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어머, 그러셨군요. 리리 님께서 성녀님과 친분이 있으셨다니.”
“그, 그렇다니깐요. 그래서 브로치도 성녀님께서 부탁하셨죠.”
베일에 싸인 성녀의 이야기에 올리비아는 눈을 빛냈다.
내가 올리비아에게 말한 건,
황궁에서 지내는 리리가 어쩌다 성녀님을 알게 됐고 어쩌다 친해졌다.
그러다 이번에 생일선물 답례품의 심부름을 부탁받았다.
라는 조금은 허술한 변명이었는데.
올리비아는 이해해줬다.
“성녀님과의 일을 함부로 외부에 발설할 수 없으실 테니깐요.”
그렇게 발설할 수 없는 사생활이라기엔 올리비아의 눈앞에 있는 제가 성녀지만요…….
어쨌든.
내(리리)가 나(성녀)를 좀 팔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나중에 브로치 때문에 의문이 생겨도 올리비아는 한 번 더 생각해주겠지.
리리가 사실 성녀였다는 게 밝혀져봤자 좋을 게 없으니.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카디얀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올리비아 씨, 그 수습직원은 어떻게 되나요?”
“비타 말씀이시군요? 그 아이는 리리 님 덕을 좀 보게 될 거예요.”
“제 덕이요?”
“동생 약값을 대려고 일을 시작한 아이인데, 아마 이번 달 성과급이 나오면 몇 달 치 약 값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내 플렉스가 판매를 담당했던 수습직원의 성과급에 반영된다는 말이었다.
올리비아가 상황을 다 봤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제 실적으로 돌리는 장난을 칠 수도 없다고 했다.
“오,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괜히 휘말려서 불이익을 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데 올리비아 씨,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고민이요?”
내 질문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즐거워 보이긴 했는데 중간 중간 근심이 어린 표정이 보여서 말이지.
명색이 사업 파트너인데 이런 건 신경 써야 하지 않겠는가……!
“올리비아 씨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걱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어머나.”
올리비아는 손으로 뺨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리리 님 앞에선 뭘 숨길 수가 없겠네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걱정이긴 해요.”
“무슨 일인데요?”
“‘공장’이 빵집을 연다고 해서요.”
“공장이면……. 데르아치 공국에서 운영하는 상점이요?”
내가 이 세계 상식이 좀 많이 늘었지.
이제 웬만한 건 그게 뭐냐고 개념을 묻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제가 데르아치라니. 으.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싫긴 해도 적의 근황을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나는 귀를 세우고 올리비아의 말에 집중했다.
“맞아요. 그동안 ‘공장’이 식품을 취급한 적이 없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저희 본점과 같은 길가에 가게를 얻은 모양이에요.”
“헛, 설마…….”
“앙뜨완 제과점에 선전 포고하는 거군요.”
카디얀의 말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디얀은 말을 이었다.
“‘공장’의 악취미입니다. 업계에서 가장 잘되는 가게 근처에 상점을 열죠. 자신들이 이길 것을 확신하고요. 망하는 가게를 보며 우월감이라도 느끼는지.”
으득. 하고 카디얀의 이가 갈렸다.
진짜 상도덕 없는 사람들이네.
올리비아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디저트는 리리 님의 레시피를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걱정이 없지만…….”
그럼, 그럼.
그간 차곡차곡 늘어난 내 디저트 레시피들은 폐하도 몰랐다.
계약서에 레시피 유출금지 조항이 있어서 아는 사람은 올리비아, 나, 헬리뿐.
제빵사들 손에서 디저트가 나오긴 했지만, 반죽 가루나 크림 같은 건 배합을 따로 해서 나가기 때문에 모든 과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문제 되는 건 디저트가 아니라…….
“주식으로 먹는 기본 빵들이 걱정이네요.”
“기본 빵들이요?”
“네. 원래 앙뜨완 빵집에서 주력으로 팔던 것들이에요.”
디저트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만들던 빵을 말하는 듯했다.
“그런 빵들은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도 없어서, 단가가 낮다 보니 맛으로 승부를 보기는 힘들거든요.”
“단가 내에선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좋은 재료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기사님이신데 이쪽 생태를 잘 아시네요.”
올리비아는 캄캄한 미래가 눈에 선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 가격이 저렴한 쪽으로 소비자들이 몰릴 텐데, 공장이 값을 얼마나 내려 판매할지…….”
귀빈실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음……. 상황이 심각한가 보네.
나는 눈치를 보며 침묵에 동참했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올리비아 씨.”
“네?”
“저희 다음 달 신제품 출시일 좀 더 앞당겨 볼까요?”
내 제안에 올리비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요.”
올리비아의 눈에 희미한 기대감이 깃들었다.
자고로 감자칩이 귀하면, 승용차도 끼워팔 수 있다 했던가.
나는 자신감을 듬뿍 담아 외쳤다.
“공장, 우리가 이겨보자고요!”
***
화창한 주말의 낮.
알렌드는 은발의 모습으로 황도의 카페에 앉아있었다.
밖에서도 훤히 보이는 자리였지만, 황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얼굴에 두른 정신 조작 계열 신성력.
그게 사람들의 인식을 약하게 교란시켜 알렌드의 인상을 달리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생김새가 달라진 것이 아니기에, 수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고 있긴 했다.
본인은 전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빵집이라.’
알렌드가 오늘 밖으로 나온 가장 큰 이유는 ‘공장’의 빵집 때문이었다.
