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러니까 조금 전.
우리 마차는 황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보석상에 도착했다.
카디얀은 마부랑 이야기를 나눌 게 있어서 나 먼저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서오-.”
문소리에 반사적으로 인사말을 건네던 지배인(명찰에 적혀 있었다)이 날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넓은 매장 안엔 지배인 외에도 직원이 네 명 정도 더 있었다.
순식간에 직원들의 시선이 나한테 모였다가 흩어졌고, 각자 하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 뻘쭘함.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 당한 거 같기도 하고.
분명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은 여럿인데, 모두 날 없는 사람 취급하는 듯한 이 기분은 뭐지.
‘아, 그거구나.’
싸한 느낌이 들려던 찰나,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과잉 친절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먼저 아는 척을 안 하는 거야!
편하게 구경하라고 말이지!
‘역시 유명 보석상은 다르네.’
내가 보석상 주인이었으면 손님 옆에 졸졸 따라다녔을 텐데.
이 호화로운 보석들 속에서 손님만 배회하게 뒀다가 도둑님이 되면 어쩌려고.
여긴 그렇게까지 전담 마크를 안 해도 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한 모양이었다.
입구에 경비원도 두 명이나 있고.
‘크. 보석 많다.’
유리 진열장 안이 진열된 보석들로 번쩍번쩍했다.
폐하랑은 여기 오면 안 되겠어. 밖으로 나온 보석인 줄 알고 저기에 진열될지도 모르니까…….
폐하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여기 있는 보석들 다 갖다가 폐하를 치장해도 눈에 안 들어올걸. 폐하 미모에 죄다 묻힐 게 분명하거든-!
‘그래도 선물을 안 할 순 없지.’
나는 품속에 두둑이 챙긴 금화 주머니와 수표 다발을 매만졌다.
‘후후. 나 오늘 작정하고 왔다고.’
폐하는 아직도 내가 첫 월급으로 선물한 커프스단추를 하고 다니셨다.
내가 존재를 잊을 때쯤에 폐하의 소매에서 그게 반짝이면서 어필을 하더란 말이지……!
왜, 왜 계속하고 다니시는 거지……!
이쯤 되면 폐하가 먼저 나 꼬신 거라고 주장해도 무죄 아닐까!
‘……진정하자.’
나는 심호흡으로 흥분을 눌렀다.
내 몸, 진정해. 밖에서까지 이러면 곤란하다고……!
하여튼 오늘은 폐하한테 줄 선물과 지난번에 받은 생일선물의 답례품을 살 생각이었다.
일면식이 없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준 선물은 모두 돌려보냈는데,
프로딘타 궁과 예배당 사람들, 호위 기사들, 헬리, 초비, 헨켈 대장, 에본 재상님한테 받은 선물은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한사코 거절하고, 돌려줘도 다시 내 방으로 선물들이 돌아오는 거 있지.
퓨가 상자에 있던 시절이 떠오르더라니까.
‘퓨랑 주인님한테도 뭐 하나씩 사줄까?’
둘이 커플로 액세서리를 맞춰도 귀여울 거 같았다.
‘살 게 많네. 오늘은 플렉스다.’
나는 눈을 빛냈다.
무작정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도 좋겠지만, 보석상에 온 것도 처음이고 매장도 넓으니 설명을 듣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저-.”
가까이에 있는 직원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는데, 쌩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못 들었나?
음. 그럴 수도 있지.
근처에 손님 응대를 하지 않는 다른 직원이 있길래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물건 좀 보고 싶은데요.”
휙-.
이번엔 바로 앞에서 불렀는데도 직원은 대꾸도 없이 자리를 떴다.
대박. 나 요즘 초비가 준 망토 쓰고 다녔더니 초능력 생겼나 봐.
설마 신성력도 모자라서 투명 인간 되는 능력까지 생겨버렸나!
는 무슨.
‘무시…… 당한 거 같은데?’
그리고 날 무시한 직원 1, 2가 들어간 창고 같은 곳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평민 여자애 혼자 와서 뭐 어쩌겠다는 건지.”
“문구상이랑 착각한 거 아니야?”
“킥킥. 아무리 덜떨어져도 간판을 못 읽었겠어? 보석을 사 본 적이 없으니까 가격도 모르고 들어온 거겠지.”
아하.
그동안 문제 된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나 이 세계에서 동안이었다.
검은색 보정이 들어갔을 때야, 다들 신기하게 보기 바빠서 나이는 생각도 못 하는 듯했지만.
리리 모습일 때는 열일곱 정도로 보인다 했다.
게다가 옷은 튀지 않으려고 얌전한 걸 입고 나왔더니.
돈이 없어 보이는구나.
나 그래도 성인인데……. 지갑도 빵빵한 데…….
크흡.
편하게 구경하라는 게 아니라 못 살 거 같으니까 상대도 안 해주는 거였다니.
유명한 보석상이라더니 서비스가 뭐 이러나!
내가 레드카펫 깔고 환영해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고, 질문에 대답하는 것 정도만 해주면 되는데-!
‘이 정도의 냉대라니, 마음에 상처…….’
그냥 나갈까 싶었는데, 앳된 얼굴의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까 들어올 때는 없었던 직원이었다.
“소, 손님.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어리바리한 모습이 일이 익숙지 않아 보였다.
명찰에 수습이라고 적혀있는 걸 보니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인 모양이었다.
여기는 수습직원이 제일 친절해…….
“앗, 네. 주변 사람들한테 선물할 만한 걸 찾고 있는데요.”
“아, 그럼……. 손님,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직원이 안내해주는 곳으로 따라갔더니 유리 진열장 안에 고급스러운 브로치들이 쭉 진열돼 있었다.
