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변절자였다.
촛대의 불꽃에 하얀색의 신성석이 반짝였다.
우리에 박아넣은 신성석이 결계를 만들어 죽음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하지만 누가 이걸 잡아 올 생각을 한단 말인가.
샤를은 메스꺼워지는 속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미친 게 분명해.’
변절자에게 본능적으로 드는 거부감, 혹은 세이칸 신의 저주를 받을까 하는 두려움을 제외하더라도.
그녀가 봤을 때, 이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결계에 신성력을 보충하는 시기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변절자는 밖으로 나올 테고.
그 발이 닿는 곳마다 땅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검게 물들어 갈 것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어으어…….”
검은 덩어리가 내뱉는 끔찍한 쇳소리가 샤를의 고막을 긁었다.
‘저것도 한때는 인간이었겠지.’
바버논 왕국의 사람이었을까.
꿈에 나올까 무서운 생김새야.
변절자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관찰한 적은 없었기에, 샤를은 인상을 쓰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데르아치 대공이 대변인에게 이만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대변인은 우리에 천을 씌운 뒤 수레를 끌고 아까 나타났던 벽 뒤로 사라졌다.
“어떤가. 왕녀가 보고 싶으시다고 하여 이쪽의 패를 보여줬는데.”
“……결계를 유지하는 데 신성력 효율이 낮을 거 같네요.”
샤를은 태연한 얼굴로 코에서 손수건을 뗐다.
“결계가 무너지면 죽는 건 당신들일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곤 빈정거리는 정도로 변절자의 등장을 넘겼다.
‘저렇게 대수롭지 않은 태도인데, 정색하고 달려들어 봤자 우스워지는 건 이쪽이지.’
대신 맞은편의 대공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데르아치 대공의 눈주름이 짙어졌다.
마치 샤를의 헤이즐넛 색 눈동자에서 풋내가 난다는 듯한 눈웃음.
“그리 걱정까지 해주시다니. 결계는 문제없을 걸세.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저걸 잡아 온 건 아니라.”
데르아치는 제 앞에 있는 촛대에 향을 하나 태우며 물었다.
“그래서, 결정은 하셨는가.”
“글쎄요. 저렇게 역겨운 걸 보여줘 놓고. 이쪽에 선택권이 있으려나?”
역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변절자를 잡은 걸 보여주다니.
한배를 타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쪽의 제안을 거절하면 구경 값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한 왕국의 왕녀이신데. 본국에 돌아가게는 해드려야지.”
샤를은 속으로 조소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저라고 그냥 왔겠는가.
암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정보까지는 그녀도 조사했다.
거기엔 데르아치 대공이 정신 조작 계열의 신성력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기억을 없애거나, 정신을 조종해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둘 다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이쪽도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샤를은 슬쩍 소매 아래에 숨겨온 암기를 매만졌다.
“왜 나한테 이걸 보여준 거죠? 그 전에. 당신과 함께하는 귀족들도 알고 있는 건가?”
“젠달은 신을 두려워하는 새가슴들이 많아서. 왕녀만 보셨네.”
“보니아 왕국도 세이칸 신을 두려워하긴 마찬가지인데.”
이 세계에서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피조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이칸 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아까 그 변절자 꼴이 날 텐데.
데르아치는 허공에 휘적이던 향을 향꽂이에 꽂았다.
“하지만 그만큼 성녀를 원하기도 하지.”
“…….”
마치 보니아에 대해 제가 아는 무언가를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보니아의 피와 성녀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건가.
샤를은 데르아치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넘실거리는 향의 연기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 실루엣이 교활한 뱀의 거대한 대가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에 가득한 고약한 냄새가 무거운 향과 섞였다.
변절자, 뱀, 성녀, 젠달.
다시 변절자, 뱀, 성녀, 젠달.
벽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며 한 바퀴를 돌 동안, 샤를의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짧은 침묵 후, 저울질을 끝낸 그녀의 입이 열렸다.
“병력만 제때 빌려주면 이쪽에 피해가 없도록 한다고 했죠?”
“그랬지.”
때마침 벽 뒤에서 그의 대변인이 나왔다.
“제안을 받아들이죠.”
역모가 일어나는 곳도 젠달.
변절자 때문에 세이칸 신의 저주를 받게 된다 해도 그 또한 젠달.
어차피 망하는 건 젠달인데, 뭐 어때.
제가 원하는 바만 이루면 그만이다.
샤를은 한 시야에 들어온 데르아치와 대변인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꾸미든 관심 없으니, 나중에 약조했던 부분이나 제대로 지켜줬으면 좋겠네요.”
***
델칸은 문밖으로 나오는 샤를을 보며 벽에 기댔던 등을 뗐다.
대변인과 함께 나오는 샤를은, 어딘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뭐가 잘 안됐나?’
진한 눈 그늘을 달고, 대변인은 샤를에게 인사했다.
“저는 여기서 배웅해 드려야겠군요. 저택 앞에 국경까지 타고 가실 마차를 준비해놨습니다. 시종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떠나는 모양이었다.
델칸은 샤를을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데르아치의 대변인이 제 팔을 잡은 탓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델칸이 그에게 물었다.
대변인은 콜록거리며 델칸에게 말했다.
“호위 분께선 이쪽에 남으시기로 왕녀님과 얘기가 됐습니다.”
무슨.
델칸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제 앞에 선 샤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샤를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뒤를 돌아 델칸을 바라봤다.
“맞아.”
그리곤 델칸의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그게 그녀가 불안함을 감출 때 짓는 표정임을, 델칸이 모를 리 없었다.