데르아치가 황도에 상점을 냈다.
황도의 귀족들과 접견할 장소로 사용한다거나, 이쪽의 동태를 살핀다거나.
이곳에서의 활동을 용이하게 할 요량으로 낸 눈속임용이라 생각되지만.
준비를 대충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임시 영업 기간에 팔았던 빵은 ‘역시 공장이다.’라는 호평이 자자했다.
기존 시장의 빵들과 비교해 2/3가량의 저렴한 가격이 제일 큰 요인인 듯했다.
썩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작은 빵집들은 문을 닫고, 앙뜨완 제과점마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으니.
‘공장’이 황도에까지 와 ‘독식 놀이’를 하며 활개치고 다니게 둘 순 없었다.
‘제재를 가하는 편이 좋겠군.’
하지만 데르아치의 ‘공장’.
그걸 막는다고 하면 거기에 반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귀족들이 있을 터였다.
‘거슬려.’
그냥 무력으로 말을 듣게 할까 싶다가도.
데르아치를 치고 난 뒤에도 할 일이 남았다.
제가 지금껏 아무 이유 없이 다정함을 연기했던 건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고민하던 그의 귓가에 잔뜩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성공했어?!”
알렌드의 뒤쪽 대각선의 테이블이었다.
방금 카페로 들어온 소녀를 먼저 앉아있던 소녀가 맞이했다.
“응. 아침에 하인들 보내고 나도 가서 겨우 받았어. 황도에 있는 매장 6개 다 돌았는데 겨우 두 개 성공했다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많았어?”
“말도 마. 새벽부터 줄 선 사람들도 있었대. 나 계산할 때는 빵도 얼마 안 남았더라. 지금쯤이면 재고가 없어서 문 다 닫았을걸?”
“그래도 성공했다니 부럽다. 나도 내일 새벽에 나가봐야겠다. 먹어는 봤어? 맛은 어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인 게 있나 보군.
빵이라는 단어에 귀를 기울였으나 대화 내용이 ‘공장’의 빵집을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저렇게 소란을 부릴 정도의 일이라면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 에본에게 전해 듣게 될 테니.
알렌드는 다시 본래의 생각에 집중했다.
하지만,
“환상적이야……. 나 울었잖아. 얘. 역시 리리 시리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
익숙한 이름에 알렌드 머릿속의 생각이 확 하고 달아났다.
그의 집중은 이제 황홀감에 젖은 영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쏠렸다.
“너무 아쉬워. 빵을 일정 금액 사야 증정하는 신제품이라니.”
“그러고 보니 오늘 공장에서 하는 빵집 여는 날 아니야?”
“얘, 공장이 문제니? 리리 신제품을 먹어봐야지. 안 그래도 내가 줄 선 곳이 본점이었는데, 맞은편 공장 빵집은 사람들이 몇 안 가더라. 아무리 공장이라도 빵은 앙뜨완 제과점엔 안 될 거 같아.”
“다행이다. 나 사실은 앙뜨완 제과점 응원하고 있었거든.”
“나도. 앙뜨완 제과점은 공장 때문에 안 망했으면 좋겠으니까. 리리 디저트는 없어지면 안 돼…….”
흐음.
알렌드는 영애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홍차를 한 모금 넘겼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빵집은 독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군.
성녀의 디저트가 인기가 그렇게 많다니.
알렌드는 괜스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이제 제 행복은 폐하의 행복에 달려 있어요.”
그런 소리나 하고.
덕분에 죄책감이 더 늘었는지, 가슴께를 찌르는 느낌이 심해져 성녀를 보기가 껄끄러울 정도였다.
저러다 또 다른 게 좋아지면 내 행복과 상관없이 자기 행복을 찾겠지.
알렌드는 그런 생각을 하다 심장이 욱신거리는 감각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리 죄책감이라지만 통증이 너무 잦은 거 같은데.
조만간 치료 신관을 찾아가야겠어.
“손님.”
“……?”
“저희 가게에서 무료로 제공해 드리는 겁니다.”
카페의 종업원이 발발 떨리는 손으로 샌드위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알렌드는 순간 폐하의 미모 때문에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두렵다며 벌벌 떨던 아리가 떠올랐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는데, 그 미소가 무척이나 달달해서 종업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럼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은 꾸벅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떴다.
그제야 알렌드는 주변을 한 번 눈으로 훑었다.
본명 들어왔을 땐 손님은 저 말고 한두 명 정도 있었던 거 같은데.
어느새 만석에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여긴 장사가 잘되는군.’
그래서 이렇게 무료로 음식도 제공하는 모양이지.
알렌드 덕분에 만석이 됐고, 그게 고마웠던 카페 사장이 서비스를 준 것이었지만.
이번에도 알렌드는 몰랐다.
그는 다시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뒤쪽 테이블의 소녀들이 나누는 앙뜨완 제과점의 새로운 디저트 이야기가 꽤 듣기 좋았다.
“신제품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었다고?”
“글쎄, 황제 폐하 초상화가 있었다니까. 크기는 손바닥만 한가? 폐하가 즉위하신 지 7주년 되는 기념으로 나온 거래.”
쿨럭.
알렌드는 저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진 기념품의 존재에 사레가 들렸다.
명예 훼손이 아닌 한, 황제의 초상권은 없다고 하지만…….
황당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 초상화가 7종이 있는데, 7종을 다 모아서 가져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