“이, 이런 건 어떠세요? 요새 잘 나가는 브로치인데……. 남녀 공용으로 나온 거라 단체로 선물하시기엔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색상도 여러 가지고요…….”
“오오.”
“무, 물방울과 월계수 잎을 형상화한 거예요. 주변은 준보석을 사용했고……. 중앙엔 사파이어나 에메랄드를 넣었어요. 이쪽의 리, 리본과 탈부착도 가능하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추천해준 브로치는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걸로 할까. 서른 개 정도 사면 넉넉하려나?
“저러다 가격 들으면 사지도 못할 텐데. 쟤는 왜 저렇게 열심히 하나 몰라.”
“내버려 둬. 일도 못 하는 거, 저런 촌뜨기 상대라도 시켜야지.”
“하필 왜 저기로 데리고 갔다니. 매장 가운데라 눈에 너무 잘 띄잖아. 미관 안 좋게.”
직원 1, 2와 지배인이 비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거참. 거슬리네.
조금 전에 눈까지 마주쳐놓고 계속 저런다.
‘무시하자, 무시.’
물건만 사면 되니까.
‘그럼 답례용은 이걸로 사고, 폐하 선물이랑 퓨랑 주인님 것만 보면 되겠다.’
나는 왼손 검지로 유리 진열장의 끝을 가리켰다.
“그럼 저 여기서부터.”
“사, 사모님!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죠? 그이도 저도 요즘 바빠서-. 근처 지나가다 남편 대신 매장 시찰차 들렸어요.”
“아휴, 이렇게 신경 써 주시고. 보시는 것처럼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내 뒤쪽, 매장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내 플렉스를 막을 순 없지.
나는 유리 진열장 위로 손가락을 움직여 반대쪽 끝 부분을 짚었다.
“여기까지 주-억!”
…….
혀 깨물었다.
“얘, 너 언제까지 있을 거야? 사지도 못하면 나가. 사모님까지 오셨는데 너 같은 평민이 있으면 물 흐리잖아.”
갑자기 나타난 직원1이 다가와 날 퍽하고 밀친 탓이었다.
훅 옆으로 밀려 바닥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유리 진열장을 붙잡고 몸을 멈췄다.
후후. 요즘 훈련으로 반사 신경이 늘었다니까.
“무슨 짓이냐!”
“헉.”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고함의 주인을 찾았다.
막 매장으로 들어오던 카디얀이 내가 밀쳐지는 꼴을 본 모양이었다.
검을 빼 든 카디얀에게 경비원 둘이 달려들었다.
카디얀 실력으로 저 둘은 우습게 떨칠 수 있었지만…….
“감히……!!”
매장 안에 있는 손님들과 직원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윽. 카디얀, 소란 반대.’
눈이 마주쳐 고개를 저었더니, 씩씩거리는 카디얀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검을 늘어트리긴 했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억누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기 직원들한테 열을 올리며 항의해봤자, 이쪽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줄 거 같고.
“저기요!”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씩씩하게 외쳤다.
내 돌발 행동에 몇몇 직원이 나를 바라봤다.
“저기요, 사모님!”
그러다 내가 부르는 사람이 이 매장의 사모님이라는 걸 알아차린 직원들과 지배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날 밀쳤던 직원이 뻐끔거리며 내 팔을 잡았다.
“미, 미쳤,”
나는 그런 직원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목청을 높였다.
그제야 카디얀을 빤히 보고 있던 사모님이 내 쪽을 돌아봤다.
“어머.”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반가운 기색으로 환히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올리비아 씨. 안녕하세요.”
나도 생글생글 웃으며 올리비아에게 인사했다.
내가 리리란 걸 외부에 밝히기 꺼리는 걸 알기에, 올리비아는 일부러 내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 센스있는 앙뜨완 제과점 사장님.
그건 그거고…….
슬쩍 주위를 보니 사태 파악 중인 직원들의 눈이 나와 올리비아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그래, 뭐하러 직원들한테 열을 올리나.
“고객의 소리함 남기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돼요?”
고객센터가 최곤데.
***
앙뜨완 제과점 본사 귀빈실.
올리비아의 간곡한 부탁에 카디얀과 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대접받고 본사를 방문해 티타임을 갖는 중이었다.
“면목이 없네요. 리리 님.”
“아니에요. 오히려 전 감사한걸요! 할인도 해주시고.”
“그냥 드렸어야 했는데. 거절하셔서 아쉬울 따름이에요.”
보석상에서 있었던 일을 완화해서 말했는데도, 올리비아는 불같이 화를 냈다.
전 직원을 모이게 하고 그간 고객들의 급을 나눠 태도를 달리한 것에 책임을 묻겠노라고 했다.
그러다 지배인의 횡령 사실까지 발각돼서, 큰일이 됐었지.
올리비아는 덕분에 보석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며, 감사와 사과의 의미로 내가 사려던 보석들을 그냥 준다고 했었는데.
그게 얼마인데 그냥 받는가.
직원 할인가에 지인 할인가까지 받는 걸로 올리비아와 타협을 보고, 저렴하게 보석을 구입했다.
폐하도 그렇고, 올리비아도 그렇고.
부자들은 이렇게 통이 커서 곤란해. 곤란한데……, 너무 멋있는 거 있지.
나도 나중에 비싼 보석 그냥 너 가지라며 줄 수 있는 재력을……!
“그런데 선물하실 분이 많이 계시나 봐요. 리리 님처럼 한 번에 그렇게 사시는 분은 드물어서요.”
순간 나는 멈칫했다.
이거, 지금 말 잘해놔야 나중에 ‘리리한테 판 브로치가 성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 브로치다. 그러니 리리는 성녀다.’ 같은 추론이 나오지 않을 텐데!
나는 머리를 핑핑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씨, 사실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