“왕녀님-.”
“델칸.”
샤를은 델칸의 말을 잘랐다.
“넌 여기 있으렴.”
***
평상시처럼 흘러가는 어느 날, 저녁.
프로딘타 궁으로 온 요리의 뚜껑을 열어본 시아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요리 그릇에 완두콩 세 개가 있네요. 리리 님 앞으로 우편이 왔나 봐요.”
시아나의 말대로, 주요리 접시에 완두콩 세 개는 헬리와 나의 비밀 사인이었다.
리리의 우편물이 헬리한테 도착했다는 의미.
“앙뜨완 제과점인가?”
신메뉴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번에 다 얘기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디저트까지 싹싹 비운 뒤 부랴부랴 주방으로 갔다.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올리비아가 보낸 건 아닙니다. 발신인이 코아루라는 사람이라더군요.”
“코아루……? 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 이름에 기억을 더듬다가 탄성을 질렀다.
“천재 조각가!”
허퍼슨이 알아봐 준 젠달의 천재 조각가였다.
두 달 전에 넣은 조각상 제작 예약 차례가 왔으니, 의뢰 내용을 적어 답신해달라는 편지였다.
“…….”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예배당 출근 첫날에 꿨던 꿈을 드디어…….
감격에 젖어 편지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폐하, 지금 행복하시죠? 왜냐면 제가 지금 미치도록 행복하거든요……!
역시! 인생은! 존버가 승리한다니까! 영차, 영차.
우편을 곱게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더니, 옆에서 지켜보던 시아나가 물었다.
“답장은 나중에 하시려고요?”
“응? 답장을 왜 해?”
시아나와 헬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보며 “당연히 하실 줄 알았는데요.”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는 그런 둘을 보며 씨익 웃었다.
“당연히…….”
직접 가야지!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우편을 주고받는 시간도 아까웠다.
다음 날.
지난밤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는 아침을 먹고 초비의 염색약을 사용한 후, 황궁 밖으로 나왔다.
호위를 맡은 카디얀이 동행했다.
황궁과 마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천재 조각가의 작업실이 있었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했다.
“직접 오신 분들은 종종 있지만, 이렇게 빨리 오신 고객님은 또 처음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더벅머리를 털었는데 석회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쪼리 같은 슬리퍼를 신고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동네에 있는 백수 오빠 같아서 친근해…….
코아루는 작업실 한쪽, 나무 테이블에 우리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리곤 필기구를 가져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도안을 만들어 보죠. 생각해 두신 조각상 형태가 있으십니까?”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방에서 종이 열 장을 꺼냈다.
바로 내 야심작, 폐하 조각상 도안 후보 10위권에 든 도안들이란 말이지!
“오호.”
코아루의 눈빛이 빛났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고객님은 처음이라며, 감탄을 거듭했는데.
‘후보가 146장이었단 소리는 하지 말자. 소란스러워질 거 같으니까.’
나름대로 고심해서 순위를 정한 거긴 했지만, 못 갖고 온 도안들이 너무 아쉬웠다.
역시 헤이즐이 말했던 베개 들고 온 어린 폐하도 후보에 넣었어야 했는데……!
다음엔 꼭 그걸로 해야지…….
“좋은 게 많군요. 조금만 손보면 그대로 작업해도 될 정도예요. 고객님의 도안 중에서 하나를 골라보죠.”
하지만 아쉬워할 시간도 없었다.
오늘 안에 도안을 결정해야 하니까!
코아루와 나는 금세 의기투합했다.
“그러면 세 번째 도안으로 하고, 돌은 처음에 말씀드렸던 걸로 해서 섬세함을 좀 더 살려보는 건 어떨까요? 표면이 매끈한 돌이라 피부 표현을 하기에도 좋을 겁니다.”
“오, 좋아요. 아, 그리고 여기는 좀 더 각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 방향으로 살짝만 틀어주면 어때요?”
“좋습니다. 이거, 의뢰인께서 적극적이셔서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 같은데요.”
그렇게 손가락 각도나 ‘머리카락은 얼마만큼을 어느 방향으로 날릴 건지’ 같은 디테일까지 챙기고 나니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그러면 중간에 한 번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전체적인 구조나 세밀한 부분을 다시 확인하는 걸로 하죠.”
“넵. 잘 부탁드려요!”
“들어가십쇼. 고객님.”
배웅하는 코아루의 뒤로 보이는 작업물들이 믿음직스러웠다.
우리 폐하 조각상도 저렇게 잘 뽑히면 좋겠다.
후후. 조각상 완성되면 어디에 세워야 잘 세웠다고 소문나려나.
“성녀님, 보석상으로 갈까요?”
마차가 출발하기 전, 카디얀이 다음 목적지를 물었다.
조각상 의뢰는 끝났지만, 기왕 나왔으니 볼일을 죄다 해결하고 갈 생각이었다.
“네, 보석상으로 가요!”
황도에 있는 좋은 보석상을 미리 알아둔 참이었다.
지난번에 받은 생일선물 답례품을 거기서 사려고 했는데, 문제는…….
“와. 이것도 이쁘다.”
유리 진열장 안의 브로치를 구경하는 중, 나한테 하는 게 분명한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요즘 평민들은 주제도 모른다니까. 가격 들으면 바로 나갈걸. 뭘 저렇게 열심히 보나 몰라.”
슬쩍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직원들과 내 험담을 하던 지배인과 눈이 마주쳤다.
지배인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옆 직원에게 귓속말하며 키득거렸다.
“지 얘기하는 줄은 아나 봐? 들리지도 않을 텐데.”
……다 들리는데요?