는 2인용 의자 하나와 1인용 의자 하나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문제란 말이지.
부부 설정이니까 폐하랑 내가 2인 의자에 앉아야 할 것 같은데.
연인석은, 그래, 연인석은!
‘다리가 맞닿을 정도로 좁다고!’
내가 봤을 때 나랑 폐하 앉으면 백 프로 허벅지 닿는다.
나는, 그러면 나는……!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미래가 너무나도 무서워, 자리에 앉기가 쉽지 않았다.
“뭐해? 나 먼저 앉는다.”
“자, 잠깐!”
내가 우두커니 서서 망설이고 있으니 뒤따라 들어오던 쇼웬이 날 지나쳐 1인 의자에 앉으려 했다.
나는 다급히 그런 쇼웬의 팔을 잡았다.
“쇼, 쇼웬. 나랑 같이 앉을래?”
“어……? 왜, 왜?!”
“아니,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또 언제 볼지 모르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쇼웬 꼬시는 줄 알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폐하랑 나란히 앉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폐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같이 앉자, 쇼웬!”
나는 쇼웬을 2인 의자에 앉히고 그 옆에 앉으려 했다.
그랬는데.
“……왜, 왜요?”
“당신은 반대편에 앉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내 어깨를 잡은 폐하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날 1인용 의자에 앉혔다.
그리곤 쇼웬의 옆에 자리를 잡으셨다.
“서, 선주님이 왜 여기 앉으십니까?!”
“……나라고 좋아서 앉은 건 아니니까 그냥 앉지.”
나랑 폐하만 앉아도 꽉 찼을 좌석에, 폐하와 쇼웬이 함께 앉으니.
의자의 팔걸이가 터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비좁았다.
“…….”
주문받고 서빙 하러 오는 분들이 들어왔다가 이 진귀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한 번씩 놀란 소리를 했다.
“두 분 다정해 보이시네요.”
식사 도중에 하도 어색해 보여서 한 마디 건넸는데, 눈빛으로 살해당할 뻔.
두 사람 다 ‘그딴 소리 집어치워.’라고 말하는 듯했지.
그래도 쇼웬은 음식이 입맛에 맞았는지, 불편한 자세로도 그릇을 싹싹 비웠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마지막 디저트까지 먹고는, 쇼웬은 질린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방 안에는 나와 폐하만 남았다.
“폐하, 쇼웬이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지신 거예요?”
“시끄러워.”
괜히 놀려보고 싶어서 그만.
나는 내 디저트 접시에 있는 케이크의 장식용 딸기를 폐하의 접시 위에 올렸다.
“뭐지?”
“소소한 행복요.”
“실없군.”
내 행동을 시시하다고 말해놓고.
폐하는 피식 웃으며 자기 딸기를 내 접시 위에 올려놨다.
“뭔데요?”
“소소한 행복 교환.”
“……폐하, 저 지금 행복 수치 과다 상태인 거 같아요.”
나도 “실없네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와. 무리.
폐하 입에서 행복이란 소리가 나오는데 왜 이렇게 좋지……!
막 기분이 몽글몽글하고, 감격스럽고!
“……울어?”
“아뇨.”
나는 코를 훌쩍였다.
“그냥……. 폐하, 제가 많이 좋아한다고요.”
그리고 무슨 소리가 나오기 전에 속사포처럼 말을 덧붙였다.
“고백 아니고 연애해달란 소리도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착…….”
폐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다 됐고.
“폐하는 그냥…….”
벌컥.
“아, 화장실 다녀오니까 이제 살 것 같다. ……무슨 일 있었냐?”
“어? 아니?”
“그래? 저, 선주님. 안쪽으로 좀.”
“…….”
타이밍 좋게 돌아온 쇼웬 덕분에 폐하는 비좁은 자세로 돌아갔다.
폐하는 그냥.
행복하기만 하시라고요……!
***
“쇼웬, 오늘 이 어르신이 밥 사준 거 잊지 마.”
“생색은. 오냐, 다음에 내가 한턱낼게. 그리고……. 선주님도 감사합니다. 다음에 한턱낼 때 리리랑 같이 오세요.”
쇼웬은 폐하한테 꾸벅 인사를 하며 마차에 올랐다.
레스토랑에서 나오고, “노숙해야겠네.”라는 쇼웬의 혼잣말을 우연히 듣게 돼서 캐물었더니.
글쎄, 내 친구가 빈털터리 노숙자 신세였다.
선장님도 너무하셨지. 자기 아들을…….
그러다 친척 얘기까지 나왔는데, 천만다행히도 폐하가 알고 있는 가문의 사람이었다.
크흐.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계셨다니.
역시 세이칸 신이 좋다는 건 죄다 들이부은 사기캐다우셨다.
“그럼 출항 전에 이쪽으로 편지 보내줘.”
“황궁 주방? 알겠어.”
쇼웬이 젠달을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기에, 나는 리리가 우편물을 받는 장소를 적어 쇼웬에게 건넸다.
그렇게 쇼웬이 떠나고.
폐하와 나도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
석양 진 거리는 조용했다.
굴러가는 바퀴 소리만 들리고, 폐하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데.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하지……!
후우, 후우.
괜히 의식하기 시작했어.
나는 창문으로 눈을 굴리며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크흡. 그래도 예전에 니세포르엘 신전 처음 갔던 때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지 뭐야.
그때는 폐하랑 한 공간에 있는 것부터가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지금은…….
‘지금도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나는 슬쩍 손깍지로 내 양손을 단단히 봉인하고, 그 손을 허벅지 위에 고이 올려놨다.
얌전히 있어라, 내 몸.
“……하.”
“……왜 웃으세요.”
웃지 마세요.
감당할 자신 없으면……!
폐하는 자신 있어요? 저는 없거든요……!?
“예전 일이 떠올라서. 니세포르엘 신전에 갔던 날.”
나랑 같은 걸 생각하고 웃으셨단다.
그 말에 내 깍지 낀 손이 지진 날 듯 떨렸는데.
지잉-.
아, 아니.
너는 반응하면 안 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